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세웅 매일노동뉴스 기자

하나의 유령이 내 머릿속을 배회하고 있다, ‘매일노는뉴스’라는 유령이. 선배는 ‘매일노는뉴스’의 코너 중 하나인 ‘업業세이 추천’ 코너를 내게 맡겼다. 업세이 몇 가지를 예시로 들며, 업세이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어졌는지를 소개하자고 제안했다.

‘조용한 퇴사자’로서 거절해야 했다. 나는 자타공인 조용한 퇴사자다. 이 일을 시킨 선배도 인정했다. 그런데 돈도 안 되고 대체휴가도 안 나오는 이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선배가 시키는데 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직장인 마인드와 “선배들은 평소에 열심히 하니 이런 건 내가 해야 한다”는 부채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글은 네가 잘 쓴다”는 선배의 말 때문인 것 같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기분이란!
<책갈피의 기분>

몇 년 전 읽었던 <책갈피의 기분>(제철소, 2019, 김먼지 펴냄)을 다시 펼쳤다. 살면서 처음으로 접한 ‘업세이’다. 기자가 내게 맞는 직업인지 고민하면서, 출판사 편집자도 직업으로 염두에 두던 때 접했다. 작가와 회사 뒤에서 책을 만들던 편집자가 들려주는 편집자의 이야기에서 업계를 파악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제가 ‘책 만들고 쓰는 일의 피 땀 눈물에 관하여’다. 단어의 강렬함만 놓고 보면 멈칫하겠지만, 귀여운 표지 때문에 그럴 리는 없겠다. ‘먼지’ ‘피 땀 눈물’은 은유일 뿐이다. 언제나 모두의 사이에서 눈치를 살펴야 하는 편집자 노동의 은유일 뿐이다. 작가 앞에서는 리액션을, 사장 앞에서는 끊임없이 노동을, 독자 앞에서는 감정노동을, 마감 앞에서는 마케터·디자이너·인쇄소 사이에서 스케줄을 조율하며 먼지 나도록 털린 끝에 책이 나온다고.

“책 만드는 일은 왜 이리 고될까” “책 좀 사라 이것들아” “이것만 하고 때려치울 거야”와 같은 소제목은 입사 동기가 언제나 하는 투덜거림같아 친근하다. 편집자가 글을 써서 작가가 된 뒤 자신에게 출판을 제안하는 편집자들을 바라보는, 역지사지(?) 경험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작은 에피소드들로 낄낄대다 보면 느껴지는 건 저자의 솔직함이다. 책 사이 책갈피마냥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저자는, 이 글을 쓸 때만큼은 자신의 눈치를 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최초의 독자인 자신으로부터 인정받은 이 책은 독립출판을 넘어 상업출판을 했다.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이 책이 발간된 2019년 이후 업세이는 도서 시장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업을 인정받고자 하는 업세이들이 형성된 것도 이즈음이다.

무력한 세상에서 성실히 분노하는
<미르의 공장 일지>

<미르의 공장 일지>(숨쉬는책공장, 2022)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엘지전자 창원 생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했던 김경민씨의 일지다. 공장에서의 경험에 감정을 한 문단 묻혔다.

첫 잔업의 기억, 갑작스럽게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근무시간, 원청업체의 지시, 동료들과의 대화, 기계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발생하는 노동 환경, 아파도 휴가를 쓰지 못한 경험들에 분노나 슬픔, 짜증을 기록해 놨다. 가끔은 감정만 기록해 놓은 날도 있다. “답답해서 죽겠다! 불법파견 없어졌으면 좋겠다! 개 같은 노동법!” 비아냥도 발견된다. “우린 원청 노예잖아”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가마니가 되어야지. 내일 재계약이나 잘되었으면.”

하나로 꿸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나로 꿸 수 있는 감정은 있다. 분노다. ‘이럴 줄 알았지만 진짜 열 받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CCTV로 근태를 감시하고, 잔업시간을 마음대로 줄이거나 늘리고, 산재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원청은 하청을 감시하는 이 모든 것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 속에서도 꾸준히 분노한다.

무력감이 짓누르는 환경 속 분노는 귀하다. 환경이 바뀌지 않는 걸 알면서도 들어왔으면 불평하지 말라는, 화내지 말고 순응하라는 노예의 마음가짐을 강요하는,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라는, ‘누칼협’이라는 신조어가 쓰이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 그런 환경에서 저자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루치를 분노하고 있다. 대기업 생산공장의 사내하청업체에서는 불법파견 정황이 만연하다는 사실, 비정규 노동자들도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읽힌다.

인간에게 다정하고 제도에게 화내는
<밑바닥에서 :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

<밑바닥에서 :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글항아리, 2021)도 결은 비슷하다. 연대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7년을 일한 김수련 간호사는 자신의 직업이 “보잘것없게 여겨진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가감없는 노동환경이 나온다. 1천700원짜리 가위가 없어 변과 피가 뒤범벅인 쓰레기봉투를 뒤진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환자들의 상태에 피를 뒤집어쓰며 신속·정확하게 대응하는 일화들이 나온다. 간호사에게 본인의 업무를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는 의사, 성추행하는 의사, 간호사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환자, 선배 간호사의 괴롭힘 같은 에피소드들도 등장한다.

다만 <미르의 공장 일지>와 다르게 이 책은 다정하다. 저자는 병원에서의 나날들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렇게 초라해도, 엉망이어도 … 사소하게 불행했고 많은 날이 내 탓으로 구겨지며 너덜너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은 햇살같이 빛났다.” 선배 간호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으면서 후배 간호사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려 최선을 다하고, 환자에게 공감하지 못해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을 괴롭힌 선배와 만난 일화를 이야기할 때조차 마음을 정리한 현자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가 분노하는 지점이 있다. 인력 구조다. 왜 한국은 환자와 간호사의 비율을 적정하게 맞추지 않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간호사들이 OECD 평균 5배나 되는 병상을 감당한다. 간호사 한 명이 담당하는 환자가 한 명 증가하면 환자 사망률은 7% 증가한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여서, 언제나 100%의 주의력을 기울이며 살 수는 없다. 맡은 환자가 많을수록 실수를 할 수밖에 없고, 실수한 간호사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밑바닥’에 저자는 분노한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 하지만 사회에서는 외면받는 문제적 구조를 우리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업세이의 미래 : 인정 투쟁의 에세이

부박한 요즘이다. 인터넷에서는 ‘누칼협’과 함께 ‘알빠노’(내 알 바 아니다)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타인을 이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권력자들은 특정 단체를 때리면서 프레임을 씌운다. 특정한 사회적 기억들을 조성하려 시도한다. 뒤틀린 기억들로 뒤틀린 진실을, 이를 통해 뒤틀린 역사를 만들려는 시도들이다. ‘택배기사 월 1천100만원’ ‘정글도로 경찰 위협’ ‘시민단체, 서울시 보조금 유용’과 같은 뒤틀린 기억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사회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갈수록 업세이는 더 많아지리라 믿는다. 나조차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느껴질 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직업군을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될수록,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업세이를 돌려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그 힘이 부박한 사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될 테다.

독자들이 증명해 주면 좋겠다. 이것도 나름의 업세이고, ‘이런 글’을 잘 쓴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쓴 글이니까, 칭찬도 좀 하고 응원도 좀 해 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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