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별정직 우체국 집배원은 형식상 별정우체국 소속이지만, 실질적 사용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공무원 신분이 아닌 별정직 집배원의 사용자를 명시적으로 판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은 국가가 과로로 숨진 집배원에 대한 보호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봤다.

급성심장사 집배원 유족, 국가배상 청구
‘대한민국의 사용자성’ 재판 쟁점

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64단독(윤남현 판사)은 지난달 28일 별정직 집배원 A씨의 유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산)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소송이 시작된 지 4년5개월 만의 결론이다.

A씨는 1996년 아산우체국 소속 별정우체국에 임용돼 근무해 왔다. 별정우체국은 우체국이 없는 지역에 주민 편의를 도모하고자 개인이 설치해 운용하는 우체국을 말한다. A씨는 별정우체국장에 소속돼 집배 업무에 종사하는 비공무원 신분의 집배원이었다.

별정직 집배원은 별정우체국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했지만, 우정사업본부의 총괄우체국에 파견 나가 ‘우정직 공무원’과 함께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A씨도 집배권역 광역화 추진계획에 따라 2004년 8월 별정우체국에서 아산우체국 우편물류과로 파견명령을 받아 2017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우편물류과장의 업무지시를 받고 일했다.

당시 A씨는 출근하지 않은 점을 이상하게 여긴 동료들에게 자택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사망 원인은 급성 심장사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고인은 오전 6시께 출근해 오후 8시께 퇴근하며 10시간 넘게 일한 날이 많았고 휴무일인 토요일에도 근무했다. 그의 사망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은 1주 평균 62시간48분이었다. 게다가 숨지기 전인 2017년 초에 근무지가 바뀌어 업무부담이 가중됐다.

유족은 국가가 A씨 사망에 책임이 있다며 정부와 별정우체국장을 상대로 2018년 9월 소송을 냈다. 재판의 쟁점은 ‘대한민국의 사용자성’ 여부였다. 유족측은 A씨가 별정우체국 집배원이지만, 아산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우정사업본부에서 업무지시를 받는 등 정부와 실질적인 근로계약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 국가가 사용자가 아닐 경우 별정우체국장과 정부가 공동사용자로서 책임이 있다는 예비적 청구를 함께했다.

법원 “정부가 보호의무 위반”
“별정직 집배원 ‘진짜’ 사용자는 정부”

법원은 “대한민국이 망인의 실질적 사용자임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윤 판사는 “아산우체국에서는 우정직 집배원과 별정우체국 집배원이 구분 없이 동일한 장소에서 혼재돼 같은 업무를 수행했다”며 “별정우체국 직원은 아산우체국 물류과장에게 구체적인 업무지시 등을 받았다”고 판시했다. 지방우정청장이나 총괄우체국장이 별정직 집배원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고, 별정우체국이 우편 접수 역할만 할 뿐 총괄우체국의 관리를 받은 점도 근거로 들었다.

대한민국이 사용자라는 점을 전제로 윤 판사는 정부가 A씨와 유족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고 주문했다. 다만 A씨의 과실을 인정해 국가의 책임을 70%로 제한했다. 윤 판사는 “대한민국은 A씨의 사용자로서 생명·신체·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인적·물적 환경을 정비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함에도 이를 소홀히 해 열악한 환경에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한 A씨에게 급성 심장사에 이르게 했다”며 “나아가 대한민국은 A씨에게 신체상 재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아산우체국 집배원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이 3천2시간으로 전국 총괄우체국 중 상위 5%에 해당하고, 충청지방우정청 산하 우체국 중 근로시간이 가장 길다는 통계를 인용하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유족을 대리한 정병민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는 “대한민국은 A씨의 사용자로서 근로자인 A씨가 노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생명·신체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인적·물적 환경을 정비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어야 한다고 명시한 판결”이라며 “별정직 집배원의 ‘진짜’ 사용자는 정부라는 점이 인정된 데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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