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 하는 총각’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섭외 과정에서 “통일운동 하는 청년들은 많지만 활동을 공개하는 게 낯설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국가보안법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어렵게 찾아낸 통일운동 하는 청년, 황기우씨(30)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총각처럼 평범해 보였다. 170cm 약간 넘는 키에,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집, 표준 한국인의 얼굴형이다. 청바지에 잠바 차림이지만 30대 월급쟁이처럼 양복을 입어도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통성명이 끝나자 기우씨가 물었다. “저 어떤 주제로 기사를 쓰는 거죠?”<우리 이웃>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편을 읽었다고 하면서도 다시 확인하는 조심스러움.


상위권 성적의 '범생이'도 '날라리'도 아닌

기우씨의 고향은 대구다.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지금도 기우씨의 부모님과 남동생은 대구에서 살고 있다.

기우씨의 아버지는 15톤 덤프트럭을 운전하신다. 덤프연대 조합원은 아니시다. 덤프를 하시기 전에는 시내버스를 운전하셨다.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만 하시다 2년 전 추어탕 식당을 시작하셨는데 장사가 되지 않아 몇달 전 가게를 내놓았다. 세살 아래인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남동생은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아는 선배가 하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도시의 여느 서민집의 아이들처럼 기우씨의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가장 크게 지배했던 것은 공부였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순한 기우씨는 ‘공부 잘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기우씨 생각에도 공부는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성적이 잘 나올 때는 서울대를 생각하기도 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 기우씨는 늘 학원을 다녔다. 초등학교 때 다닌 학원은 세 곳. 피아노, 미술, 주산. 피아노는 바이엘 상권까지 치고 그만두었고, 미술은 소질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곧 접었다. 주산학원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여 암산 2급, 주산 4급 자격증을 땄다.

중학교 때는 부모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새벽에 영어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6시부터 7시까지 하는 새벽반 수업을 듣고 등교했다. 고등학교 때는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는 밤늦게 종합반을 다녔다. 고3 때는 두달 동안 과외를 받은 적도 있다. 이런 생활이 딱히 힘들거나 불만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좋은 대학 가기 위해 다들 열심히 공부하니까.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던 기우씨이지만 ‘범생이’처럼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날라리’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락음악 듣고, 친구들이 담배 피우면 같이 피우고, 술 먹으면 같이 술 먹는 정도였다. 이 정도야 뭐 요즘에는 보통인데.

1995년 수능 점수에 맞춰 한양대 경영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기자나 PD가 되고 싶어 신문방송학과에 가려고도 했지만, 선배나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 보니 신문방송학과를 가야만 기자나 PD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서, 무난한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공권력을 무서워하던 대학신문 기자가…

'운동권' 학생이 될 생각은 정말로 전혀~ 없었다. 입학한 지 3일째 같은 과 동기 녀석이 신문사에 지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 신문사! 대학교에는 신문사가 있지!!’ 기우씨도 지원을 했다. 한때 대학신문사는 꽤 높은 경쟁률을 자랑했고, 시험에 떨어지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지만, 기우씨 때는 그렇지 않았다. 논술, 상식, 면접, 시험을 쳤지만 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여름방학 때까지는 수습학생기자로 단신 취재를 하러 다녔고, 2학기가 되자 정기자로 발령이 났다. 기우씨는 문화부를 맡게 됐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당시 화제가 됐던 '성담론'에도 관심을 보였던 기우씨라 문화부는 적격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회의, 취재, 기사 쓰기, 신문 조판, 세미나까지. 세미나 시간에 공부했던 책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철학의 이해>,<함께 가보는 철학사 여행> 등등. 고등학교 때는 전혀 접해보지 못한 어쩌면 충격적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기우씨는 “별 느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첫 시위를 나가서도 분노하기보다는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만 안고 돌아왔다. “5·18 집회였는데 어쩌다 늦게 갔어요.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바로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은 누워 시위하는 학생들의 사지를 끌고 닭장차에 잡아넣는데…. ‘공권력은 왜 저러나’ 하는 생각보다는 ‘진짜 장난이 아니다, 공권력이라는 게 진짜 무섭구나’…. 그래서 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다 돌아왔어요.” 기우씨는 민망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다.

