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김혜진 기자
그래픽 김혜진 기자

A지역 민영방송사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김명호(가명)씨는 요즘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곤 한다. 번아웃은 체력적·심리적으로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상태를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다. 방송사 편성팀에서 일하는 그는 3년 전부터 MD(Master Director·방송국 송출업무 책임자) 업무를 함께하고 있다. 편성 PD인 그는 같은 편성제작국에 속한 MD 4명이 번갈아 연차휴가를 쓸 때마다 대체근무자로 투입된다. 지난해에는 100일 가까이나 MD로 일했다. 업무 과중에 시달리며 ‘번아웃’을 호소한 김씨는 <매일노동뉴스>에 “회사가 MD 1명을 충원하면 해결되는 문제”라며 “MD로 정식 발령을 낸 것도 아니고, 상반된 업무를 오가며 업무의 정체성에도 혼란이 와 심리상담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호소했다.

1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을 제외한 9개 지역 민영방송사 중 8곳은 4명의 MD를 채용하고 있다. MD를 불법파견해 지난 4월 서울북부지법에서 직접고용을 명령받은 CJB청주방송만 5명이다.

일종의 4조2교대로 돌아가는 업무 특성상 MD가 4명인 곳은 장기 휴가자가 생길 경우 나머지 사람들이 대체근무를 해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지키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편성팀에 속한 다른 직군의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대근자로 투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한 3명의 지역 민방 편성팀 노동자들은 소속 사업장이 모두 달랐지만 “방송사가 주 52시간제 시행 뒤 상시적으로 대근 업무에 투입해 압박이 심하다”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입을 모았다.

방송사고 위험 큰 MD, 땜질하기 급급한 민방

MD는 방송사 주조정실에서 방송을 송출하고 편성 계획에 맞게 방송이 운행되도록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편성표에 따라 정해진 시각에 방송을 내보내야 해 방송사고 위험에 크게 노출된 직군이기도 하다. 근무시간은 보통 4명이 한 조를 이뤄 ‘주·야·비·휴’를 반복한다. 첫날(주간)은 오전 9시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고, 둘째 날(야간)은 저녁 6시 출근해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근무하고 셋째·넷째 날은 휴무하는 식이다. 한 명이 휴가를 가면 근무조에서 휴무인 사람이 자기 휴무일을 포기하거나 대근자로 지정된 다른 직군의 사람이 투입된다.

각 방송사에서 상시적으로 MD 대근 업무를 한다는 김명호·서주필·이재영(모두 가명) PD는 공통적으로 높은 불안감을 호소했다. 편성·외주 등 전담 업무와 직함이 있지만 회사 요구에 따라 갑자기 MD 업무에 투입된다고 전했다. MD들이 연달아 휴가를 가게 돼 자기가 맡은 업무를 3주치나 미리 했다는 이도 있었다.

B방송사에서 8년째 MD 대직자로 일한 서주필씨는 “1년에 80일 가까이 대근 업무에 투입된다”며 “업무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시때때로 MD 업무에 투입되다 보니 항상 긴장하고, 불안감과 압박감·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이들은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면서 방송사가 비용절감을 위해 MD를 추가채용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C방송사에서 5년째 MD 업무를 병행하고 있는 이재영씨는 “방송사가 주 52시간제를 악용하고 있다”며 “회사에 ‘차라리 이럴 거면 발령을 내 달라’거나 ‘보상을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MD 직군을 한 명만 더 충원하면 된다”며 “대직자 없이 MD 4명이 근무하는 곳은 주 52시간제 위반 사례가 빈번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MD 대근 강요, 직장내 괴롭힘 소지 있어”

CJB청주방송은 현재 5명의 MD가 한 조를 이뤄 교대제로 근무한다. 오후 1시에 출근하고 밤 10시에 퇴근하는 사람이 있어 휴가자가 발생해도 근무조 안에서 충원이 가능하다.

이재영씨는 “건강에 부담이 큰 교대제를 강요받아 법적 대응을 고민하고 있다”며 “지난 4월 청주방송이 MD불법파견을 판결받아 직접고용하고 충원한 뒤, 다른 방송사도 경각심을 가질 줄 알았지만 ‘재수 없어서 걸렸다’는 의식만 팽배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김명호씨도 “대근 업무가 우선돼 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MD 일을 하는 내내 방송사고를 걱정해 수류탄을 품고 있는 기분을 느낀다”며 “회사에 저항했지만 ‘너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식이었다”고 토로했다.

이용우 변호사(법무법인 창조)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업무 범위를 넘어서서 부당하게 업무를 지시했다면 우월적 지위에 따른 직장내 괴롭힘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사용자가 업무지시권을 정당한 방식으로 행사해야 한다”며 “본래 업무와 무관한 업무를 하라고 변칙적으로 지시했다는 점에서 업무지시권의 부당한 행사로도 접근할 수 있지만, 이 경우 노동자가 업무지시를 거부해 징계절차를 밟아 부당징계를 다퉈야 할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노동자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에 놓일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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