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 글이 실리고 8일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노현기, ‘전’ 민주노동당 부평구위원회 부위원장. 지난 6일자 매일노동뉴스 여성칼럼인 <여성과 노동>에 그의 글인 <‘황우석 신드롬’ 이면의 파시즘>이 게재된 뒤 숨막히는 3일간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노현기, 그는 ‘전’자를 붙인 채 당직을 사퇴한 뒤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말하고 싶어했다. 광풍이 휩쓸던 초반부터 내내. 처음엔 ‘다시 파시즘을 말한다’(가제)를 통해 먼저 글을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글이 ‘불친절’ 해 진의가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친절한’ 글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3일만에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사과’를 하고 황급히 문제를 덮은 뒤에는 그런 글도 의미가 없어보였다. 아무리 수습이 필요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차근차근 말하고 싶어했다. 지난 14일 노현기 전 부위원장을 만났다.


“난 피해갈 수 없었다”

“저도 원고를 보내던 당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어요. 워낙 시간에 쫓겨 쓴 탓이 있고요. 제 글이 나간 뒤 아는 분이 ‘평소 글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웬일이냐’고 걱정하더군요. 그 글은 친절하지 못한 글이었어요. 할 말은 많은 데 한정된 지면에 넣으려니 (생략되면서) 불친절한 글이 됐습니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처음 이 글을 쓰고자 했던 배경이 한 당직자의 말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제가 지난 6개월간 하던 작업이 있었는데요. 지난달부터 마감이 걸려 사실 인터넷도 못 보고 황우석 논란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세히는 몰랐어요. 그러다가 11월말 당 모임에 갔다가 한 당직자가 ‘무서워요, 황우석’이라더군요. 그리고 매일노동뉴스 원고마감이 걸린 주에 MBC PD수첩 논란과 광고가 중단되고 PD수첩 중단을 검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지요. 저도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인천시당 환경위원이에요. 지역 환경단체와 공부해 왔고 게다가 전 여성이고…. 이런 조건에서 이 문제를 쓰지 않는 것은 ‘피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는 글을 쓰는 원칙이 있단다. 오랫동안 당의 홍보선전 전선에서 일했던 그는 ‘그의 글’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으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해 왔다. 바로 남이 쓰지 못하는 것을 쓰라는 ‘임무’ 말이다.

“불친절한 글이었다”

그 원고에 대해 왜 이같은 ‘험악한’ 현상이 나타났는지 그의 생각은 어떨까. “제가 학문적으로 분석할 처지는 안 되고요. 형식적 민주주의는 발달됐지만 뒷받침 되는 민주주의, 공공성에 대한 담론이 없는 상태에서 인터넷의 발달, 거기에 취합되는 정보의 양과 익명성이 덧붙여지면서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됐다고 봅니다. 문제는 자본과 보수정권이 이를 이용하고 있고 언론이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면에는 일등이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수한 2등의 대리만족, 과학만능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저러나 그의 ‘비유’는 그의 글에서 가장 많이 지적당한 부분이다. 그의 생각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전 정신대를 선동했던 당시 친일파 지식인을 말하고 싶었어요. 당시엔 노천명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정신대를 선동할 때 군인들 옷 빠는 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아 끌려갔거나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선 민감하지만 짚고 가야 할 게 있다. ‘위안부’를 어떻게 선동했느냐이다. 지난 12일 매일노동뉴스의 ‘황우석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 좌담에서 정은지 여성민우회 건강팀장은 “당시 학교를 폐쇄하지 않는 조건으로 학생을 보낸 예가 있습니다. 모두 5명이었지요. 과연 학교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했을까요? 조국, 민족, 교육, 감정(이타심)을 내세워 설득했을 것입니다”라고 한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드립니다”

“글에서 딸의 손을 잡고 나온 어미와 노천명을 대비시킨 것은 극단적인 대비일 수도 있고, 혹은 상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딸이 자기 성적 결정권이 있었을까요? 난자채취의 위험성을 제대로 경고했는지, 경고 했더라도 본인이 동의했으면 되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의 말이다. 극단적인 대비일 수는 있으나 당시의 군국주의 시스템이나 지금 국가주의 시스템은 여성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저는 언론에서 얘기하듯 난자기증여성을 ‘위안부’라고 단정지은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정대협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상규명 노력에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다 이번에 본의 아니게 제 글로 인해 할머니들이 피해를 보게 된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나중에 정대협을 방문해 이같은 의사를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이와 함께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언론의 보도 태도를 지적했다. “순수한 의미의 불치병 치료를 위해 기증한 분도 계시다는 거 압니다. 이들에겐 윤리적 잣대로만 말씀드리기 힘들 거예요. 하지만 보수언론이라도 좋은데, 우리 언론이 살아있다면, 말할 것은 말해야 합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실제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난자기능 여성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등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나

