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밝은 해도/ 캄캄한 밤을/ 하얗게 지새야/ 새벽을 맞이하나니/ 벗이여/ 오늘도 질척이는 벗이여.”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학림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계단 왼쪽 벽에 걸린 글이 눈에 띈다. ‘지나던 이 씀’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백기완 선생이 쓴 글이란다.

백기완 선생이 50년대부터 찾은 학림다방에는 이른바 그의 고정석이 있다. 1989년 통일문제연구소가 근처로 오면서는 학림다방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백 선생께 다방측은 아늑한 안쪽 창가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줬다고 한다.

<매일노동뉴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단병호(73·사진)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상임자문위원을 만났다. 그는 전노협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백 선생이 항상 앉았다는 그 자리에서 기자를 맞았다.

백기완 선생 1주기를 맞아 올해 2월 출범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백기완 선생이 꿈꾸던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했다.

16살 차이 백기완과 단병호의 인연
“분단체제하 노동자 삶의 질곡 알려 줘”

- 근황을 소개해 달라.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교육원은 올해로 11주년을 맞았다. 원래 노동교육이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교육기관이 예전에는 활발했으나 지금은 문 닫은 곳이 많다. 우리 교육원은 뜻 모아 함께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히 11주년을 지났다.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나아갈지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상임자문위원을 맡았다. 백기완 선생과 어떤 인연이 있나.
“백기완 선생과는 상당히 긴 인연이 있다. 내가 노동운동을 시작할 무렵인 1988년부터 백 선생과 인연이 쭉 이어졌다. 그냥 알고 지낸 게 아닌 운동을 하는 데 상당히 팀워크가 많이 됐던 분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격려하고 조언해 주셨다. 개인적으로는 백 선생께 과분할 정도의 배려를 받은 관계다. 재단을 만들 때 당연히 참여할 일이라고 여겼다.”

백기완노나메기재단에는 노동·민중·문화·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고문·상임자문위원·자문위원·공동후원회장 등으로 합류했다. 재단은 정치인들은 거의 배제하고 백기완 선생과 정체성이 가까운 분들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시민 누구나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백기완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6월부터 통일문제연구소 건물을 ‘백기완 기념관’으로 전환하는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내년 2주기 즈음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어디서부터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렵지만 아마도 ‘길거리’가 가장 많은 인연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1988년 울산중공업 식칼테러 등이 발생했을 때 울산서 열린 규탄집회에 가는 버스, 요새 말하면 희망버스인데, 백 선생과 같은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들은 이야기가 감명 깊었다. 그걸 계기로 더 자주 찾아뵙게 됐다.”

1933년생인 백기완 선생과 1949년생인 단병호 상임자문위원은 16살 차이다.

“백 선생은 개인적으로 복잡한 관계죠. 좋은 벗이기도 하고 친근한 동지이기도 하고 투쟁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스승이기도 하지요.”

“백기완이야말로 민중운동사 그 자체”
“숨 거두는 순간까지 노동자와 함께해”

- 어떤 이야기가 감명 깊었나.
“분단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우리 사회 질곡을 가져온 분단, 미제국주의하에서 국가의 자주성·독립성이 없는 문제의식, 그곳에서 빚어진 노동자·민중 삶의 고통. 주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운동을 늦게 시작해서 그런 깊은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을 때다. 나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었다.”

- 백기완 선생은 평생을 노동해방과 통일을 위해 투쟁했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으로 노나메기 사상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런 노나메기 세상은 요원해 보인다. 지금 왜 백기완과 백기완노나메기재단, 백기완 기념관을 주목해야 하는가.
“백기완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해방을 경험하고 한국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다. 이후 유신과 군사독재 과정을 겪으면서 처절히 투쟁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완성을 위해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 돼야 한다며 그 투쟁과정에서 치열하게 함께했던 분이다. 백기완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이고 민중운동사 그 자체다. 그 점에서 노동자들이 백기완에게 새로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재야의 어른들이 있었지만 백기완은 끝까지 올곧게 권력과 기득권층과 결탁하지 않고, 선생이 바라는 사회와 세상을 위해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분이다. 그는 단순한 실천가로서만 아니라 사상적 측면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 노나메기 사상을 말하나.
“사상적으로 체계를 갖췄냐는 별개 문제이고, 우리가 지향하는 사상이란 측면에서 상당히 많은 생각을 내놓은 분이다. 백기완 선생의 노나메기 사상과 노동자가 지향하는 평등한 삶과는 맥이 일치한다. 우리 노동자들이 백 선생에게 깊은 관심과 살아온 삶의 궤적을 더듬고 찾으면서 우리 몸으로 체화하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별히 노동자가 주목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자본주의 극복 노나메기 사상 담을 기념관”
“운동의 매개가 될 백기완 기념관”