한총련 '전사'로 거듭나다

1996년 3월, 연세대 95학번 노수석 학생이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시위’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학교 신문사에 있던 기우씨는 학교 신문사 기자 2명이 명동성당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쫓아 뛰어갔다. 명동성당에 들어서는데 여느 집회장 분위기와 달랐다. 싸늘했다. 죽은 노수석 열사는 기우씨와 나이가 같았다. 11월23일로 생일도 같다. “마치 내가 죽은 느낌이었어요. ‘왜 사람이 죽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기우씨 안에 지금까지 나서지 않고 웅크리고 있던 또다른 기우씨가 일어섰다. 기우씨는 울었다. 그리고 성을 냈다. 기우씨는 시신탈취를 막기 위한 사수대로 나섰다. 밤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전경들과 싸웠다. 명동성당을 지키던 학교 선배가 “취재는 잘 하고 있냐”고 물었다. ‘아 내가 여기에 취재를 하러 왔었나?’

그해 여름, 기우씨를 '운동권'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된 연대 항쟁이 일어났다. 기우씨는 한양대 신문사 사람들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서울동부지역총련 깃발을 따라 움직였다. 연세대에서 열리는 통일대축전은 정부에 의해 불법 딱지를 받았고, 원천봉쇄 됐다. 연대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시내 대학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기우씨가 속한 서울동부지역총련은 건대, 이대, 홍대 등을 돌며 시위를 했다. 여학생과 한총련 대의원을 제외한 남학생들에게는 파이프가 주어졌다. “가방 다 비워!” 새벽4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책이나 노트 등을 들어낸 빈 가방은 화염병으로 채워졌다. 화염병이 든 배낭을 지고 홍대에서 연대로 달렸다. 그런데 이때 달리던 기우씨의 머리에 남아 있던 한 줌의 고민. '오마이갓, 내 베네통 티셔츠와 닉스 청바지, 다 버린다' 기우씨는 그래도 달렸다.

연대는 전쟁터였고, 기우씨는 출정한 병사였다. 사수대가 되어 잠이 들 때도 파이프를 안고 잤다. 낮에는 하늘에서 헬기가 최루액이 섞인 비를 뿌려댔다. 몸에 수포가 생기는 것은 부상도 아니었다. 머리가 깨진 동지들이 부지기수. 밤에는 야광탄을 쏴 올려 움직이지도, 빠져나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

이 전쟁터에서 기우씨는 “'NL'이라는 마인드가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이 주장했던 것은 연방제 등의 4대 요구안.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정부에서는 이 난리를 치단 말인가. 싸움은 처음에는 기우씨의 가슴을 울리고, 그 다음에는 몸을 움직인 뒤, 마지막으로 머리를 때렸다.


"운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바뀐다…난 그렇게 살겠다"

대회가 끝난 뒤 요행으로 기우씨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방이고 뭐고 다 놔두고 무조건 뛰어!” 이른 아침 또다른 명령이 떨어지자 기우씨는 뛰었다. 다음날,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던 1,0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연대 항쟁은 끝이 났다. 연대 항쟁으로 학생운동은 많은 피해를 봤다. 그러나 기우씨는 이 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운동권이 됐다.

학교로 돌아온 기우씨는 여전히 신문사 기자로 활동했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이전에도 문제가 없는 게 문제일 만큼 신문사 활동을 잘 따라가던 기우씨였다. 3학년이 되자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게 됐다. 연대 항쟁에서 미디어의 위력을 봤던 기우씨였다. 정치적인 문제를 대학 사회와 연결하는 고리로서 학교신문사라는 공간을 잘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서울동부지부 간사, 집행국장, 중앙집행부의 선전 연대 담당을 맡으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2001년에는 총학생회에서 자주교류사업을 맡아 대학간 남북 교류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공을 많이 기울이기도 했다. 비록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활동을 하는 동안 학과 공부와는 더욱 멀어지기 시작했다. 군 입대도 미뤘다.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이런 문제와는 이미 결별을 했다. “의식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바뀐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기우씨의 결론은 간단했다.

당연히 대구에 계신 부모님과 갈등이 생겼다. 서울로 유학까지 간 공부 잘했던 장남이었다. 기우씨가 대기업에 취직해 예쁜 색시를 만나, 아들딸 낳아 오순도순 사는 그림을 그리는 부모님들이시다. 해결난망이다. 이 문제는 가슴으로 울 수밖에,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슴 한 구석은 서늘하고 아렸지만, 기우씨는 독해지기로 했다.

