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편집 김효정 기자
▲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편집 김효정 기자

문 닫힌 남녀공용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 인기척을 살핀다. 문을 잠근 뒤 볼일을 보는 중에도 누군가 들어오지 않는지 귀를 쫑긋 세운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느껴 봤음직한 보이지 않는 공포다. 일상적 공포는 일터에서도 이어진다. 방문점검 노동자는 고객 집 문 앞에서, 응급실 간호사는 환자 처치를 위해 커튼을 닫으며 행여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긴장한다. 보이지 않지만 위험은 실재하고, 사고는 일어난다. 공포를 말해도 ‘보이지 않는다’며 눈감은 이들도 사고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동자가 겪는 성폭력은 구조적 문제가 켜켜이 쌓여 터진 지극히 공적인 일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 직장내 성폭력 문제를 풀 열쇠는 거기서 시작한다.

지난달 14일 서울교통공사 역무원이 스토킹하던 입사 동기에게 죽임을 당한 신당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흘렀다. 16일 <매일노동뉴스>가 일터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안전 문제를 취재했다.

닫힌 공간, 공포에 눈감는 사회

24시간 운영되며, 분초를 다퉈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공간이 있다. 응급실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곳에서도 성폭력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17년차 간호사 정혜수(39·가명)씨는 “주사를 놓을 때 커튼을 치는 경우가 많다”며 “근육주사는 보통 엉덩이에 놓게 되는데 바지를 내려 달라고 했을 때 성기 쪽을 노출하며 ‘만져 달라’고 하는 환자도 있었고, 여자 속옷을 입고 보란 듯이 바지를 내리고 주사를 놓아 달라며 웃는 사람도 있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환자의 프라이버시, 안정을 위해 닫은 커튼 안 폐쇄된 공간은 성별 위계에 따라 남성 환자에게 힘을, ‘여성’ 간호사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준다.

커튼 밖도 안전하진 않다. 환자의 수액량을 조절하려 잠시 뒤로 돌아서는 짧은 순간에도 성추행은 일어난다고 한다. 정씨는 엉덩이를 만지거나 실수인 척 팔꿈치로 터치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의료진의 보호를 받는 ‘환자’인 탓에, 의도를 가지고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워 웬만해선 ‘불쾌한 일’로 치부하고 넘긴다.

정씨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3월 보건의료노조가 조합원 4만3천58명을 대상으로 ‘2021년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를 했는데 여성 보건의료 노동자 63.9%가 최근 1년간 폭언·폭행·성폭력을 겪었다고 답했다. 남성은 37.4%였다. 신체적 성폭력 경험도 여성은 5.3%가 “있다”고 응답한 반면 남성은 2.3%였다.

낯선 공간에 들어가야만 일할 수 있는 방문점검 노동자도 상시적 성폭력 위험에 놓인다. LG전자 가전제품을 방문해 점검하는 노동자이자 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지회장인 김정원씨는 “점검 중 남성이 상의를 입지 않고 삼각팬티만 입고 돌아다니거나 뒤에 와 스킨십을 하는 경우도 있다”며 “잠깐 앉아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서 성에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남성도 있다”고 증언했다.

김 지회장은 “지회로 상담은 계속 들어오는데, 공개적으로 취합은 잘 안 된다”고 전했다. 가해자는 방문점검 노동자의 서비스 만족도를 평가하는 고객인 데다, 노동자가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할 때 사업주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폐쇄된 공간 속 남과 여, 서비스 제공자와 고객이란 상황이 만들어 낸 구조적 폭력이다. 이런 구조가 무시되면서 여성노동자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공포는 간과되고 여성노동자는 위험에 노출된다.

여성노동자 ‘동료’는 지워지고 ‘성별’만 남았다

폐쇄적 공간, 신원이 불확실한 불특정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업무 특성이 제거되면 여성노동자는 안전할까.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계속되는 한 안전한 일터는 먼 얘기다.

2018년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도 팀장이 여성 부하 직원을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여성으로 보면서 발생했다. 공공운수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에 따르면 팀장급 직원 ㄱ씨는 2018년 부하 여성 직원 두 명의 외모를 두고 “A씨는 ***해서 성관계시 ****하다. B씨는 ***해서 더 낫다”와 같은 성희롱 발언을 남성 직원들에게 했고, 자신의 말에 공감과 동의를 강요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긴 동료가 피해 여성 직원에게 사실을 전하자, 충격을 받은 여성 직원들은 사표를 제출했다. 지부는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고 여성 직원들은 가해자가 없는 근무지로 배치됐다.

