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허리 조심해.” “이건 둘이서도 못 들겠는데?” “와, 이건 진짜 무겁네.” “하나, 둘, 셋, 영차! 몇 킬로(그램이)나 나와?” “80킬로네.”

지난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50대~60대 남성과 여성 7명이 인도와 상가 주변 상·하수도 입구를 덮은 철판과 맨홀 주변을 오갔다. 이들은 서울시설공단 소속 상수도직, 수도검침원이다. 계량기를 확인해 수도 사용량을 기록하고 수도요금 고지서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일을 한다.

수도검침원 7명은 이날 귀중한 연차휴가를 내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유가 뭘까. “우리가 일하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사람들에게 알리려고요.” 모임을 주최한 이광우(55)씨가 말했다. 최근 이씨는 수도검침원 노동실태를 조사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날은 모임 둘째 날이자 현장조사가 이뤄지는 첫날이다. 6년차 수도검침원인 이씨의 담당구역인 홍대입구역 근처가 첫 조사지가 됐다.

“40킬로그램 철판 하루에 수십개 들어요”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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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가 많은 홍대는 검침원 사이에서 검침이 어려운 ‘난이지역’으로 불린다. 상가는 상하수도 수도관을 도로 아래에 매설한다. 수도관 위에 덮인 철판과 맨홀 뚜껑을 열고 어두운 내부로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계량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이들이 들어올린 7개 철판의 평균 무게는 개당 50.4킬로그램. 조병노(54)씨와 이경종(57)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20년 경력을 갖고 있다. 무거운 철판을 드는 요령이 있어 갈고리 하나로도 청소년 몸무게만 한 철판을 번쩍 들어 연다. “우리가 쉽게 드는 것 같죠? 초보자들은 무거워서 철판 여는 데만 15분씩 걸려요.” 앞장서서 철판을 열던 조씨가 말했다.

검침원들은 양손에 갈고리와 PDA를 꼭 쥐고 일한다. 개인 휴대전화와 플래시도 필수다. PDA로는 검침 대상을 확인하고 수도 사용량을 입력한다. 무거운 맨홀 뚜껑을 들기 위해 지렛대 역할을 하는 대형 드라이버나 갈고리를 반드시 휴대한다. 개인 휴대전화는 어두운 수도관을 비추는 플래시와 돋보기 역할을 한다. 이경종씨가 “휴대전화 카메라가 좋아진 덕분에 밑에까지 안 내려가도 계량기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며 “이거 누가 개발했는지 정말 상 줘야 한다”고 너스레를 놓았다. 이경종씨는 서울 중구의 검침원이다. 중구도 ‘난이지역’인 동시에 기피지역이다. 중구는 개발한 지 오래된 곳이 많아 맨홀도 많고 길이 좁다. 계량기를 보기 위해 지하 7층 기계실로 내려가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작업하는 일도 잦다고 한다.

경의선숲길 인근의 한 상가에 다다르자 이광우씨가 “여긴 진짜 각오해야 돼”라며 엄포를 놓았다. 오늘 모임의 마지막 철판이다. 이곳은 평소 그가 가장 힘들어하는 곳.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철판은 언뜻 봐도 앞서 들어 올린 철판보다 두껍고 크다. 서울의 한 주택가를 검침한다는 21년차 수도검침원인 김영애(58)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이런 철판을 하루에 최소 10개, 많으면 수십 개 드는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여자는 혼자 못 하니까 질질 끌거나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해요.” 베테랑 수도검침원에게도 철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성인 남성 4명이 붙어서 겨우 들어 올린 철판의 무게는 80킬로그램. 간이 저울 2개를 양쪽 끝에 매달아 무게를 더했다. “허리랑 발등 조심해”라며 동료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무거운 철판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하거나 철판을 발등에 찧는 부상도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수도검침 업무 3년 만에 허리 통증 시작돼

