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노동권 연구활동가

서울고법이 지난 24일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할 사용자임을 재확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1월 서울행정법원이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린 후 정부와 재계는 이 판결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는데, 이번 고법 판결문을 보니 그런 비판에 대한 법원의 답변을 읽을 수 있었다.

정부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사용자’ 정의에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단체교섭의 상대방인 사용자를 지나치게 확대함으로써 ‘제3자’인 기업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원은 사용자가 자기의 사업을 위해 노동자를 활용하면서도 그와 근로계약관계를 맺고 노동법상 책임을 지는 방식을 회피하고 간접고용, 특수고용을 활용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로계약관계가 아닌 방식으로 노동자를 활용하면서 자기 스스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제3자’로 위치시키는 기업의 행태가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법원은 “근로조건 등을 지배·결정하는 자와 단체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집단적 교섭을 통해 근로조건 등을 결정·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단체교섭권이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원은 노조법상 사용자 여부는 근로계약의 당사자인가 여부, 즉 근로계약을 맺고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인가 여부를 기준으로 도출할 수 없고, 노무제공관계의 실질에 비추어 노동 3권을 침해할 수 있는 권한·지위에 있는지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재확인하고 있다. 노조법의 사용자 범위를 노동관계의 실태에 맞추어 인정하면, 노동조합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업주를 상대로 교섭을 요구하는 무법천지가 될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한 정부와는 달리 법원은, 노조법의 사용자로 인정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구체적 의무는 노조와 교섭에 성실하게 응하는 것일 뿐 노조의 요구 내용대로 단체협약을 체결할 의무까지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기업활동의 자유 등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더불어 법원은 단체교섭권은 “노동관계 당사자들이 근로조건 등에 대해 자율적인 교섭과 협의를 거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소통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도 확인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포스코, 하이트진로, CJ대한통운 등 재벌·대기업에서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자와의 단체교섭이 가로막힘으로써 분쟁이 오히려 장기화, 악성화되는 사례들을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목격했다. 역으로 비공식적 혹은 ‘사회적’ 대화의 틀을 걸치고라도 노동조건 개선에 실질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용자와 대화나 교섭이 가능할 때 분쟁이 빠르게 해결된다는 경험도 해왔다. 노조법 2조 개정 요구는 이런 노사관계의 현실과 경험을 반영해 노동법을 현대화, 실질화하자는 요구와 다름없다.

그동안 정부와 재계는 노조법의 사용자 개념을 실질화하면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등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노조법 전체 체계를 흔들게 된다”며 겁박했다. 하지만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등 노조법의 단체교섭 관련 각종 절차들은 사업장에서 노동조건의 통일적 개선을 목적으로 노조법에 창설된 제도일 뿐 헌법상 기본권인 단체교섭권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기업별 교섭체계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자체로 단체교섭의 다양한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을 해 왔다. 이 점에 대해 법원도 “사용자 개념의 이러한 해석이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등 노조법이 규정하고 있는 단체교섭 절차 및 과정과 관련된 개별 규정들에 온전히 포섭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러한 사정이 기본권으로서의 단체교섭권의 행사 범위를 제한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고 인정할 정도다.

이번 서울고법의 판결은 노조법 2조 개정이 헌법과 현행 노조법에 위배되며 기업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정부와 재계의 주장이 과장되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확인해 주고 있다. 이제 다시 노조법 2조 개정 요구를 벼려야 할 시점이다.

노동권 연구활동가(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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