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전태일평전 서문)
4만여개의 의류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동대문의 하루는 무척 길다. 전날 오후 9시에 나와 밤샘영업을 한 상인들은 아침 해가 뜰 때 집으로 돌아간다. 이어 낮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오전 9시부터 나와 좌판을 연다. 22일 오전 10시, 평화시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잡했다. 상가 밖에서는 쉴 새 없이 오토바이들이 짐을 실어 날랐고, 상가 안에서는 중국어와 일본어로 흥정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0년 전 전태일과 어린 여공들이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했던 평화시장 다락방 공장들은 지금 없다. 71년부터 평화시장 용달원으로 일했다는 정경진(70)씨는 “예전엔 1층 가게 안에 다락방을 만들어 미싱 1대씩 두고 옷을 만들자마자 매장에서 팔았는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고 기계화도 많이 됐다”고 말했다.
어린 여공들이 사라진 거리는 퀵서비스맨들의 차지가 됐다. 10년째 동대문 일대에서 퀵서비스업을 하고 있는 추영석(47)씨는 원래는 피복공장 노동자 출신이다. 추씨는 “옷 만드는 공장들이 죄다 창신동 골목길로 들어간 지 오래됐다”며 “땅값 비싼 동대문에서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 말했다.
주로 옷을 파는 평화시장이나 통일상가와 달리 동화시장은 자수를 놓거나 나염을 하는 의류부자재 전문업체가 많다. 1~2층은 상가이지만 3~5층은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동화상가 5층에 있는 541-1호는 ‘핫피스’라고 불리는 옷에 붙이는 반짝이를 취급한다. 이아무개(50) 사장은 “하루 12시간 뼈 빠지게 일해도 매달 적자”라며 “한 달에 250만원 임대료를 내고 직원 1명 월급으로 150만원이 나가는데 이번 추석에도 재미를 못 봤다”고 울상을 지었다. 중국 칭다오에 있는 의류공장들이 동대문 상권을 장악한 지 오래됐다고 걱정하는 시장 사람들에게 전태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일 따름이었다.
평화시장 반석자크 사장 정아무개(39)씨는 전태일을 ‘노동자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는 16년째 평화시장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데, 하루 기본 10시간은 일한다. 남들처럼 8시간 일하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정씨는 “평화시장은 사장이나 근로자나 다를 게 없는 처지”라고 토로했다.
미싱소리 사라질 날, 머지않아
평화시장에서 청계천을 따라 윗동네로 올라가면 창신동 고갯길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주택가나 다름없다. 그런데 집집마다 드르륵 드르륵 미싱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간판도 없이 1층 창고를 개조해 ‘시아게’(다림질·단추달기 등 마무리공정) 공장으로 쓰고 있는 서아무개(45)씨는 “요즘은 일감이 많으면 일할 사람이 달리고, 일손이 남으면 일감이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털어놓았다. 서씨는 평소에는 부인과 둘이서 일하고 주문이 밀리면 ‘시루시’(단추달기)만 하청을 주거나 객공을 쓴다고 했다. 객공은 일정한 고용계약 없이 일의 양에 따라 임금을 주는 형태다.
성수기에는 밤샘노동에 시달리고 비수기에는 곧바로 실직자가 된다. 전태일 생전에는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 대다수가 객공이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객공을 월급제 형태의 정규고용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요즘 봉제공장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실정이다. 라병태 동대문의류봉제협회 회장은 “미싱사 나이가 45세면 아주 젊은 축에 속한다”며 “대부분이 50~60대인데, 15년 전부터 의류제조업을 배우려는 사람은 없고 나이 든 사람들은 연간 10%씩 퇴직하면서 봉제공장 규모가 점점 줄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이 심해 문 닫는 공장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창신동·숭인동 일대가 3차 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된 것도 봉제공장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아파트 중심의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그렇잖아도 중국산 저가제품에 밀려 허덕이는 창신동 봉제산업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인근의 미아리나 석관동으로 이전한 업체도 적지 않다.
전태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청계피복 노동자 1세대들은 이제는 환갑을 넘긴 고령이 됐다. 이들은 오랜 터전인 창신동을 떠나느니 차라리 공장을 접고 당구장이나 식당으로 업종 변경을 택하고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전태일 일기 중에서)
근로기준법은 어디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노동할 권리를 누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전태일이 죽은 다음해 태어난 한청균(39)씨는 배관공이다. 석 달 전부터 청계천 인근에 건설 중인 한 빌딩에서 일하고 있다. 건물의 골조들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지하층부터 배관을 매설하는데, 스프링클러와 각종 공조 파이프를 나사로 조이거나 용접하는 게 그의 일이다.
오전 6시40분 현장에 도착해 저녁 6시에 퇴근한다. 하루 12시간 주말도 없이 일하는 한씨는 “건설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며 “시계추마냥 집과 일터를 오가는 건설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은 먼 나라 얘기”라고 말했다.
한씨는 2년 전 서울 문래동 공사현장에서 일할 때 옆에 있던 동료가 추락사고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사고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동료의 일을 맡았다. 그때 전태일이 떠올랐다고 한다.
한씨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부리는 것은 똑같다”며 “그나마 지금은 노조라도 만들 수 있어 숨통이 트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색색의 천 조각을 매단 포클레인 한 대가 흉물스럽게 서 있고, 그 위에서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과 송경동 시인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제는 포클레인 위에 텐트까지 쳤네.” 한 주민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고 지나간다.