2018년 8월 서울시설공단에 입사한 이씨는 수도검침원이 된 지 3년쯤 허리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허리가 뻐근했고, 다리가 저렸다. 일하면서 통증에 신경을 쓰기는 어려워 특별한 조치는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7월 건강검진을 하며 허리디스크 협착증을 발견했다. 이후에도 철판을 반복해 드는 일을 하며 걸을 수가 없을 정도의 통증이 시작되자 지난해 11월 허리 시술을 받았고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수도검침원은 한 달에 14일 동안 현장 검침 업무를 하고 나머지 5일은 고지서를 돌린다. 빌라나 다세대 주택은 수도계량기가 외벽이나 건물 내벽에 붙어 있어 선 자세로 검침 업무를 볼 수 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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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난이도 높은 곳은 상가나 아파트다. 상가나 아파트는 계량기와 수도관을 바닥에 매설한다. 계량기를 확인하기 위해 무거운 철판을 들고 허리를 굽혀 상체를 맨홀 구멍 안으로 넣어 계량기를 확인한다. 아파트 외벽은 미관상의 이유로 계량기를 허리보다 낮은 곳에 설치하거나 화단 등지에 매설하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작업은 필수다. 시장이나 상가의 경우 맨홀 위에 물건을 쌓아두면 그 물건을 모두 옮긴 뒤 검침을 하거나 쌓아둔 물건을 피해 상체를 굽혀 계량기를 확인하는 일이 잦다.

이광우씨의 산재 신청을 대리한 신현국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사람과 산재)가 공단에 제출한 이유서에 따르면 이씨의 작업은 △중량물 취급 △무릎 꿇은 자세 △쪼그린 자세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는 자세 △허리 앞으로 굽히기 △허리 비틀기와 꺾기를 반복했다.

서울시설공단에 입사하기 전 5년7개월간 용접공으로 일했던 이씨는 용접을 할 때는 허리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수도검침원이 되면서 허리에 통증이 생겨 산재를 신청하게 됐다. 하지만 주변 동료들은 모두 허리 통증과 관련한 산재가 불승인됐다고 말하거나 산재를 신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씨도 수많은 고민과 검색 끝에 한 줄기 희망으로 산재를 신청했다.

하루 평균 2만5천보, 쉴 시간도 공간도 없다

수도검침 일을 하다 보면 철판, 맨홀 뚜껑 같은 중량물을 반복해 들고 허리를 굽히거나 숙이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고지서 송달 업무도 만만치 않다. 하루는 고지서를 접고 나머지 4일은 고지서를 집집마다 배달한다. 하루치 배달량인 600개 이상의 고지서를 나르기 위해서는 일반 배낭으로는 부족해 커다란 등산 배낭을 메고 다닌다. 배낭은 10~15킬로그램의 무게다. 이씨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검침과 송달업무를 하기 위해 하루 평균 6킬로미터를 2만5천보 정도 걷는다.

이렇게 온종일 걷고, 서고, 허리를 굽히는 일을 반복하지만 쉴 곳은 없다. 월별로 검침하는 수도 계량기는 14일 동안 2천500여개. 하루 평균 150개에서 200개 가까운 수도계량기를 살피느라 쉴 시간과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김형렬 가톨릭대 교수(직업환경의학)는 “허리에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작업은 중량물을 취급하는 작업”이라며 “50킬로그램에 달하는 철판을 혼자 든다면 허리에 매우 큰 부담이 가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철판을 잡아당기다 보면 허리뿐 아니라 어깨와 팔에도 무리가 갔을 것”이라며 “작업량이 매우 많아 허리 질병과 업무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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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지난해 11월 디스크 시술과 더불어 업무상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했다. 1년에 60일까지 인정되는 병가를 붙여 써 100일 정도 쉰 뒤 업무에 복귀했다. 지난 2월 서울북부질병판정위원회는 이씨에게 발생한 허리디스크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씨가 수도계량기를 검침하는 과정에서 허리를 90도 정도 굽히거나, 하루에 3~4회 무거운 철판이나 맨홀을 혼자 힘으로 들어 올리거나 수도고지서를 넣은 가방을 짊어지고 한 달에 5일정도 송달 업무를 수행하는 등의 요추부 부담 작업이 확인돼 추간판 탈출증(디스크)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업무에 복귀한 이씨는 여전히 동교동과 망원동, 홍대입구역 일대를 돌며 무거운 철판을 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3년마다 하는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조사에도 체감할 만한 노동환경의 개선은 없다. 그가 수도검침원 노동 실태조사 모임을 만든 이유다. 동료들이 허리 통증을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들고 싶어서다.

“돌파구를 만들고 싶어요.” 이씨의 다짐은 서울시설공단 수도검침 업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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