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9일 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병락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부지회장, 김현제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 직무대행, 이영수 금속노조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장. <정소희 기자>

“2020년부터 계속 개최한 문화제예요. 노숙농성, 1인시위까지 하고 민원도 넣고 대법원장 면담 요청까지 했어요. 자본만 다르고 불법파견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은 사건들을 오래 대법원에서 잡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요. 그런데 경찰이 범죄자 취급하면서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고 입막음을 하네요.”

김경학 금속노조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장은 “제발 문화제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주목해달라”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달 25일부터 경찰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문화제를 강제해산하면서 충돌이 빚어지자 수년간 문화제를 열어온 비정규 노동자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지워지는 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앞 쌓인 비정규직의 목소리들
… 2년·3년·5년째 계류 중인 재판? ‘지연된 정의’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이 지난 9일 오후 대법원 인근에서 개최한 문화제는 17개의 문예팀과 다양한 비정규 노동자의 발언으로 채워졌다. 대법원에 계류된 비정규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임금 소송 등의 판결을 속행하라는 의미로 지난 2020년 3월부터 스무 차례 열렸다. 풍물공연과 시 낭송 등으로 문을 연 문화제는 공연 사이마다 비정규 노동자의 발언으로 채워졌다.

첫 발언자는 박순향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부지부장과 서재유 공공운수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 정책부장이었다.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은 지난 2019년 대법원의 판결로 공사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정규직이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 차액을 보상해달라는 소송은 6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박 부지부장은 “공사 9호봉이지만 월급이 200만원을 넘지 않는데 임금피크제까지 적용하면 월급은 150만원에 그친다”며 “직접고용 됐지만 임금소송이 지연돼 대법원 앞에 왔다”고 말했다.

한국지엠 해고노동자인 이영수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장은 “한국지엠 비정규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소송이 대법원에서 멈춘 지 3년여가 되는데 소송을 처음 제기한 2015년을 기준으로 하면 만 8년을 바라만 보고 있다”며 “한국지엠이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8년간의 소송 기간중 비정규 노동자들은 계속 해고되고 있다”고 말했다.

불법파견과 부당노동행위 등 3개 사건이 대법원에 최장 5년까지 계류 중인 아사히글라스의 비정규 노동자도 말을 보탰다. 차헌호 금속노조 구미지부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장은 “아사히글라스의 부당노동행위 재판은 5년째, 불법파견은 2년째 대법원에 잠들어있다”며 “헌법 27조에 명시된 대로 모든 국민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지켜 달라고 대법원에 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 강제해산, 헌재·대법 판례 모두 어긋나

▲ 9일 오후 9시20분경부터 서울 서초경찰서는 경력을 투입해 해산에 저항하는 문화제 참가자들의 팔과 다리를 들어 이격하는 방식으로 강제해산을 집행했다. <정소희 기자>
▲ 9일 오후 9시20분경부터 서울 서초경찰서는 경력을 투입해 해산에 저항하는 문화제 참가자들의 팔과 다리를 들어 이격하는 방식으로 강제해산을 집행했다. <정소희 기자>

지난달 25일에 이어 지난 9일에도 경찰은 대법원 앞 문화제를 강제해산했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집회에는 엄정 대응하겠다’고 말한 이후 서울 서초경찰서는 수년간 이어져 온 문화제를 갑작스럽게 강제해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해당 문화제는 미신고 집회이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1조에 따라 법원 앞 집회는 금지된다는 이유로 해당 문화제를 해산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조계에 따르면 경찰의 강제해산은 집시법과 헌법재판소, 대법원의 판례에 모두 반하는 조치다.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은 집시법 15조에 따라 문화제가 예술에 관한 집회이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 경찰의 주장대로 해당 문화제가 예술에 관한 집회가 아닌 미신고 집회라서 신고의 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문화제는 대법원 판례와 집시법 20조에 따라 강제해산을 할 만한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시법 11조에는 법관의 독립성을 해치거나 대규모 집회로 확산할 우려가 없다면 법원 앞 100미터 집회를 금지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해당 문화제는 대법원 판결 속행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열리는 집회로 사법행정과 관련된 의사표시를 전달하는 집회이기 때문에 집시법 11조가 적용되기 어렵다. 헌법재판소 판례를 통해 법관의 독립이나 구체적인 재판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만 법원 인근 집회를 금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 출입을 제한, 지나친 소음으로 재판에 지장을 주는 경우에만 집시법 11조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강제해산을 엄격히 금한 대법원 판례는 많다. 대법원은 2012년 미신고 집회에 대해 해산을 명령할 수 있는지 다투는 재판에서 “옥외집회 또는 시위로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된 경우에 한해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종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는 “문화제가 진행된 양상으로 보아 교통이나 통행에 방해했다는 여지도 부족하고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집회·시위를 앞으로 이같이 관리하겠다는 신호탄으로 보여 매우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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