"정파? 어휴 두드러기 솟아"

2002년 총학생회 선거에서 기우씨네는 졌다. '비운동권'이 당선됐다. 기우씨에게 한총련 대중화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이 투쟁공동체가 되면서 학생들과 괴리가 생겼다. 시대가 변했지만 학생운동 본연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 80년대처럼 선봉대가 되어 전체 운동을 끌고 나가지 않더라도 지금은 사회로 나아가기 전 단계인 대학에서 건전한 공동체의식을 심어주는 최소한 그러한 역할이라도 해야 되는데…’

기우씨는 패배한 총학생회 선거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도박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과 아무런 만남도 없이, 고리도 없이 공중전만 펼쳤다. 이러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생각을 했다니.’

그런데 이러한 반성이 그만 '편 가르기'가 됐다. 한총련에 비판적이냐? 그렇지 않으냐? 아직은 어린 학생인지라 누구와 친하면 한총련 지지파, 누구와 술을 마시면 한총련 비판세력 등등…. 앗! 이건 어른들의 정치판에서 많이 본 건데!

이런 문제로 “최소한의 인간관계마저 깨져버리는 경험을 하면서 상처를 많이 입었다”는 기우씨. 그래서 기우씨는 정파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된단다.

“'NL' 대 'PD' 논쟁은 90년대 중반에 일단락 됐다. 더이상 유의미하지 않다.지금은 그런 걸 얘기할 시기가 아니다.” 기우씨는 흔히 우리(?)끼리 쓰는 ‘주사파’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념적으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기우씨는 묻는다. “주사파라고 하는데 주사파의 정의가 뭐냐? 주체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냐?”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논쟁이 일단락됐다고 하지만 무엇이 정리된 것인지 혹시 더이상 논쟁을 진행할 힘이 없어서 끝난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기우씨는 이미 90년대 중반에 'NL'과 'PD' 논쟁이 일단락되었고, 통일운동을 하는 통일운동을 열심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하나의 공간으로 모였을 때는 이것이 여전히 문제가 된다.

지난해 연말, 민주노동당에서는 비정규차별 철폐투쟁과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이 격돌(?)했다. 각 진영의 정세 판단부터 달랐다. 기우씨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 문제는 낮은 단계의 합의, 즉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고, 행동에 대한 합의를 봐야 된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상당히 곤란해 하는 기우씨. 곁에 있던 기우씨의 후배뻘 되는 매일노동뉴스 기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저는 매일노동뉴스 와서 놀랬던 게 있어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한번도 이런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기우씨도 문득 생각난 듯이 뒤늦게 한마디 한다. “'좌파'라고 불리는 친구들과 거의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네요.”


"앙꼬 든 빵을 북녁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어"

뒤늦게 군대를 다녀와 올 6월 제대를 한 기우씨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기우씨가 하는 일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의 특별사업인 북녘 어린이 영양빵 사업이다.

남북 합작으로 평양 대동강 근처에 빵공장을 만들었다. 북에서 공장을 만들었고, 남에서 기계 설비와 제빵 재료를 공급한다. 올 4월 공장이 가동돼 매일 빵 3,000개를 생산해서 북녘 어린이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남에서는 제빵 재료를 분기별로 보내야 하는데, 후원회원들의 모금을 통해서 확보하고 있다. 현재 후원회원은 6,000여명. 기우씨는 후원회원을 확보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기우씨는 현재 일에 대만족이다.“사실 통일운동을 하면서 아픔이 있었어요. 정부에서는 연방제를 걸고 넘어졌고, 통일운동은 뭇매를 맞고 고립이 됐죠. 이 점도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통일운동의 저변을 넓히는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빵공장 일을 하면서는 이런 사업을 통해서 통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통일운동의 저변을 넓힐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기우씨는 지금 만나는 후원회원 한분 한분이 너무 소중하다. 퇴직한 교감 선생님께서 통일운동보다는 제자가 분주한 게 기특하고 안쓰러워서 후원회비를 내주셔도 기우씨는 우선은 소중하고 고마운 이 끈을 간직하려 한다. 언젠가는 연대 차원으로 후원회비를 내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다른 이야기에는 무척이나 조심스럽던 기우씨가 빵공장 대목에 이르자 활기가 생긴다. 후원금을 더많이 모아 더많은 어린이들에게 영양빵을 제공하고, 또 더 맛있는 영양빵을 공급하고 싶은 게 요즘 기우씨의 최고 관심사다. 아직은 후원금이 얼마 되지 않아 영양빵에 앙꼬가 없단다. 단팥빵처럼 생겼는데 속에 단팥이나 크림 같은 '속'이 없다. 그게 기우씨는 속이 상하다. 앙꼬가 든 빵을 먹으며 웃을 북녁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가에 어리는 게 옆에서 보기에도 정말 감동적이다. 인터뷰를 하다 말고 북녘 어린이 영양빵 사업의 후원회원이 되기로 약속했다. 확실히 기우씨는 '선수'다.