이제 원고가 게재된 6일부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짚어보자. “첫 전화는 6일 오후4시쯤이었어요. 남자분이었는데 흥분된 목소리로 ‘딸의 손을 잡고 나온 어미의 무지함’ 부분을 지적하시더군요. 그분은 ‘그 어머니가 난자제공의 위험성을 다 알고 있는 분’이라면서 ‘순수한 의미로 나온 것인데 모독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첫 전화통화를 하는 중 쉴 새 없이 전화기의 신호음이 ‘삑삑’댔다. 대부분은 항의전화였지만 거기엔 민주노동당 부평구위원회도 있었다. 항의전화 때문에 업무가 마비됐다고 했다. 글을 삭제해달라고 했다. 중앙당으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중앙당 한 관계자는 “왜 그 글을 썼냐”며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마도 그 글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쏟아져오는 항의전화를 받다보니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제가 매일노동뉴스에 전화했습니다. 당시 전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내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한 것은 지역위의 어린 상근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온갖 욕설이 난무한 전화를 이 어린 상근자가 받을 텐데 어찌 감당할까 싶었어요.” 그 항의전화들이 어떤 것일지 가히 상상이 됐다. 그에게 찍혀오는 문자메시지들은 ‘말로 표현 못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대부분이었다.

이날 노현기 전 부위원장의 휴대폰으로 순식간에 집중적으로 전화가 갈 수 있었던 것은 몇몇 네티즌들이 익명성을 이용해 인터넷 댓글에 번호를 공개하면서 항의전화를 하라고 선동했기 때문이다. 이 휴대폰 번호는 온갖 댓글에 복제되면서 인터넷뿐만 아니라 유선으로도 융단폭격을 가능케 했다. 또한 그의 얼굴과 관계된 인신공격이 항의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사진도 여기저기 퍼다 나르며 유감없이 ‘말의 폭력’을 휘둘렀다.

수습책으로 당직을 내놨지만…

둘째날인 7일 마침내 권영길 민주노동당 비대위 대표가 그를 찾는 연락이 여기저기서 전달돼 왔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은 숱한 항의전화로 2시간만에 배터리가 닳는 상황에서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전화기를 쳐다보기도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권영길 대표에 앞서 박용진 대변인과 통화가 먼저 됐다. “박용진 대변인은 이전의 한재각 연구원이나 송태경 실장 건까지는 감당이 됐는데 선배(노현기) 글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오늘(7일)은 논평을 안 내지만 내일(8일) 논평을 내는 데 선배가 (해명)글을 써주면 그 글을 토대로 논평을 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박 대변인은 정대협과 난자기증재단에서 항의한다고 했어요. 전 정대협이 왜 항의를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선동을 비판한 글이었는데요.”

또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박 대변인은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선배도 정치인이라면 소나기는 피해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전 ‘그런 정치인이라면 하기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화를 끝내고 이날 밤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수습책의 한 방법이라면 말입니다.”

이날 밤 권영길 대표와 통화가 됐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은 “전 권 대표에게 사과글이나 해명서를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파시즘이고 테러라고 생각한다고요. 사과글이나 해명서는 파시즘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거부의 의사를 밝혔어요. 그리고 제가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수습이 되길 바란다고요.”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그래도 이때까지는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당이 잘 버텨주길 바랬다. 당으로서 곤란한 지경이니까 나름대로 수습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날 당의 논평과 부평구위원회의 입장을 보고 그는 경악을 했다고 했다.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것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다음날인 8일, 당은 비대위 12차 회의에서 있은 권영길 모두 발언을 소개했다. 권 대표는 “당원들이 당론 이외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말할 수 있다”며 “하지만 당직을 맡고 있는 일부 당원들이 적절하지 못한 비유와 방식을 통해 개인 의견을 밝히고 그것이 당의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권 대표는 “당은 그동안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가 보여준 빛나는 성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왔다”, “연구성과의 진위여부는 정치권이 아닌 과학계의 몫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당은 당직자 발언을 통해 “노현기 당원은 ‘표현의 문제로 진의가 왜곡돼 안타깝다’며 물의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정대협과 난자기증재단측에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또 부평구위원회는 8일 ‘입장’을 통해 “민주노동당을 아껴주시는 당원과 국민여러분께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이어 부평구위원회는 “민주노동당은 줄기세포 연구가 더 튼튼한 사회적 지지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 현재 제기되는 윤리적 투명성 문제에 대해 밝힐 것은 밝히고 제도화할 것은 제도화하자는 입장입니다”라고 아울러 밝혔다.