포클레인 맞은편 경비실 옥상 위. 윤종희 조합원과 오석순 조합원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불법파견 인정하고 해고자 직접 고용하라”고 외치면서 복직투쟁을 벌인지 어느덧 6년. 단식농성·고공농성 안 가리고 다 해 봤다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밥을 굶는다. 공장 앞에서 ‘지지고 볶은’ 날짜를 헤아려 보니 무려 1천884일째다.
기륭전자 사태는 중소 제조업체의 불법파견 문제를 상징한다.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일대에 조성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제조업체에 취업하려면 반드시 파견업체를 거쳐야만 한다. 이제 직원을 직접 채용하는 공장은 없다.
“아는 언니가 파견업체를 통해 공장에 취직했다가 한 달도 안 돼 잘렸는데, 해고 사유가 뭔 줄 아세요? ‘얼굴이 어둡다’는 거였어요. 근로기준법의 해고 관련 조항은 있으나 마나예요.” 오석순(44)씨의 말이다. 6년 전 오씨의 해고 사유는 “근무 중 잡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현행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업무에 파견직 투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지식·기술이 필요한 경우, 일시적·임시적 고용이 필요한 경우’에만 파견직을 투입할 수 있다는 파견법의 취지는 사문화된 지 오래다.
중간에 파견업체를 낀 상태에서 직원을 채용하는 제조업체 사용자들은 노동관계법에 명시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물량변동 등을 이유로 언제든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다.
현대판 시다, 파견노동자
제조업에서 파견직 채용이 늘어난 결정적 이유는 저렴한 임금이다. 김민호(29·가명)씨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있는 A사에서 일하고 있다. 근로계약은 파견업체와 맺었다.
“이 근로계약서는 공단 내에서 통용되는 표준계약서예요. 파견업체와 근로계약을 맺는 노동자들은 올해 최저임금 92만8천860원을 한 달 월급으로 받아요. 근로계약서상 4대 보험이 적용되지만, 근로기간이 몇 개월밖에 안 되니까 그냥 수당처럼 돈으로 받는 경우가 많죠.”
이 지역 노동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월급의 10~30%가 파견업체 수수료로 떼이는 실정이다.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있는 근로기준법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나마 교통편이 잘 구비돼 있는 수도권지역의 사정은 지방 공단에 비해 낫다.
최병승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국장은 “지방 공단을 상대하는 파견업체의 경우 회사에 숙소를 차려 놓고 노동자들을 이 공장 저 공장에 번갈아 보내는 경우도 있다”며 “노동자들은 수수료에 숙소비용까지 떼어 가는 파견업체의 횡포에 시달리다 대부업체에 손을 벌리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업체에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스스로 노래방 도우미 같은 유흥업소 종사자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40년 전 어린 여공들이 쥐꼬리 임금과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공장을 뛰쳐나갔던 현실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 일기 중에서)
전태일 40주기, 불혹이 된 노동운동
21일 오후 청계천6가 오토바이와 인파들 사이에 청년 전태일은 다리 위 동상이 되어 평화시장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상 앞에서는 차윤호 한국인터넷진흥원노조 위원장이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바꾸자’는 피켓을 들고 섰다. 릴레이 1인 시위는 이날로 57일째다. 전태일 동상 앞에서 차 위원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태일은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했잖아요. 그것도 아무도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이 땅의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말이죠. 사실 기득권에 연연해하는 요즘 정규직노조와는 정말 달랐다고 생각해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 그게 전태일 정신 아닐까요.”
그가 떠난 지 40년. 한국의 노동운동도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섰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화시장을 맴돌고 있다.
김미영·구은회 기자
“위인전 속의 박제된 열사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던 정 많은 청년 태일이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싶었다.”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이한 올해, 전태일은 더욱 젊어졌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가 지난달 선보인 전태일 캐릭터 ‘태일이’가 그렇다. 만화가이자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인 최호철씨가 구상하고 그린 태일이는 전태일 열사가 숨질 당시의 모습과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모습을 담고 있다. 또 촛불을 들고 있거나 기타를 연주하고 비정규 노동자와 함께 싸우는 태일이는 40년 전 평화시장 재단사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을 함께 살아가는 젊은 노동자 같다.
행사위가 청계천6가 앞의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로 개명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가 다음달부터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를 병행 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캠페인은 열사의 기일(11월13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단순히 다리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태일을 우리 곁으로 더욱 가깝게 되살리려는 취지에서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전태일 열사가 점점 시민들 사이에서 잊혀지면서 운동권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다”며 “40주기 기념행사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손으로 열사를 새롭게 만들고, 소외받는 노동자인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자들과 함께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 전태일재단이 펴낸 전태일 평전 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전태일재단은 지난해 출판사 돌베개로부터 판권을 넘겨받았다. 새로 나온 평전은 고인의 죽음을 넘어 삶과 사랑에 무게를 두고 있다.
300여 차례 등장하던 ‘죽음’이라는 단어를 30회로 줄였다. ‘투쟁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단락은 분량을 대폭 줄이고 제목도 ‘1970년 11월13일’로 바꿨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돼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고 썼다. 40년 전 평화시장의 불꽃이 돼 사라진 전태일은 그렇게 우리 시대로 되살아나고 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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