- 백기완 선생은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힘내라’일 정도로 가장 힘없는 노동자들이 내몰리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고, 당신의 몸이 허락하는 한 노구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노동자에게 백기완은 어떤 의미인가.
“백 선생이 걸어온 궤적과 행동 하나하나가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자는 왜 백 선생을 보고 투쟁 의지를 다지고 자기 책임감을 가지게 됐을까. 백 선생은 말로만 노동자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다. 그는 임금노동자로 단 한 순간도 살아 본 적은 없지만 뼛속까지 노동자였다. 그분은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아무리 힘들어도 다녔고, 오라는 데는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노동자의 힘겹고 고통스런 자리에서 같이 고통을 나눴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고 김용균의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어야 하고, 김진숙 동지가 복직돼야 한다고 할 정도로 노동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버린 적이 없다. 그렇게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이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 백기완 선생은 평생을 북쪽 고향을 그리워하고 분단체제를 종식하기를 바랐다. 윤석열 정부 들어 선생의 바람은 더 멀어지고 있다. 재단 활동에는 남북평화 교류와 협력 등 연대사업이 있다. 지금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백 선생이 실천적으로는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활동했던 분야가 노동자·민중의 투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온 게 분단 극복을 통한 노나메기 세상이다. 그런 백 선생 염원에 비춰볼 때 현실은 답답하다. 윤석열 정부 들어 그야말로 강대강으로 치닫고 있다. 분단 극복과 통일 문제가 요원한 게 아닌가. 또다시 아픈 역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극과극으로 치닫는 문제를 스스로 힘 모아 극복하는 의지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게 백 선생이 말한 분단과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다.”

- 왜 백기완노나메기재단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일단 ‘특별’이란 말은 안 썼으면 한다. 특별은 그 자체가 차별을 내포한다. ‘마땅히’라는 말을 쓰고 싶다. 백 선생께서는 해방된 세상, 분단 극복의 세상을 위해 처절히 살아왔다. 민중적인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민중으로서 삶의 책임과 의무, 권리를 다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보편적인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 특별한 게 아니라 마땅히란 의미에서 백 선생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삶을 찾아보고 우리가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가야 하는 의미가 있다. 노나메기 사상은 지향하는 가치가 분명하다. 그런 점을 재단과 기념관이 좀 더 풍부히 하고 확산·발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기념관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백 선생을 알고 넓게 이해하고 백 선생이 저항한 투쟁의 정신을 더 자기의 삶으로 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기념관을 건립하고 재단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줬으면 한다.”

재단은 이런 백 선생의 사상과 삶의 궤적을 기념관을 통해 노동자와 일반 시민 모두에게 보여주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재단은 2층 건물로, 1층은 기념관, 2층은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꾸민다. 1층에는 백기완 선생이 머물렀던 방이 원형으로 보존된다. 책상과 펜, 원고지, 안경이 그대로 놓여져 백 선생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1층 나머지 공간은 백 선생 연보와 어록, 근현대사 사진, 영상을 배치해 노나메기 사상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이곳이 민주화·민중운동의 거점이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2층 다목적 공간은 청년 강좌나 특강 등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난다. 건물 바깥은 대문 흔적만 남기고 담벼락을 없앤 뒤 계단을 두면서 골목길 기념관 앞을 오가는 청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계단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자연스레 기념관에 들어와 둘러볼 수 있게 접근성을 높일 계획이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오로지 노동자·시민 참여로 공사비 마련”
“1989년 이어 백기완 기념관 벽돌쌓기 동참 바라”

기념관을 만드는 데는 상당히 큰 비용이 든다. 백 선생의 발자취와 기록을 모을 아카이브도 구축할 계획인데 역시 만만치 않은 시간과 비용이 예상된다. 재단은 통일문제연구소 때처럼 오로지 노동자와 민중, 시민의 힘으로 공사비 등 비용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업이나 기관의 후원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1988년 국외 동포들의 초청강연비를 종잣돈으로 삼고 1989년 노동자·민중이 한 푼 두 푼 모금한 ‘통일한마당집 한돌쌓기’ 운동으로 통일문제연구소 건물을 매입된 바 있다. 군부독재 시절 이름을 공개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최소한 1만2천명이 참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벽돌 1개당 500원이었는데 벽돌 30만개까지 쌓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얼마나 비용이 들까. 재단은 공사비 마련을 위해 개인이나 단체가 참여하는 1계좌 100만원의 특별모금을 하고 있다. 500개 계좌로 5억원을 모은다는 계획이다. 특별모금에 동참하면 백기완 기념관 벽면에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보존한다. 재단 공동후원회장과 상임자문위원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금속노조·금융노조·공공운수노조 등을 찾아 재단과 기념관 사업 취지를 설명하며 적극적인 동참을 요청하고 있다. 아카이브도 CMS 정기후원회원 동참 등을 통해 비용을 마련한다.

- 기념관이 보여주는 백기완 선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백기완 선생 본인은 위인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분이다. 노동자·민중의 실천 투쟁가로 기억되길 원하셨다고 생각한다. 기념관이 해야 할 역할이 그것이다. 생전에 살아온 삶 그대로 체현하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공감하고 같은 길을 고민하는 기념관과 재단이 돼야 한다. 그것이 백 선생의 유지일 것이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인 2010년에도 우리 운동의 실천적 매개가 되는 그런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비정규 노동자가 상경해 오갈 데 없어 거리에서 노숙하지 않고 몸 누일 장소가 됐으면, 노동자·민중 문화가 더 넓게 확산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른 재단이나 기념관과는 다른 것이다.”

- 1989년처럼 이번에도 백기완 기념관 건립에 노동자 참여가 중요해 보인다.

“이 사업이 좀 더 힘을 받고 제대로 된 사업으로 가려면 노동자들이 이 사업의 주체가 됐으면 한다. 뜻있는 노동자, 개별 단위노조가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고, 민주노총과 각 산별이 조직적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 일시적으로 한 번에 하는 것도 좋지만 정기 단체회원에 산하 조직까지 다 같이 참여하도록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 기념관을 만든 뒤에는 더 중요하다. 어떤 사업을 하면서 백기완 정신을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 재단과 기념관이 상시적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구조와 조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다수 참여해야 재단과 기념관 사업도 운영도 충실히 발전할 수 있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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