이같은 당의 입장에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제가 민주노동당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정당을 통틀어 민주노동당만이 ‘생명윤리’ 공약이 있고 집요하게 이를 제기해 왔으며 지난 총선 때도 환경단체들과 같이 이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50년만에 지갑 찾아준 노동자·서민의 신의 저버려”

실제 민주노동당은 지난 총선 때 엄격한 생명윤리 공약을 선보였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통해 ‘배아복제행위·이종간 교잡행위의 예외없는 금지조항 마련’, ‘인간배아생성은 불임극복을 위한 의료행위 단일화’라고 밝혔다. 또 공약에서는 “많은 난자를 필요로 하는 배아복제 연구는 여성을 난자 공급처로 전락시키고 … 생명윤리에 심각한 문제를 가하는 것 … (수정란을 생명으로 볼 지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시험 진행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근거로 보면 노현기 전 부위원장의 글은 권영길 대표가 언급한 ‘당론 이외의 다른 의견’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당론에 ‘지극히 충실한’ 글이었다. “그런 당이라면 그런 입장을 지켜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어렵더라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무릎 꿇은 것은 50년만에 지갑을 찾아준 노동자와 서민의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저버린 것이 저로선 가장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어 노현기 전 부위원장는 “당시 생명윤리 공약은 당 환경위에서 주관한 환경공약제정팀이 만들었으며 유수의 전문가가 참여해서 수차례 토론을 거쳐서 만든 것입니다. 현재 배아복제의 완전한 금지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제한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당의 처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민주노동당도 가진 게 많아졌구나. 가진 것을 버리기 싫은 상태가 됐구나. 과거 민주노동당은 가진 게 없어서 더 절박하게 싸웠고 미숙한 게 많았지만 그런 만큼 국민들이 알아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무엇으로 국민에게 다가갈 것입니까?”

91년부터 ‘진보정당운동’의 길을 걷다

“제가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한 것은 91년부터였어요. 그 이전엔 87년부터 민주노조건설공동실천위원회,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등에서 일했습니다. 모두 홍보부 일을 맡았었죠. 당시 노동자를 만나고 노동자투쟁을 보면서 노동자들에게 당이 필요하다는고 절감했어요. 90년대 모두들 떠날 무렵 전 남기로 했지요. 집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떠난 사람이 각자의 역량을 갖춰 언제가 돌아올 집을 지키는 이 말입니다.”

91년 한국노동당을 선택한 이후 (통합)민중당에서 선거일을 돕다가, 진보정당건설추진위, 진보정치연합을 거쳐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그리고 지금의 민주노동당까지 지난 15년여를 쉬지 않고 진보정당운동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늘 홍보일을 담당해왔다. 97년 국민승리21 시절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도 그는 홍보일을 담당했다. 당시 홍보팀은 ‘일어나라 코리아’란 당시 선전구호로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열악한 재정구조 속에서 ‘눈물과 땀’으로 이를 악물고 어렵게 홍보물을 만들며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엔 당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선거결과는 최악이었다. 득표율 1.2%. 대선기간 선대본에서 200명이 뛰었지만 대선 뒤 남은 이들은 18명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18인의 전사들’이라고 불렀다. “전 대선 뒤 득표가 너무 적어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겼어요. 여태껏 해오던 게 있는데…. 국민승리21 이후에는 그래서 더 희망을 느꼈지요. 출발은 1.2%에서 하지만 그것을 모태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97년 대선 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하기까지 창당준비위에서 선전홍보국장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는 창당 뒤 바로 인천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당이 만들어졌으니 지역에서 안착시키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평당원으로서 임무를 놓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애정 어린’ 당이지만 지금 그는 염려스럽다. “저는 어떻게 돼도 좋아요. 하지만 이번 일로 스스로 당은 자신을 밟은 것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르는 게 더 안타깝습니다. 당에 대해 말없이 가졌던 ‘기대들’은 무릎 꿇지 않는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당은 인터넷상의 폭력적 테러에 대해서도 제기하고 배아줄기세포 연구 의혹에 대해서도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민주노동당은 대중과의 소통방식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인터넷 네티즌에 대한 당의 전략적 고민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주노동당이 인터넷 지지 1위 정당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보수진영과 자본측이 인터넷을 조직적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지요. 이 부분에서 민주노동당이 전략적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의 얼굴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피곤해 보였다. “솔직히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요. 사실 인터넷상의 폭력에 대해 익히 얘기를 들어봤지만 직접 겪어보니 상상이상의 훨씬 강도가 센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항의와 욕설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요새 정신적인 두려움이 말도 못하다고 한다. 노현기 전 부위원장의 노모가 며칠 전 전화를 하셨단다. 그동안 노모가 이런 사실을 몰라 다행이라 여겼는데 이웃이 알려줬다며 나이든 ‘막내딸’을 걱정하며 전화를 하셨다. “어머닌 문 꼭 잘 잠그고 자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나이든 막내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평당원’으로서 임무를 놓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앞으로 할 일 많지요. 기존에 해오던 지역민주화운동사편찬 기초사업도 마무리 작업을 할 거고요. 인천시당 환경위원회에서 환경위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해야지요. 무엇보다도 ‘환경과 노동’ 문제를 당 안에서 통일시키기 위한 일도 하고 싶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그의 ‘출당’을 선동했지만 그는 15년 ‘눈물과 땀’으로 함께 일군 민주노동당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진 =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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