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웅~” “빵빵!!”
지난 2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일대. 오토바이 소리와 자동차 소음이 귀를 때렸다. 거미줄처럼 펼쳐진 좁은 골목길과 다닥다닥 붙은 상가와 주택들이 혼잡을 더했다. 걷기 힘들 정도였다. 곳곳에 미싱사, 시다, 객공·하청을 구한다는 구인문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 죄송한데 다시 한 번만 얘기해 주세요. 길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집 찾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찾은 집. 그의 체구마냥 조그만 2층 단칸방이었다.
“어서 와요. 용케도 찾아왔네요. 창문가에서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82) 여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열사의 동생 전태삼(60)씨가 연로한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중략)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전태일 일기 중에서)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항거한 지 40년. <매일노동뉴스>가 그 세월을 오롯이 지켜 온 영원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두 번의 입원  “하루만 늦었어도…”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아유, 지금도 힘이 없고 밥도 잘 못 먹어요. 이것 봐요, 살도 많이 빠졌죠?”
그랬다. 몇 년 만에 본 어머니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얼굴에 살이 없었던가. 이날은 식사도 넘기지 못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올 들어 두 번이나 병원신세를 졌다. 지난 4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아들 태삼씨는 119를 불러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달렸다. 응급차를 가는 도중 어머니는 의식을 잃었다.
“하루 이틀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군요. 병원에서 의식이 돌아왔지만 사흘간 사람들을 못 알아봤어요. 양쪽 콩팥과 담낭이 상했고, 당뇨까지 겹쳤다고 하더군요.”
태삼씨는 그때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한 달 뒤 어머니는 퇴원했다.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갑갑해 못 견디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3개월 뒤 어머니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병원을 퇴원한 뒤에 잘 걷지도 못하고 시들시들 하더라고.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겁이 나서 병원에 갔는데, 백내장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결국 어머니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한 달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그 뒤 태삼씨가 줄곧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이 참 고맙지요”

어머니는 8월26일 청계천6가 버들다리(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전태일다리 이름짓기 범국민 캠페인 선포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병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전태일 열사 관련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이달 12일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 출범식에는 참석했다. 거동이 불편한 데다,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기 어렵지만 그래도 행사에 빠질 수는 없었다.
“서울시에서 전태일다리를 인정해 주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40주기 행사 준비를 위해 모두가 밥도 못 먹고 뛰어다니고 있어요. 사람들이 참 고맙지요.”
8월26일 전태일 열사 생일을 기해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로 명명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매일 8명씩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고, 결실을 봤다. 서울시는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를 함께 쓰기로 결정했다. 버들다리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평화시장과 가깝다. 2005년 35주기 때 설치한 동상과 동판도 있다.
“어머니, 벌써 40년이 됐네요. 지난 이야기를 꺼내면 가슴 아프실 텐데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팔순을 기념해 펴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서 어머니는 당시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사흘을 앓아눕는다고 했다.
 
“아들 팔아서 밥 먹고 살라고?”
 
“아들 팔아서 밥 먹고 살라고? 태일이가 원하는 것 해 줘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지. 돈으로 매수하려는데, 안 한다고 칼같이 했지.”
어머니가 아들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태삼씨가 조심스럽게 40년 전 일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어머니는 40년 전 11월13일 분신 뒤 전태일 열사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그날을 떠올렸다. 열사는 어머니에게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뒤 “아들이 원한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장례식을 치르지 않겠다”고 버텼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납치해 협박하고, 거액의 돈을 주겠다며 합의를 강요했다.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간신히 탈출했다.
“우리 아들이 뭣 때문에 죽었는데 돈으로 매수하려는 놈을 상대하겠어요. 말 안하고 끝까지 버텼죠. 노조 허가하고, 다락방 없애고, 16시간 일 시키지 말라고 요구했지요. 결국 다락방 없앤다는 약속은 안 지키고, 노조 허가하고 사무실 내주는 것에 그쳤지만….”
어머니는 그때 설립된 청계피복노조를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인정된 민주노조”라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태일 열사 사후 오늘의 민주노조운동이 발전하기까지 동력이자 버팀목이 돼 준 것은 이소선 그였다. 아들의 유언을 지키고자 앞장서 달려들고 깨지고 조직하고…. 몸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요. 그저 악이 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게지….”
 
