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때는 2021년 가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나는 새로운 업무를 부여받았다. 50명 이상 사업장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는 2022년 1월27일을 몇 달 앞둔 시점이었다. 법이 현장에 잘 안착하려면, 중소기업에 필요한 사항들을 사전에 점검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회의체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노동계와 경영계의 제안이 있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담당 전문위원이 배정되기 전에 나는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제가 맡아서 해볼게요.” <무사안일> 다섯 번째 사연은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의 안타까운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합의는 했는데 이행은 안 한다?

2021년 10월8일 경사노위 본위원회에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신설 안건이 의결되고, 예비 의제 선정과 위원 위촉 등 실무절차를 거쳐 같은 해 12월17일 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으로 위촉된 강성규 가천대 교수는 회의 첫날 “산업현장의 사고와 질병의 예방, 특히 산재 취약지대인 중소기업의 중대재해 예방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에 집중할 계획”이라며 “중대재해처벌법이 도모하는 궁극적 목표인 효율적인 산업재해 감소방안 수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논의의 초점이 중소기업에 맞춰져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게 첫발을 뗀 위원회는 장장 1년3개월간 논의를 이어갔다. 사회적 대화에 한 번이라도 참여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동어반복 같은 논의가 지난하게 이어질 때, 답답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은 순간에도 회의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지.

인고의 시간을 거쳐 지난해 3월14일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이하 노사정 합의문)이 세상에 나왔다. 이때 나는 경사노위를 퇴사하고 대학원에서 산업보건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합의문이 나왔다는 소식에 혼자서 뿌듯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역사의 진전에 점 하나 찍는 정도의 조력은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10개월이 흘렀다. 노사정 합의문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노정관계 경색과 사회적 대화의 중단

경사노위 홈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봐도 노사정 합의문에 대한 이행점검이 이뤄지고 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병이 도져서 경사노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합의는 잘 지켜지고 있나요?” 그리고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놀랍게도 노사정 합의문은 아직까지 경사노위 본위원회의 공식인준을 받지 못한 상태다. 2022년 12월 서면회의 형태로 12차 본위원회가 진행된 뒤 1년이 넘도록 본위원회가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위원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이행점검위원회의 점검대상이 되고, 그제야 노사정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모니터링이 시작된다. 그런데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다.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닌데, 노사정 합의문은 열 달째 숙면 중이다.

경사노위는 왜 본위원회를 열지 못했을까. 노사정 합의가 나오고 두 달여가 흐른 지난해 5월31일 새벽. 전남 광양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 망루에 올라 원청에 하청노동자와의 교섭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이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 내려왔다. 한국노총은 6월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경사노위 불참을 결정했다. 사회적 대화에 빗장이 채워졌다.

노정관계는 내내 살얼음판을 걸었다. <매일노동뉴스>의 2023년 10대 노동뉴스에 △대통령의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 거부권 행사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 추진 △노조 회계공시 제도 시행 △‘건폭몰이’ 항의한 건설노동자 분신 △양대 노총 압수수색 등이 포함됐다.

‘합의 이행’ 위한 부칙까지 달았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노사정 합의문을 출력해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본다. 방대한 내용을 꾹꾹 눌러 담은 흔적이 역력하다. 지면의 한계를 고려해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중소기업 산재예방에 관한 문구 중 일부를 발췌했다.

1-1. 산재예방의 정책 수립과 수행에 있어 노사의 적극 참여가 필요함을 인식 (…) 현재의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예방심의위원회」를 산재보상과 산재예방으로 운영과 기능을 분리하고, 산하 「산업안전보건전문위원회」의 활동을 실질화한다.

1-2. 현재의 산업안전보건법규가 소규모 사업장 등에는 일부 작동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 (…) 사업장 현실에 맞는 안전보건법규를 마련한다.

1-4. 중소규모 사업장은 자체적으로 안전장비와 시설 등을 개발 및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 (…) 산업안전보건 기반 확충 및 관련 산업의 증진을 위한 산업재해 예방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마련한다.

2-2.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안전보건기술과 전문전담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식 (…) 중소규모 사업장에 대해 안전보건경영시스템 구축 및 스마트안전보건 연구를 적극 지원하고, 관련 교육기관과의 협업 등을 통해 전문인력을 적극 양성한다.

2-4. 중소규모 사업장의 안전한 일터 조성을 위해 원·하청 상생협력을 통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및 확산을 지원한다.

합의의 백미는 부칙이다. 노사정 합의문에 부칙을 따로 두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문장을 통째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칙. 정부는 합의문의 합의가 주기적으로 도출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이행 및 점검을 위하여 노사 간사단체와 실무자로 구성된 이행점검 협의체를 구성하여 운영한다. 노사정은 합의문 내용을 전파 및 공유하고, 적극적인 이행을 독려하며 지원한다.

합의문이 성실하게 이행되기를 바라는 노사정의 진심이 느껴진다. 기존의 유사한 합의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동계와 경영계의 ‘자기 고백적’ 문구도 눈에 띈다.

4-1. (…) 노사는 노사관계의 문제를 안전보건문제와 결부시키지 않고….

담합적 노사관계 구조에서 안전보건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던 과거의 관행, 그 결과 ‘위험의 외주화’로 상징되는 불평등 심화를 초래한 현실에 대한 고해성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사회적 대화의 계절은 오고

50명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시기를 추가로 유예하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로써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도 법 적용을 받게 됐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정부는 법이 확대 적용되면 나타날 수 있는 현장의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3개월간 전국 83만7천여곳에 달하는 50명 미만 사업장 전체를 대상으로 ‘산업안전 대진단’에 돌입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정부가 제 역할에 나서겠다니 다행스럽다. 감독인력 부족 같은 현실적 어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하면서 정부가 정부답게 일해주기 바란다.

끝으로 정치쟁점이 돼버린 산업안전보건청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안전보건청은 이번 입법논의 과정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안이 아니다. 산업안전보건행정의 전문성 확보 방안 중 하나로 과거 노사정위원회 시절부터 관련 논의가 이어져 왔고, 2020년 4월 도출된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에 포함된 내용이다. 합의 당사자인 정부가 이를 정치쟁점화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다시 사회적 대화의 계절이 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노총의 경사노위 복귀 결정이 계기가 됐다. 사회적 대화는 결국 신뢰를 먹고 자란다. 노사정은 열 달째 잠자고 있는 중대재해 예방 합의문을 깨우고, 굳게 약속한 이행점검 협의체부터 가동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의 이름표를 단 하나뿐인 노사정 합의에 산소마스크를 씌우자.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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