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가 위치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건물.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가 근로복지공단의 ‘최초 처분’과 무관한 이유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현행법률상 공단 처분 사유만 다뤄야 하는데 이를 위반한 것이다. 법원은 위법한 ‘결정(재결)’으로 보고 재해자 승소로 판결했다. 산재재심사위의 재결 자체가 취소된 첫 사례다. 산재재심사위는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가 인정받지 못한 사건을 재심사하는 특별행정심판기관이다.

공단 ‘소멸시효 경과’ 요양 불승인

1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유환우 부장판사)는 폐암에 걸린 노동자 A(사망 당시 80세)씨가 산재재심사위를 상대로 낸 재결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산재재심사위가 항소하지 않아 지난 2월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사건은 A씨가 2007년 진단받은 폐암이 2014년 재발하면서 시작됐다. A씨는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벽돌·토관·담장 제작 업무를 했다. 2006년부터는 골프장에서 잔디 관리를 하며 농약을 살포하는 업무를 했다. 이때부터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다 폐암을 진단받았다.

A씨는 2019년 7월 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약 22년간 일하며 결정형 유리규산 등 발암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상 질병을 인정했다. 그러나 공단은 ‘시효’가 지나 청구권이 소멸했다며 요양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공단 자문의사회의는 2007년 5월~2012년 5월을 ‘1차’ 요양기간으로, 2014년 4월~2019년 4월을 ‘2차’ 요양기간으로 구분했다. 이와 관련해 공단은 ‘1차’가 최초 요양기간이라며 2019년 7월에는 요양급여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은 요양급여 소멸시효를 3년으로 정하고 있다. A씨가 7년이 지나 청구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A씨는 다시 공단을 찾았다. 2차 기간을 ‘최초 요양’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단은 “(2차 기간은) 폐암이 재발해 재요양한 기간”이라며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재차 판정했다. A씨가 계속 요양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므로 요양급여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취지다.

산재재심사위 ‘인과관계’ 부정 기각

산재재심사위도 지난해 1월 A씨의 재심사 청구를 기각했다. 그런데 재결 처분사유가 공단 ‘원처분’과 달랐다. 산재재심사위는 공단과 달리 2014년 발병한 폐암은 ‘최초 요양’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폐암과 업무는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공단 ‘원처분’ 사유와 전혀 다른 이유로 청구를 기각한 셈이다. A씨는 재심사 도중인 2021년 10월 숨을 거뒀다.

그러자 A씨 아내는 재결에 ‘고유한 위법’이 있다며 지난해 5월 소송을 냈다. 유족측은 “재결 처분 사유는 원처분의 사유와 방어권 행사의 대상과 방법이 서로 다른 별개 사유”라고 주장했다. 반면 산재재심사위는 공단이 상대방이라며 소송이 성립할 수 없다고 맞섰다.

법원은 재결 효력을 다툴 법률상 이익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결 자체의 고유한 위법에 한해 소송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정한 행정소송법(19조)이 근거가 됐다. 그러면서 산재재심사위의 처분은 원처분 사유와 사실관계가 달라 직권 범위를 넘은 위법한 변경이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산재보험법상 재결 절차는 근로복지공단이 스스로 심사해 처분의 적법성과 합목적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공단 내부의 시정절차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원처분의 처분 사유를 추가 또는 변경하는 것은 원처분의 근거로 삼은 사유와 기본적 사실관계의 동일성이 인정되는 한도 내로 제한된다”고 해석했다. ‘소멸시효 완성 여부’가 아닌 ‘상당인과관계 여부’를 산재재심사위에서 판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법원 “사유 변경, 동일성 인정 한도 내 제한”

산재재심사위는 직업환경연구원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폐암이 업무와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원처분 당시에 역학조사 결과가 존재했고, 고인이 이를 알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는 변경한 처분 사유가 원처분 사유와 동일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고인은 원처분 판단과 반대로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유로 요양신청이 불승인될 수 있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산재재심사위 위원들이 재심 절차에서 상당인과관계와 관련해 의견진술 기회를 주는 등 방어권을 보장하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법조계는 산재재심사위가 직권심리의 범위를 넘어 처분 사유를 변경한 부분에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유족을 대리한 김찬영 변호사(법무법인 사람&스마트 서울분사무소 대표)는 “산재재심사위 같은 행정심판기관은 판단 범위를 면밀하게 살펴 결정해야 하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 범위를 벗어났다”며 “법원도 소 제기 당시 ‘산재재심사위가 상대방이 맞는지’ 문의할 정도로 재결 자체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비판했다. 이어 “산재재심사위가 다시 심리회의를 열어 재결을 취소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당사자가 공단 원처분 사유와 재결 사유를 구분하기 힘든 만큼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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