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주최로 4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여성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 토론회에서 김규연 직업환경의학전문의가 발제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선생님, 화장실은 저기 관리사무소 건물밖에 없으니 시간표와 동선 잘 정리해 놓으세요.”

“이 지역에는 화장실 갈 곳이 없으니 ㅇㅇ회원 집을 이용하시면 될 거예요. 그렇다고 매주 이용하면 눈치가 보이니 적당히 다른 집도 알아보고, 가급적 뭘 먹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학습지 교사 여민희씨는 새로운 지역을 인수인계받을 때면 기존 담당 교사에게 이 같은 말을 듣곤 했다. “학습지 교사들에게 화장실 정보는 생계수단인 회원정보만큼이나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여씨에 따르면 학습지 교사들은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주 다급한 경우를 제외하면 방문 가정의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경우 상가 건물이나 관리소가 있기 때문에 주택가보다는 화장실 이용이 쉽다. 하지만 이런 건물도 이동시간이 촉박한 업무 특성상 가고 싶을 때 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주택가의 경우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주변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로당이나 주민센터·병원·관공서를 비롯한 개방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코로나19 이후엔 이런 곳을 이용하기도 어려워졌다.

여씨는 “화장실을 제때 가지 못하다 보니 학습지 교사들에게 위장질환과 비뇨기계질환은 만성고통이 되고 있다”며 “생리 중일 경우 제때 화장실에 가지 못해서 생리혈이 새어 회원 가정에서 민망한 상황에 놓이는 학습지 교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2019년 전국학습지노조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습지 교사의 91%는 여성이다.

남성 중심 사업장서 여성노동자들
“화장실 멀거나 사용에 눈치 보여”

화장실 문제를 겪는 이들은 A씨처럼 이동하며 일하는 여성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일정한 장소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중에도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성 중심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 B씨가 겪는 사례가 그렇다. B씨가 2003년 입사한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생산라인의 경우 15년 동안 여성노동자는 줄곧 B씨 혼자였다. B씨가 공장을 옮겨갈 때마다 해당 장소에 여성 화장실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처음 배치되고는 당분간 화장실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B씨는 “처음에는 화장실이 없으니까 사무실 화장실을 다녔는데 멀었다”며 “같이 일하는 분들이 천천히 다녀오라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는 상황인 만큼 눈치가 보였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여성노동자 8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도 여성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어려움 문제를 나타낸다. 지난해 9월11일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동·방문 노동자의 경우 ‘근무 중 화장실 사용이 대체로 불가능하거나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응답은 57.76%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사유는 ‘사용 가능한 화장실이 너무 멀리 있거나 인근에 없다’ ‘사용 가능한 화장실을 찾기 힘들다’ ‘화장실 시설이 더럽거나 불편해서 가고 싶지 않다’ 순이었다. 응답자의 86.34%는 근무 중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 화장실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 응답자의 62.28%가 개방형 화장실이나 공중 화장실에서 안전 문제를 느낀 적 있다고 답했다.

여성노동자 48.3% “화장실 이용 관련 건강영향 느낀다”

일정한 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에도 ‘업무 수행 장소에서 1~2분 거리 내에 화장실이 없다’는 응답률이 13.08%를 차지했다. 화장실에 도착해도 1~2분 이내 사용할 수 없다는 비율도 13.37%였다. 13.53%는 ‘근무 중 원할 때 화장실 사용이 대체로 불가능하거나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화장실 이용과 관련된 건강 영향을 느낀다는 응답률은 48.3%나 됐다. 근무 중 화장실 이용과 관련해 수분 섭취를 제한한다는 비율도 36.9%였다. 58.9%는 불안감·자신감 저하·우울감을 비롯해 화장실과 관련된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편이라고 응답했다.

권수정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남성의 몸을 기본값으로 설계된 라인에 소수의 여성이 일하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가 화장실 문제”라며 “남성 중심 사업장에서 여성 화장실이 멀리 있거나 부족한 사례, 여성노동자가 화장실을 갈 때 눈치를 보는 사례는 지금도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B씨 사례의 경우 제조업 대공장 정규직 일자리에서 여성이 배제돼 있는 것부터가 문제”라며 “누군가의 배려에 의해 화장실을 가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화장실 문제도 건강권 문제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여성 질환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며 “이동·방문 노동자를 고려한 공중화장실 운영계획을 마련하고 성인지적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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