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난 병석에서 죽어 가면서도 혼자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

큰 수술을 마치고 요양하던 백남기 통일문제연구소장은 2018년 12월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같은해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평생 민주화운동에 매달렸던 그는 생사의 갈림길을 여러 차례 넘겼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80킬로그램의 몸무게가 38킬로그램으로 떨어지도록 고문을 당할 때도 그랬다. 열세 살에 떠난 황해도 은율군 고향을 한번 가 보고 죽겠다는 각오로 견뎠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백 소장은 80년 당시가 떠올랐다고 했다.

“요만한 개미 새끼도 먹을 걸 찾으러 나왔다가 날이 저물면, 막 집을 찾아가. 나는 개미 새끼도 아니고 사람인데도 … 그런데 못 가잖아.”

그는 분단에 의존하는 세력이 권력을 가진 문제, 사회 양극화로 민중이 분열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휴전선 ‘맘판’ 설치를 제안했다. 맘판은 ‘굿판의 맨마루(절정)’라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이라는 의미를 가진 우리말이다. 인터뷰에서 백 소장은 “휴전선을 맘판으로 만들고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화롭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얘기다.

통일운동가였던 백 소장은 변혁운동가이기도 했다. 2014년 12월 박성국 당시 매일노동뉴스 대표와 대담에서 그는 “자본은 비정규직을 통해 돈벌이하는 거고,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변혁의 문제지 어느 한 사업장의 안타까운 싸움이 아니다”며 “<매일노동뉴스>는 노동자들의 착취·희생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끊임없이 폭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독재 정치권력과 착취구조인 독점자본주의를 끝장내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답했다. 백 소장은 운동권의 어느 한 정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재야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민주노총 내부 싸움을 그는 무척 싫어했다.

이즈음 백 소장은 씨앤앰 하청노동자·쌍용차 해고자·스타케미칼 해고자·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을 찾아 서울 중구에서 경기도 평택·경북 구미·부산 영도까지 하루가 멀다고 쉼 없이 전국을 다녔다. 고문 후유증 상처를 앓는 그에게 쉽지 않은 일정이었을 테다. 건강을 염려하는 질문에 백 소장은 “한마디로 죽기 아니면 살기지. 건강이 뭐 따로 있어. 노동자들이 그렇게 살고 있잖아.”라고 받아넘겼다.

그의 마지막은 그의 일생과 같았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5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기완 선생님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36년 전 해고당한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촉구하는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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