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황우석 사태 관련 기고문으로 인해 겪었을 고통에 대해 우선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기고문 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사태가 마녀사냥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전화를 드렸는데, “방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오니…”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그제야 ‘아! 전화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인터넷상으로 신상정보가 유출되어 겪었을 정신적, 인격적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이번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저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의 애국주의 열기를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를 목도하며, 당시 저는 문득 본능적인 공포감이 들었습니다. 이번 황우석 사태도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와 애국주의의 광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현기 동지가 쓴 <매일노동뉴스> 기고문이 ‘황우석 신드롬 이면의 파시즘’이었지요. 맞습니다. 황우석 사태 이면에 자리 잡은 것은 분명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이야말로 거대한 집단적 광기를 기반으로 하며 소수의 입장과 목소리를 이유 불문하고 압살하는 체제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사회체제로도,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괴물’입니다.
지금에서야 연구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애국주의 열기가 다소 주춤하고 재검증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지만, 이 광기의 근원적 뿌리는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 있습니다. 이 광기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활용하는 진원지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노동자, 민중을 노려보고 있는 권력과 자본과 언론입니다.
노현기 동지!
사실 테러 수준에 도달한 네티즌들의 공격보다 노현기 동지를 더 아프게 한 것은 동지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만든 민주노동당으로부터의 공격이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지난 80년대부터 20여년이 넘게 피 흘리는 포복으로 만들어온 우리 삶의 결정체, 바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공격은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상처로 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언제입니까? 80년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거쳐 온 20여년의 삶의 궤적들을 다시 돌아봅니다. 민주노조공동실천위원회(공실위), 인노협, 인민노련, 한국노동당, 통합민중당,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 진보정당창당준비위원회,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의 ‘외롭고 낮고 쓸쓸한’ 나날들을 동지와 저는 대부분 함께 해왔군요. 새삼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0년 1월31일, 마침내 민주노동당 창당선언문이 울려퍼지던 올림픽역도경기장에서 동지와 함께 얼싸안고 흘렸던 감격의 눈물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현기 동지!
이번 황우석 파동에서 보여주었던 민주노동당의 이중적이고 심지어 기회주의적이기도 한 태도를 보며 저는 불현듯 1차세계대전 당시의 사회애국주의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유럽의 대부분 사회주의당들이 ‘조국에게 승리를!’이란 슬로건을 외치며 노동자, 민중을 배신하고 참전을 선동할 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란 슬로건을 내걸고 투쟁했던 레닌의 정신과 원칙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진보정당의 길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는 간난신고의 길입니다. 그러하기에 언제나 올바른 정신과 원칙만이 우리의 나침반일 것입니다. 애국주의에 편승하지 않는 것, 당장 힘겨워도 끝끝내 진보의 가치를 견결히 지켜나가는 것, 고독함을 두려워 않는 것이 우리의 행동강령이 되어야 합니다.
노현기 동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노동당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당의 문제와 오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힘을 냅시다! 슬퍼하지 맙시다! 우리가 언제 힘들고 괴롭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이만큼 오지 않았습니까? 8만 당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의 해방세상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이것저것 마음의 정리가 되면 연락 주십시오.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서 깡소주나 한잔 하며 노래라도 불러드리리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사슬 끊고 흘러넘칠 노동해방 이 길을’
해방버스에서 영원한 동지 황이민 드림
나는
노현기가 자기 지적내용에 대한 자만에 차서
겁나게 표독한 언어로도 휴머니즘을 치장할 수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 분노가 너무 커서 여태 감히 노현기란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았었다.
일년 전을 돌아 보며
이제야 노현기란 이름을 검색하며 이제야 댓글이라도 달아 볼 엄두를 낸다.
나는 골수 민노당지지자였다.
노현기의 난자기증자를 일본위안부에 비유한 저 발언을 접하기 전까지는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희망의 끈을 쥐고 있었다.
노현기의 그 극악한 발언은 내게 충격이었으며
그 후 홍세화의 파시즘 발언이며 진중권의 광신도 발언 등등
쏟아져 나오는 진보진영의 광적인 발악들을 보며
절망했다.
난치병환우들은 그들에겐 없었다.
다만 연구자가 정부로 부터 얼마의 지원을 어떻게 받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의료시장화에 대해서
자본론적 접근만으로 연구자를 재단하고 기증자들을 재단하고
국가론만으로 기증자들과 지지자들을 비난했다.
황우석은 돈벌이와 명예를 위해 배아복제연구를 하는 악한이며
난자기증자들은 돈이 궁한 가난한 여자들일 뿐이다.
돈은 필요없다는 기증자들은 애국에 미친 년들일 뿐이다.
그들은 장애자들을 바라보는
어미된 자와 어미될 자의 심정과 선택 같은 건 알 수가 없다.
그들은 한 과학자가 갖는 인류애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들이 학습한 단어에는 자본 국가 일제 등등의 단어들로만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 단어들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그 단어들로 세상을 가르치려까지 한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독히도 섬뜩한 눈알을 부라리고 사는 대한민국의 진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