피해 여성노동자들은 생계수단인 일터를 그만둘 결심을 할 만큼의 수치심·모욕감을 느꼈지만 코레일네트웍스가 취한 조치는 가해자인 ㄱ팀장의 직급을 강등한 것뿐이었다. 이후 실무자로 일하던 ㄱ씨는 7개월 만에 다시 팀장 자리로 복귀했다.

일터 화장실과 탈의실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지난 8월11일 여직원 탈의실에서 USB형 소형카메라가 발견됐다. 불법촬영 가해자는 일하며 종종 마주치던 남성 청소노동자였다. 이후 회사 게시판에는 여자 화장실과 탈의실의 미화 담당자를 여성노동자로 배치해 달라는 요구가 나왔지만, 병원측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7조에 따라 미화사원 채용시에는 성별을 지정해 채용이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답했다. 병원의 황당한 답변은 현장노동자를 분개하게 했다.

분당서울대병원쪽은 “이번 사건 후 가해자는 인사위원회에 회부돼 9월15일 해고됐다”며 “자체적으로 수시로 점검하기 위해 탐지 장비를 사들였고 사건이 발생한 여자 탈의실은 여성 미화원이 담당하도록 사건 직후 바뀌었다”고 밝혔다.

▲ 자료사진 신훈 기자
▲ 자료사진 신훈 기자

“사실이면 왜 진작에 신고하지 않았어?”

직장내 성폭력을 경험한 피해자가 용기를 내 문제제기하면 2차 피해가 닥쳐온다. ‘구조적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온 여성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미룬다. 성폭력을 고발했더니 “왜 이제야 말하냐”며 의도를 의심하는, 2차 가해의 빌미가 되는 사건 발생일과 공론화 시점의 ‘공백’은 여기서 비롯된다.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조는 2020년 11월 샤넬 국내법인 샤넬코리아 고위 간부 ㄴ씨가 10여년에 걸쳐 10여명의 여성 직원을 성추행한 사실을 공론화했다. 여성 직원과 악수할 때 손깍지를 끼거나, 포옹을 하는 것은 물론 비뚤어진 명찰을 바로잡는 척하며 가슴을 만지는 식이었다. 회사는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 편을 들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계속했다. 노조 샤넬코리아지부쪽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회사가 ㄴ씨에게 어떤 징계를, 얼마큼 내렸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지난 12일 형사 공판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가해자는 아직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응급실 간호사 정혜수씨도 의사의 성희롱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2차 피해를 입었다. 그는 “성기에 통증을 느껴 응급실을 찾은 환자에 대해 ‘내가 해 줄 것은 없고 간호사가 저 사람 좀 위로해서 보내면 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며 “당시 일이 (병원) 원장한테까지 보고됐고 해당 의사는 퇴사했지만 저는 ‘트러블 메이커’라는 꼬리표가 붙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씨가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대목은 ‘그 의사 내가 겪어 보니 괜찮던데 왜 그렇게까지 해서 분위기를 흐리냐. 그냥 농담으로 한 건데’와 같이 가해자를 두둔한 동료들의 말이었다고 한다. 피해 여성보다 가해 남성에 더 크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는 힘퍼시(Himpathy·him+simpathy)의 전형이다.

이런 2차 피해를 경험한 여성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더 강렬히 투쟁하거나, 더욱 더 움츠러들거나….

“조직이 책임·잘못 인정 않으면,
2차 피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어”

대한항공 직원 장유정(가명)씨는 강렬히 투쟁하기로 결심한 이다. 그는 2019년 12월 직속상사의 강간미수 사건을 회사에 알렸다.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차 피해를 우려해 신고를 주저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직장내 괴롭힘과 부당인사가 계속됐기 때문에 더는 참기 어려웠다.