“엄마, 내 부탁 꼭 들어주세요”

어머니는 “이것 보라”며 바지를 걷어 종아리를 보여 줬다. 온통 상처투성이다.
“에구, 그때 사람들 많을 때는 대놓고 때리기 어려우니까 팔꿈치로 찍으면서 주저앉혔다고요. 그러면 (아파서) 목도 못 젖혀. 구둣발로 여기저기 안 맞은 데가 없었죠.”
어머니는 투사이기도 했다. 징역만 4번에, 수배도 여러 번 당했다.
“전두환 때는 전두환 쫓아내고 민주화하자고 연설하고 다녔지. 우리 아들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랬어요. 가서 데모하라고 했어요. 민주노조도 만들라고요.”
어머니는 요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했다.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난해 6월까지 옛 전태일기념사업회 건물에 살았다. 사업회가 지금의 전태일재단으로 전환돼 인근 다른 건물로 이사하면서 기존 어머니 소유의 건물소유권이 재단으로 넘어갔다.
새로 이사한 건물엔 어머니가 거처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전태일재단과 그리 멀지 않은 지금의 단칸방에 따로 거처를 마련했다.
“짐을 좀 벗게 됐죠. 내가 죽기 전에 재단을 만들었으니. 태일이가 마지막으로 가면서 얼마나 부탁을 했는데요.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어서도 날 돌아보지 않겠다고….”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중략)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대답해 주세요.”(‘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중에서)
 
“비정규직과 하나가 돼야 해요”

그런 어머니에게도 기쁜 날은 있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던 그날이죠. 마치 태일이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어요.”
슬픔과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민주노총의 탄생은 어머니를 웃게 했다.
“요즘 민주노총이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5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때도 제가 막 뭐라고 했어요. 엠비든 회사든 쫓아가야지. 노동자는 단결 없이는 안 돼. 왜 지금은 못 쫓아다녀.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을) 모아서 하루라도 (파업을) 해 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어머니는 호통을 쳤지만 그래도 민주노총이 잘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금방 뭉쳐지진 않겠죠. 하지만 김영훈 위원장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잘하겠죠. 잘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5년 전엔 양대 노총이 35주기 행사를 같이 준비했는데, 올해는 왜 40주기 행사를 함께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태일이가 죽었을 때, 그때 아무것도 없었는데 한국노총이 장례식을 해 줬어요. 양대 노총이 하나가 돼야 해요. 왜 쪼개지느냐고. 내가 죽기 전 양대 노총이 같이하는 날이 올까요?”
노동운동에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나가 안 되면 절대 안 된다”며 “비정규직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또 기륭전자분회 노동자가 단식농성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단식은 안 돼요. 살아서 해야죠.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정규직의 기본권이 짓밟히고 사람취급을 못 받는데, 그들의 오랜 기다림만큼 우리가 한꺼번에 해결할 힘이 없기 때문에 단식에 나선 겁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똑같잖아요”

“전태일정신이라고요?”
어머니에게 아들의 죽음이 이 사회에 뿌린 뜻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가 돼서 처음 날 때부터 주어진 인권이 유린되도록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태일이는 숨이 넘어가면서까지 ‘엄마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소리를 못 잊어서 병들고 아파도 오란 데는 다 갔어요.”
어머니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몸을 낮췄다.
“조그마한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지금 한국을 누가 발전시켰나요. 노동자가 피땀 흘려서 이만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날 때부터 다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고 태어나잖아요.”
어머니는 모든 사람들이 고맙고 또 고맙다고 했다.
“태일이 친구들이 40년간 신경 쓰고 여기까지 끌고 왔지요. 친구들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죠. 박형규 목사와 문익환 목사도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어요. 나이 많은 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니 민망했지만 고마웠죠. 모두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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