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인생이 마치 하나의 과업, 숙제처럼 느껴진다. 나중에 커서 잘 되려고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했고, 그 덕에 하위 50%보다 상위 50%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 과연 내가 나를 위해 살았는지. (중략) 인생을 책임감을 완수하기 위해, 하루하루 미션을 정해 놓고 사는 게 옳은 건가. 인생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그 의무를 다해 가며 사는 게 맞는 건가 싶다.”

13년간 ‘증권맨’으로 일했던 30대 가장 A(사망 당시 37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일주일 전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익명으로 남긴 글이다. 그는 실적 압박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6개월 동안 항우울제를 복용했지만, 결국 삶을 내려놓았다. 근로복지공단은 그에게 ‘자살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개인적 사유로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6년여 만에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조선업 불황’에 실적 달성률 최하위

2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창원지법 행정1부(재판장 이정현 부장판사)는 A씨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1심 결론까지 1년 넘게 소요됐다.

A씨는 2005년 국내 한 대형증권사에 입사해 차곡차곡 경력을 쌓았다. 2010년 대리를 달고 5년 뒤 과장(선임매니저)으로 승진했다. ‘주식매매 영업’이 주된 업무였던 A씨는 투자자산운용사를 취득할 만큼 업무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전체 업무 중 절반 가까이는 고객과 상담했다. 이와 함께 실적 현황을 보고서로 작성해 본부에 제출하는 업무도 잦았다. 그런데 2017년 12월 증권지점을 옮기며 어두운 터널이 시작됐다.

‘조선업 불황’이 직격탄이었다. 중국과 브라질 주식 폭락으로 해외투자상품 수익률도 낮아졌다. 지점의 실적 누적 목표 달성률은 2018년 상반기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하반기 들어 급격히 추락해 2018년 6월에는 지역 전체 지점 중 꼴찌에 머물렀다. 이는 A씨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그해 2분기 목표 달성률이 지점 직원 5명 중 최하위에 해당했다. 월별 포상금 액수도 줄었다. A씨의 2018년 휴가는 이틀에 불과했다.

이 무렵부터 ‘업무 스트레스’에 따른 전조증상이 나타났다. 체중이 불었다. 지점을 옮긴 이후부터 2018년 6월까지 병원에서 항우울제와 비만치료제를 복용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나흘 전에는 왼쪽 가슴에 통증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2018년 초 아내에게 “올해 성과는 좋아졌는데 하나만 더 잘되면 눈에 띌 것 같다” “회사에서 인정을 못 받으면 그냥 열심히는 하지만 성과는 그럭저럭하는 직원 정도로 남을 것 같고 인근의 어느 지점에서도 반기지 않을 것 같다”는 내용의 SNS 메시지를 보냈다.

“영업직은 전생에 죄 많이 지어 하는 일”

그러나 자신에 대한 동기부여는 오래가지 못했다. A씨는 실적이 저하되자 10년간 함께 일한 동료에게 “죽고 싶다. 영업직은 전생에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했고, 세상을 등지기 직전에는 중학교 동기에게 전화해 “그냥 사라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악재는 겹쳤다. 아내가 갑상선암이 걸려 수술을 받았고, 출근 도중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다. 주식매매 영업을 위해 대출도 했다.

결국 A씨는 6월 실적현황 보고를 앞둔 2018년 7월1일 집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상 사유로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업무실적이 전년 대비 상승해 최종 순위도 중위권으로 확인되는 등 업무적 요인도 없다고 판단했다. 재심사도 기각되자 유족은 지난해 8월 소송을 냈다.

세세한 법원 판단 “전보 발령 스트레스 가중”

법원은 공단 판정을 뒤집었다. 약 17쪽에 걸쳐 업무상 재해 근거를 설명했다. 먼저 A씨가 주변인에게 말한 내용이 ‘우울증 신호’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고인이 6개월 동안 원고(아내)에게 발송한 문자메시지나 개인적으로 남긴 글에서 불안감·우울감을 겪고 있음을 추단할 수 있는 부정적인 표현이 점차 증가했고, 표현 수위도 점점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였다”며 “2017년 11월25께부터 우울증상이 발생했고, 증상이 사고에 이를 때까지 점차 악화하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정신과 진단이 없었던 점도 산재 불인정 근거로 삼지 않았다. A씨는 2018년 3~4월께 동료가 병원 진료를 권유하자 “약은 먹고 있다”고 답했다. 정신과 진료로 인해 지역에 날 소문도 걱정했다. 아내에게 “자산관리사가 정신과에 다닌다고 소문이 나면 누가 재산을 맡기겠냐”고 했다. 재판부는 “신규 고객을 유치하고 기존 고객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고인으로서는 정신과에서 치료받는 경우 낙인 효과를 우려해 적극적으로 진료받지 못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법원 판단은 세세했다. 전보 발령을 스트레스 가중요인으로 봤다.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정신건강의학과) 의견도 일치했다. 재판부는 “고인이 근무환경이 변화된 상황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직장동료들에게 고충을 토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며 “인사이동 후 성과를 내지 못하면 퇴사한 직장 후배와 마찬가지로 다시 전보 발령을 받을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유족 “열심히 일하다 죽은 아버지로 기억되길”

구체적으로 △2018년 2분기 지점 최하위 실적으로 인한 죄책감 △실적 현황 보고서 작성 압박 △불규칙한 고객 응대 업무 등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지표로 제시했다. 특히 아내의 갑상선암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요인이 됐다는 공단 주장을 일축했다. A씨가 최초로 극단적 선택을 암시한 시점은 아내의 암 진단보다 앞섰다는 것이다. 법원 감정의는 “우울증으로 인한 극도의 흥분상태, 갑작스러운 해리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는 소견을 냈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공단 판정 과정에 나침반이 되기를 기대한다. ‘자살 산재’ 사건의 공단 승인율은 지난해 기준 52%(신청 97건·승인 50건)에 머무른다. 하지만 소송에서 최근 5년간 공단 패소율은 46%다. 공단이 자살 사건 산재인정에 인색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족을 대리한 조애진 변호사(법무법인 시대로)는 “판결문에 드러난 논증 과정은 근로복지공단이 재해조사와 질병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침서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치밀하다”며 “향후 공단이 자살의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때 진지하게 참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법원이 산재를 인정했지만, 유족은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다. A씨 아내는 “(숨졌을 당시) 그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자식을 버리지 않은 아버지’로 남길 바란다고 울먹였다. “(산재가 인정돼) 아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다가 너무 힘들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모습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아이들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이에요. 사별모임을 갔는데 남편처럼 떠난 분들이 많았어요. 다들 일하다가 그렇게 목숨을 잃은 겁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