직후 회사는 가해자 ㄷ씨를 사직처리했다. 장씨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문이 나는 것을 우려해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정작 피해자는 회사의 보호를 받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며 “자신들 편의를 위해 조용히 처리한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그는 회사와 법적 다툼 중이다. 사업주가 역할을 다하지 못해 사무집행 중 불법행위(강간미수)가 발생했으니 회사가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취지다. 남녀고용평등법 14조5항에 따르면 직장내 성희롱 발생시 사업주가 지체 없이 가해자를 징계하고, 근무장소 변경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월 장씨의 주장을 일부 인용했다. “대한항공이 가해자의 사용자로서 그 사무집행에 관해 발생한 강간미수의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가 입은 정신적 손해를 가해자와 연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를 징계하지 않고 사직 처리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한항공과 피해자는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유정씨는 사건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일상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2년반 정도 쉬었고, 지난 8월 복직했다”며 “그냥 직장에 들어가 일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게 꿈인데 그런(성폭력과 직장내 괴롭힘) 문제제기를 했다고 해서 닥쳐오는 상황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 지었다.

골리앗 같은 회사와 싸우는 장씨가 느낀 것은 명확하다.

“조직이 입장을 정하면 조직원은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회사 대표가 가해자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조직원들은 피해자에게 잘하려 하겠지만 회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향하는 2차 가해를 방임하는 거예요.”

‘여성 임원 100명 중 5명’이 의미하는 것

가야 할 길은 멀다. 상장법인 2천246개사 임원 중 여성은 5.2%(2021, 여성가족부)뿐이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직장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여성노동자가 말하는 고통과 공포에 공감하지 않고, 축소시키는 배경에 구조적 성차별이 있다는 뜻이다.

LG케어솔루션지회는 최근 방문점검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조로는 최초로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지회는 성범죄 이력이 있는 고객 집에 여성 방문점검 노동자가 찾는 일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회사가 취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고객의 개인정보와 계약상 문제가 있다며 수용하지 않았다. 다만 고객이 법무부의 ‘성범죄자 알림e’에 등록된 경우 방문점검 노동자가 해당 집 방문을 거부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여성노동자가 자신을 지키려면 작업 전 일일이 고객이 성범죄자 알림e에 등록된 성범죄자가 아닌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김정원씨는 “사측 교섭위원이 전부 다 남성이어서 이런 요구에 대한 절실함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며 “매니저들의 어려움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니까 그게 제일 갭(차이)이 컸다”고 회고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회사가 가해자를 솜방망이 처벌하는 사례도 계속되고 있다. 서재유 공공운수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 수석부지부장은 “최근에도 상사가 부하 여성 직원의 속옷 라인을 터치하는 식의 성추행을 한 사건이 있었다”며 “피해 직원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해 참고 지냈고, 보다 못한 동료 직원이 상부에 알려 분리조치로 사건이 무마됐다”고 전했다. 또 업무 중 역무실 공용PC로 성인사이트를 접속한 남성노동자 두 명에 대해 문제제기가 됐지만 코레일네트웍스는 지난 6월 감사 후 견책 처분만 내렸다. 역무실에서 여성노동자와 함께 근무하는 이들이었다. 서 지부장은 “함께 일하는 여성노동자가 입을 피해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코레일네트웍스 감사실 관계자는 “당시 근무한 직원을 만났지만 (다른 사람의) 제보가 있기 전까지 몰랐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 자체 규정에 따라 적절히 조치했다”고 밝혔다.

“서울교통공사도 공범이다”

업무 공간에서 발생하는 성적 괴롭힘과 폭력은 개별 직원의 일탈이 아니다. 서울교통공사 역무원이 스토킹의 공포에서 죽임에 이른 데는 서울교통공사와 조직 구성원들이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알렸을 때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란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호소에도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도 ‘죽임’에 일조했다. 그 결과 피해자는 2019년 11월부터 죽기 전까지 350여차례 전화와 문자, 불법촬영 등에 시달린 뒤 죽임을 당했다.

피해자의 죽음 뒤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 등 스토킹 관련 법·제도를 정비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직장내 성폭력과 성적 괴롭힘은 법·제도만 정비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가해 직원을 일터에서 내쫓고,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다.

고인이 된 서울교통공사 역무원의 동생은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취재진에게 “직원들이 (피해자가) 우리 언니인 줄 모르고 ‘그 사람(가해자)은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누가 신고했을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며 “그때 직원들이 언니를 한 번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만 19세 이상 여성 10명 중 3명(36.4%)은 “평소 일상생활에서 여성폭력 피해를 입을까 두렵다”고 응답했고, 29.1%는 “보통이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여성폭력 범죄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단 16.3%였다.

노동+젠더 취재팀 : 김미영·강예슬·어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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