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 콘티넨탈오토모티브일렉트로닉스지회(지회장 조남덕)가 올해 9월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는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금속노조 콘티넨탈오토모티브일렉트로닉스지회>

작업중지권의 ‘정당성’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취지다. 대법원은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노동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작업중지권 인정 범위가 넓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화수소 확산, 사측 ‘무응답’에 작업중지권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일 오전 금속노조 콘티넨탈오토모티브일렉트로닉스지회장인 조남덕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정직처분 무효확인 소송 등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소송 제기 후 대법원 결론이 날 때까지 무려 6년8개월이 걸렸고, 대법원에서만 5년간 심리했다.

소송의 발단이 된 사건은 2016년 7월26일 세종시 부강산업단지 KOC솔루션공장에서 발생했다. 이날 오전 7시56분과 오전 9시30분께 화학물질인 ‘티오비스’가 약 300리터 누출됐다. 티오비스는 유해화학물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연소시 독성물질인 황화수소로 변질해 호흡곤란이나 구토·오심·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 소방본부는 사고지점에서 반경 500미터~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주민에게 대피방송을 했다. 산업단지 관리사무소장은 6개 공장에 대해 대피를 유도했다.

피해 증상은 즉각 나타났다. KOC솔루션 직원 2명이 오전 9시7분께 오심과 어지럼증으로 병원에 가는 등 다음날 오후 8시까지 산업단지 내 노동자 30명이 치료를 받았다. 이들 중 27명은 통제선 내 공장 직원이었지만, 3명은 콘티넨탈 공장보다 사고지점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공장의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사고지점에서 반경 200미터 이내에 공장이 있던 콘티넨탈 사측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피가 필요하지 않다는 소방본부 답변만 듣고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조씨는 이날 오전 9시께 사고 소식을 듣고 고용노동부에 대책 마련을 요청하면서 지회장 명의로 사측에 신속 조치를 촉구하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오전 10시께 사측과 대책을 논의했고 근로감독관은 대피를 권유했다. 이후 조씨는 사측의 사고현장 방문 제안을 거절하고 소방본부에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질의했다.

개념 좁게 해석한 하급심 “쟁의 악용 우려”

결국 사측의 조치가 없자 조씨는 오전 10시30분께 조합원 28명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뒤에는 회사가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자회견도 열었다. 그러자 사측은 △작업장 무단이탈 △조합원에게 임의로 작업 중지·이탈 지시 △허위사실 유포로 회사 비방 등을 이유로 같은해 11월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조씨는 징계사유가 부적법하다며 2017년 3월 소송을 냈다.

쟁점은 △인근 공장의 화학물질 누출사고로 인한 작업중지권 행사의 정당성 △작업중지권 행사의 징계사유 해당 여부였다. 1·2심은 사측 손을 들어줬다. 콘티넨탈 공장 직원들에게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조씨가 재난지휘통제소를 방문해 객관적으로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상황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거부했다”며 작업중지권 행사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특히 2심은 작업중지권은 노조가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시해 작업중지권의 범위를 좁혔다. 노조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면 일상적인 파업이 생겨 쟁의행위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작업중지권, 노동자 건강 보호 취지”

그러나 대법원에서 반전을 맞았다. 조씨는 2018년 11월 상고했고, 무려 5년간 계류됐다. 조씨측은 “원심이 작업중지권 행사 요건인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을 좁게 해석했고 상황의 위험성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지나치게 넓게 이해했다”며 “노조 활동으로서 작업중지권을 행사했다고 판단한 부분도 심리 미진과 법리 오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작업중지권의 도입 경위와 입법취지를 토대로 원심을 파기했다. 산업안전보건법(52조)은 노동자가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또 사업주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게 해고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산재를 예방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노동자의 생명·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씨 사건에도 이러한 법리가 적용됐다. 대법원은 “황화수소의 분산으로 인한 피해 범위를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웠고, 상당한 거리까지 유해물질이 퍼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로 사고가 난 지 24시간이 지났는데도 피해자들이 다수 발생했고 사고 지점으로부터 200미터 이상 떨어진 공장에서도 피해자들이 발생했던 점에 비춰보면 반경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던 피고 회사 작업장이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노조 대표자’로서 작업중지권 행사도 가능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고는 근로자이자 노조 대표자로서 소방본부 설명과 대피를 권유하는 근로감독관의 발언을 토대로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대피하면서 노조에 소속된 다른 근로자들에게도 대피를 권유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본인만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원심을 지적한 취지로 해석된다.

노동계 “작업중지권 보장 위한 법 개정 나서야”

노동계는 즉각 환영하면서 작업중지권 실질을 보장하기 위한 법 개정에 나설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사측은 (작업중지권 행사를 이유로) 징계나 손해배상을 남발했고 불이익 처우를 하는 사업주에 대한 처벌 규정 도입은 번번이 좌절돼 왔다”며 “정부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발표 전후에도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을 위한 제도개선을 수차례 제기했지만 노동부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위험한 작업에 대한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을 위해 나서겠다”고 밝혔다.

법조계는 당연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조씨를 대리한 이두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이번 판결은 사실상 대법원이 직권으로 판단하는 ‘파기자판’과 다름 없어 보인다”며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과 작업중지권 행사 주체에 대해 합당한 판단이 나왔다”고 진단했다.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도 “작업중지권을 일터의 마지막 보류”라며 “사업주가 위험을 외면한 상황에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늦었지만 대법원이 작업중지권 의미를 되짚어 준 만큼 현장에서 작업중지권이 두텁게 확산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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