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용노동부 주최로 26일 오후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 현황 및 과제 토론회에서 권기섭 노동부 차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수사 장기화’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의 작동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검찰이 유·무죄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현장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작동할 수 있는데, 검찰이 계속 사건을 붙잡고 근로감독관에 경영책임자의 고의성을 증명하라며 보완 수사를 지휘하면서 법률의 작동가능성을 낮추고 있다는 비판이다.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을 맞아 고용노동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의 유·무죄 인정 기준은 판례를 통해 확립된다”며 “검찰이 사건을 계속 붙잡고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소해 법원의 판례 축적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유죄의 인정요건을 설명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지금은 속히 판결이 선고될 수 있도록 수사역량을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29건 수사, 기소는 11건 처벌은 0건

26일 오후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는 시행 1년을 맞은 중대재해처벌법의 개선과제를 찾기 위해 마련됐다. 전형배 교수와 강검윤 노동부 중대산업재해감독과장, 김성룡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임우택 한국경총 안전보건본부장 △서정헌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 △김동하 코카콜라 안전보건경영파트 리더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지난해 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모두 644명이다. 이 중 48명은 법 시행일(2022년 1월27일) 이전에 사망했다. 노동부는 229건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대상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해 52건을 처리했다. 사건처리율은 22.7%로 177건은 여전히 수사 중이다. 검찰로 사건이 넘어간 것은 모두 34건인데 기소는 11건에 불과하다.

전형배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수사 진척 속도가 느려 처벌받은 경영책임자가 0명이라는 점”이라며 “법의 취지는 사장이 재원과 인력을 투자해 사업장을 안전하게 만들라는 것인데 현재 1호 사건은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대표이사 기소 여부도 불투명해 오히려 현장에 기존 스텝(안전보건관리 수준)을 유지하면서 눈치만 보게 만들고 있어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수사가 길어지는 이유는 산업재해치사상죄의 범죄성립요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중대재해가 발생했다고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 수사관들은 중대재해와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 불이행 간의 인과성을 입증해야 한다. 김성룡 교수는 “산업재해최사상죄는 부작위범이나 단순한 의무위반범이 아닌데다 상해·살인사건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며 “무엇보다 광범위한 정황증거·간접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사업(장)마다 고유한 위험요인과 안전보건체계 확립에 필요한 구체적 의무, 동종 업종과 비교했을 때 이행 노력의 정도 등을 판단해야 하는 등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범죄수사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현장 감독해야 할 근로감독관, 수사 장기화로 과부하”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범죄수사 영역에 투입되는 근로감독관의 역량과 인력은 충분한지도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전형배 교수는 “현장에서 안전보건 감독을 해야 할 근로감독관이 조사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며 “감독 인력이 중대재해 사건 장기 수사에 매몰되면 현장 감독이 소홀해지고 사망사고를 예방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지나치게 많은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는 현행 수사지휘 방식을 재고해 적정 수사와 신속 기소로 방향을 전환하는 한편, 사건 수사를 노동부가 아닌 경찰에 넘기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영국은 산업안전보건법 수사는 근로감독관이 하지만 기업중과실치사법 수사는 경찰이 맡고 있다.

김성룡 교수는 “수사의 성공 여부는 근로감독관과 검찰의 유기적 협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24시간 대기조’로 불리는 대형 로펌이 공개적으로 압수수색을 피하는 법이나 진술을 거부하는 법 등을 경영책임자에 교육하고 혐의부인과 증거인멸 시도 등을 하고 있어 강제수사 빈도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수사 기간은 장기화될 것이라는 진단에서다.

권기섭 노동부 차관은 토론회 인사말에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인력보강이나 예산 투자보다 경영책임자 처벌을 피하기 위한 법률 컨설팅 수요가 확대되고, 의무이행을 위한 광범위한 서류작업에 치중하고 있다”며 “2024년부터 50명 미만 기업으로 법 적용이 확대되는 점을 고려할 때 법 이행 및 집행과정에서 나타난 한계와 문제점의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 개선 TF를 구성하고 법 전반에 대한 개정 방향을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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