기우씨는 조심스럽다. 말도 행동도, 인터뷰를 하기 위해 두번째 만났을 때 점심식사 메뉴를 고르기 위해 기우씨는 5분 동안 두번이나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뭐든지 잘 먹는다는 얘기를 강조하자 제일 허름해 보이는 찌개 파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기우씨가 좋아하는 음식은 찌개와 피자다. 찌개 종류는 날마다 먹는 것이니 오늘은 피자를 먹자고 해도 좋았을 것을. 지난번 인터뷰 때 못다 한 질문을 하자 '좌파 똘똘공주' 김하늬씨와 보조를 맞추려는지 그 친구는 어떻게 답했는지 물어 본다. 자신의 답이 함께 운동하는 동지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혹시 해가 되지는 않을까? 배려는 기우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자신보다는 늘 동지, 조직(?)이 우선인 기우씨에게 선배, 조직은 뭘 해주고 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려 하는 게 운동이라고 하지만 20대 젊은날을 고스란히 바치고 통일운동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기우씨다.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가끔은 기우씨도 불안하다.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사오정’이라고 하면서 불안해 하는데, 여기 운동판도 마찬가지 같기도 해요. 적합한 일과 그에 맞는 전문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도태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스스로가 떠나야 할 것 같아요.”

기우씨도 통일 문제나 교류 협력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려고 생각은 하지만 쉽지가 않다. 당장 내일만 해도 아펙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야 한다. 일에 쫓기고, 시위에 쫓기고…. 부디 바란다. 기우씨가 퇴근길에 “또 하루 멀어져간다/내 뿜는 담배 연기처럼/’이라는 노래 가사에 동감하지 않기를.

황기우씨 10문10답
(1)이해
(2)존중
(3)입장의 동일함

8. 가장 친한 ‘친구’와 ‘동지’가 동일 인물인가?   아니오.

9. 내가 '좌파'가 되고 싶지 않은 이유 세 가지(아무쪼록 용어에 얽매이지 마시고 행간을 읽어주시기를).
(1) 나는 사회적 좌파입니다.
(2)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3) 너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용어에 얽매었죠? ^^

10. 운동을 해서 좋은 점 세 가지, 좋지 않은 점 세 가지.
좋은 점 : (1) 거의 모든 면에서 떳떳하다.
               (2)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3) 나 자신을 자꾸 사랑해주고 싶다.

좋지 않은 점 : (1) 부모님한테 지금은 죄송하다.
                        (2) 좀 바쁘다.
                        (3) 나 자신이 가끔 미워진다.
한달 수입 40만원…후원금 내고 싶은 곳 많은데 민주노동당 당비 1만원도 버거워
기우씨는 아침7시쯤 일어난다. 술 때문에 늦잠을 잘 때도 가끔 있지만, 출근하기 전 한시간은 책을 보려고 노력한다. 요즘 보는 책은 여성학 관련한 책이다. <아주 작은 차이>, <남성과 여성이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이유> 등이 그것이다. 여성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기우씨. 여성 동지들의 문제는 곧 운동권의 문제이고, 결혼을 하게 되면 곧 자기 일이 되기 때문이란다.


9시 출근을 해서는 북녘 어린이 영양빵 사업의 후원회원 관리를 열심히 한다. 회의하고 후원회원에게 연락 몇번 하고 나면 오전 나절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 점심은 사무실에서 해 먹는다. 사 먹는 것보다는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기우씨의 한달 수입은 40만원. 용산 사는 후배에게 얹혀 사는 처지라, 이 돈에서 방값 10만원을 덜어내 후배에게 준다. 그리고 교통비와 핸드폰 요금으로 10만원 가량이 나간다. 내야 할 각종 후원금이 많지만 겨우 민주노동당 당비 1만원만 내고 있는 실정이다.


저녁이면 학교 선후배들이나 사무실 사람들과 밥을 먹고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신다. 택시를 타면 생계에 심각한 타격이 오므로 지하철이 끊어지기 전에 귀가를 한다. 저녁에 약속 있는 날이 4번 정도.


취미 생활은 영화보기, 음악 듣기, 놀이공원 가기. 영화는 <레인맨>을 감동적으로 봤다고, 음악은 <건즈 앤 로지스>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만 보면 '좌파 처녀'와 '통일운동 총각'은 취미가 같은 셈이다.

<알림> 필자 사정으로 <우리이웃> 연재가 2주간 쉽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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