많은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불만도 많다. 나 역시 민주노동당을 사랑하지만 불만도 많다. 그 중에서 하나가, 지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 당 역시 매우 중앙집권적인, 좀 자극적인 단어를 쓰자면 초 중앙집권적인 한국의 정당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보수정당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그러하고 틈새시장을 파고 들어가는 생존 전략 또는 적들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간다는 전술 차원에서도 그렇고, ‘지방(자치)’이라는 화두는 민주노동당이 열심히 또 열심히 공부해야 할 화두가 아닌가? 그런데, 때때로 “아,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활기 없는 당론과 이유모를 태평함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해 ‘정당 공천’을 하는 방향으로 선거법이 개정되어도 우리 당의 지방자치위원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회 의원들,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나 공무원 노동조합 지부들에서 비난 성명이 잇따르고 이에 무언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어서 보수 양당의 지방자치위원장이나 국회의원 중에서 몇몇은 단식 투쟁에도 들어가고 반대 입장도 내는데 우리 당의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위원장의 얼굴은 태평하다.

어쩐지 나에게는 이런 우리 당의 모습이 생명력이나 활기가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 당연히 지방 당부들로부터 문제 제기도 있고 이에 어떻게 응답할지를 두고서 선거법 개정안에 ‘당론으로 찬성 투표한’ 민주노동당의 지방자치위원장은 고민에 빠져야 맞지 않은가? 그것이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당의 당연한 모습이 아닌가?

왜 공무원 노동조합 진주시지부에서는 ‘기초의원 정당 공천’에 대해 비난 기자회견을 하는데 민주노동당 진주시위원회에서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중앙당에 문의하지 않는가? 다들 오직 ‘당론’에 너무나 충직해서인가?

물론 문제는 애초의 ‘당론’에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초단체장 정당 공천 배제’를 반대해온 민주노동당의 당론은 원칙으로 보면 맞지만 현실로 볼 때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이유로 되어 있는 “정당 정치가 지방자치의 영역에까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은 추상 이론적 차원에서는 옳지만 구체 한국 현실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비민주적, 중앙집권적인 정당들의 지방 장악력을 높여주자는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회 의원 정당공천'은 특히나 사실상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영호남에서는 지방자치를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정당의 국회의원들의 손아귀로 더욱더 밀어 넣어주는 결과, 결국에는 ‘반자치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영남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은 기초단체장 후보는 곧 당선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하나마나한 선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초단체장의 정당 공천 배제’에 대한 국민 여론의 지지가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송철호의 추억’, 합리적인 사고를 막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이런 ‘경직된’ 태도에 대하여 지방의 시민단체들은 민주노동당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민주노동당이 이런 입장을 고집하는가? 왜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민주노동당에게도 하등의 이익이 없는 선택을 하는가? 이것이 그들의 의문이다.

기초단체장을 정당 공천하면 민주노동당은 더 많은 당선자를 낼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나마 정당 공천을 배제해야만 영호남 지역의 일당 독재 정당들에 대항하는 ‘연대’의 대표 주자로서 민주노동당의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지방 선거에서의 그런 ‘연대’를 금기시하는 당의 분위기도 문제다. ‘송철호의 추억’은 민주노동당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어 합리적 사고를 가로막고 있다. 그 좋지 않은 기억도 냉정하게 반추해서 소화하고 정신적 외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영남권 진보벨트’는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그와 짝을 이루는 유연한 전략적 사고, 그리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폭넓은 ‘우리 편 만들기’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지방’의 관점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슈는 행정 수도 이전 문제였다. ‘행정수도이전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내가 줄곧 생각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의제에 대하여 무조건 반대로 일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큰 판단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반대는 (국민들의 눈에 비칠 때) 반드시 ‘대안 있는 반대’가 되어야 한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통일 수도의 기능에 속할 것은 행정수도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점과 거대한 신도시를 인위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방식은 곤란하다는 점, 두 가지 이유로 애초의 정부 계획에는 반대를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수도 이전, 그 자체까지 반대한다면 민주노동당은 지방이라는 관점에서는 또 하나의 중앙집권적 정당으로 보였을 것이다.

반대의 이유도 명확하고 대안도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당의 여러 간부들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다루어 나갔다. 바로 그 점이 우리 당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득점을 별로 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유일하게 ‘지역 정당’이 아닌 민주노동당 만이 이 문제를 보다 순수하게 ‘정책적 문제’로 다룰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토론이 무시된 즉흥적인 결정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해나갔다면, 특히 헌재 판결 이전에 우리의 대안을 채택하여 왕성하게 선전해나갔다면 헌재 판결의 그 순간에 민주노동당의 존재는 크게 빛났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헌재 판결 이후에 가서야 뒤늦게 우리의 대안을 채택하니 그야말로 뒷북을 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헌재 판결에 대해 환영 성명을 내놓은 노회찬 의원의 행동은 ‘행정수도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에 해당 특위가 구성되어 있는데 특위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입장을 내게 하여 그것을 지도부가 추인해야만 특위를 구성한 의미가 있을 텐데 막상 헌재 판결이라는 돌발 사태가 벌어지자 아무도 특위의 존재를 상기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특위장이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당의 행태였다.

이는 이해찬 총리 인준과 관련하여 여러 분야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인사청문회 공동평가단’을 구성하여 상당한 검증과 공개 토론의 절차를 거쳐서 ‘가(可)’로 결론을 내려놓고서도 막상 인준 표결에 임해서는 평가 결과를 싹 무시하고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총리(서리)’라는 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반대 당론을 결정한 그런 즉흥적인 행태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모든 의원들이 당에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전당적 토론을 진행한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원 총회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기만 하였다. 그러니 의원들이 당론을 이해하지 못한 채 표결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조승수 의원이 표결과 관련한 당의 지침을 위배하고 ‘소신표결’하여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합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실은 그야말로 이 문제를 가장 깊이 고민하고 또 이해하고 있던 의원이었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은 ‘지방’이라는 화두에 좀 더 깊이 천착해야만 한다. 좀 더 자주 지방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방’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는 대구시 서구의회의 장태수 의원 같은 사람이 수백 명이 된다면 민주노동당의 활로는 반드시 뚫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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