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장정을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해묵은 논쟁, 사회적 대화가 주제다. 사회적 대화는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입구에서부터 삐걱거리는가 하면 구성과 운영, 의제 선정과 논의, 그리고 결과의 이행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주기(life cycle)가 지뢰밭이다. 20여년에 걸친 사회적 대화가 무색하리만치 어느 하나에도 ‘사회적 합의’는 없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견해는 노동 연구자나 활동가의 성향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예민하면서도 본질적이다. 사회적 대화에 찬성하면 개량주의자이거나 친정부적이며, 반대하면 노동의 전투성을 옹호하고 체제전환을 지향한다는 식이다. 전형적인 흑백논리다. 그것은 추상적인 이념을 앞세워 사회적 대화가 지닌 현실의 다양성과 폭넓은 스펙트럼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현실은 늘 이론의 주변을 맴돌았다. 사회적 대화의 경험은 쌓이지 못해 사회적 대화의 이론으로 전화되지 못했다. 기록되지 않은 탓이었다. 사회적 대화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이론이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새에 후임자는 전임자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무너졌다.

현장의 절박한 질문 위에서
사회적 대화 경험 구축돼야

옛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의 마지막 상임위원이자 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첫 상임위원으로 일했다. 2017년 8월부터 2019년 8월까지 2년, 사회적 대화의 막차를 떠나보내고 첫차를 맞이하는 시절이었다.

노동존중사회 구축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사회의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사회적 대화에 맡겼다. 노동존중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노동정책을 넘어 정권 차원의 과제였다. 대통령은 수시로 사회적 대화에 관심을 표명했으며 사회적 대화를 성사시키느라 민주노총이 불참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노동계를 만났다.

결과가 의도한 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빛과 그림자는 공존했다. 시행착오의 과정이었고 때로는 실험의 서사가 실패의 서사로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실험이 기대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고 해서 패배로 치부하고 폐기할 일은 아니다. 때로는 실패했기에 더 많은 서사를 남긴다.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최명희의 작품 <혼불>에 나오는 말이다. 어둡고 암울한 실패에서 가능성의 빛을 찾는다는 말로 나는 이해한다.

흘러간 물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전환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가교로서 사회적 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전환의 시대는 다중위기와 복합재난의 시대이자 창조적 파괴의 시대다. 갈등의 시대고 분열의 시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전환의 시대를 건너는 가교가 된다. 정부가 사회적 주체들과 소통하고 권력을 나눠 함께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해 사회적 대화는 사회통합과 집단적인 동원의 메커니즘이 된다. 그것은 이해당사자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가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가닿는다.

사회적 대화의 ‘좌절된 개화’

이 글은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대화, 그중에서도 초기 2년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거쳐 경사노위가 출범한 시기와 함께 민주노총의 참여가 ‘최종적으로’ 불발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 사태를 맞으면서 사회적 대화가 때 이른 조락(凋落)으로 접어든 시기를 아우른다.

백가가 쟁명하듯 사회적 대화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적 관심도 한껏 높던 시절이었다. 이때를 클라이맥스로 삼아 사회적 대화의 실험은 사실상 멈췄고 사회적 관심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좌절된 개화였다.

물론 이 글의 관심이 문재인 정부 초기의 실험에만 머물 이유는 없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말기에 마지막 반전처럼 타올랐던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의’는 사회적 대화에 관한 한 ‘팩트의 보고(寶庫)’다. 그것이 좌절됐기에 더 많은 서사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경제와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외부의 충격이 사회적 대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우리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많은 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문재인 정부 초반, 사회적 대화가 경험한 실험과 좌절의 시기는 내가 상임위원으로서 재직한 시기와 일치한다. 경사노위에서 상임위원은 현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할 만큼 다양한 역할을 조율한다. 우선 경사노위의 최고위 상근직(위원장은 비상근이다)으로서 본위원회 멤버이자 사무처장직을 수행한다. 또한 노사정의 부대표급으로 구성돼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이자 실무급 회의체인 의제개발조정위원회의 대표이기도 하다. 필요할 경우 의제별·업종별 위원회를 직접 담당하기도 한다.

이 글이 참여적 관찰(participatory observation)에 의존한다면 상임위원이라는 자리는 사회적 대화를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전망대라는 사실을 말한다. 참여적 관찰이란 외부자의 평론이 아닌 내부자로서 실전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기록을 통해 상임위원으로서의 경험을 공적 자산으로 남김으로써 상임위원의 역할도 마무리된다고 봤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실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묻는 질문은 한결같다.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는 어떤 환경적·주체적 조건에서 가능할까?” 이 과정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윤석열 정부 너머의 사회적 대화를 전망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공론의 장이 되길

사회적 대화에 대한 해석과 대안은 나 자신에 의해 왜곡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사건이나 현상이 다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결국에는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이 제시하는 해석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 글은 당파적이고 진영적이다.

당시와 이 글을 쓰는 시점 사이에 생각이 바뀐 지점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옳다고 믿어 다른 주체와 갈등을 빚으며 추진했던 사항도 있다. 그런데 바뀐 그 생각조차 옳다는 보장이 없다면 허무하달까. 그조차도 가설일 뿐이다.

이 칼럼의 제목을 ‘사회적 대화에 관한 대화’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제기하는 가설이 논박의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질문으로 바뀌고, 그것이 현실과 교감하면서 진화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가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만나 해법을 찾아가는 공론의 장이라면, 이 글 역시 사회적 대화에 대한 대안들이 만나 공방을 벌이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이참에 <매일노동뉴스>에게 이 글의 반론에 대해 지면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다. 제기된 반론에는 열심으로 토론할 작정이다.

이제 사회적 대화에 관한 대화를 시작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밑돌을 이룬 운영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밀고 당기면서 일궈 낸 소중한 성과들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대화는 합의가 아니라 협의라는 사실, 노사중심성의 원칙, 계층위원제의 도입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 해석 또한 나 자신의 시선으로 처리한 내용이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