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성은 김, 이름은 하늬. 외양 또한 범상치 않다. 귀 덮개가 있는 앙증맞은 털실모자를 쓴 데다 발걸음은 경쾌하다 못해 댄스음악에 맞춰 스탭을 밟는 듯하다.

민주노동자연대 사무국장인 김하늬씨(29)는 인터뷰 장소인 찻집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우리이웃> 기사를 전부 다 읽어 봤는데, 저는 그분들과 달리 엽기, 발랄, 코믹한 사람인데요?”라고 말문을 연 뒤, 무려 2시간여 동안 자신의 과거-현재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음하핫, 기필코 나의 엽기, 발랄, 코믹함을 증명해 보이고 말리라.’ 이런 자세다.


“아빠를 신고해야 되는 건 아닐까?”

‘하늬’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늬씨의 아버지 역시 보통 분이 아니실 것 같다. “맞아요. 우리 아빠가 좀 빨개요.” 어? 하늬씨의 아버지는 1945년생으로 전북 순창군에서 공직생활을 하셨다.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부면장(6급)으로 2000년경 퇴직하셨다.

하늬씨의 아버지는 집의 쌀을 퍼다 동네 가난한 또래 청년들에게 갖다줄 정도로 천성적으로 착한신 분이시고, 전북과 가까운 광주에서 일어난 5·18 항쟁을 가슴 한 구석에 담고 계셨다. 아버지의 책꽂이에는 <중국의 붉은 별>, <자본론>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하늬씨가 반공웅변대회 나가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으면 하늬씨의 아빠는 듣고 계시다가 “너 진짜로 그렇게 생각 하냐”고 물어보셨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지은 <이야기 해 주세요>라는 책을 사 주시기도 하셨다. 책의 내용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대다수가 알고 보면 친일파다, 4·3 제주항쟁과 5·18 광주항쟁 때 국민의 군대가 무고한 국민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 등등이었다. 이 책을 다 읽은 하늬씨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빠를 신고해야 되는 건 아닐까?’ ‘빨간’ 아빠와 달리 하늬씨는 국정교과서와 선생님 말씀을 신뢰하는 모범생이었다. 하늬씨는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학경시대회, 음악, 미술, 웅변, 무용, 육상 등 학교대항별 대회라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석권해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장한 어린이였다.

하늬씨가 태어나 자란 곳은 전북 순창군 인재면 쌍암리 빗바위마을로, 다섯가구가 사는 산골마을이다. 버스를 타려면 아랫마을까지 20여분을 걸어서 내려가야 했다. 산골소녀 하늬씨는 동네친구들과 산에 올라 칡 캐 먹고, 개구리 잡아 구워 먹고, 고무신에 흙 채워 트럭 놀이하며 놀았다.

중학교 시절도 워낙 시골이라 탈선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아 초등학교 때마냥 학교에서는 전교1등, 집에 돌아오면 개구쟁이 소년처럼 놀며 보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하늬씨는 아빠와 약간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있었으나 산골에서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한국판 '알프스소녀'였다.

 
생크림 케익과 삶은 옥수수

하늬씨는 수학과 과학이 겁나게 재미있고, 성적이 우수했던 관계로 전북과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신기한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외국가수와 영화배우 이름을 줄줄 외우고, 팝송까지 불러대는 게 아닌가. 하늬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는 영어책에만 있는 줄 알았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멋진 옷을 입고 기숙사로 생크림 케익과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을 사다 날랐다. 하늬씨의 어머니께서 가끔씩 기숙사에 들르실 때면 놓고가시는 건 삶은 옥수수와 찐 고구마였다.

하늬씨 가슴 속에 찍혀 있는 그림 한 점.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이시던 엄마가 기숙사에 들러 방청소를 해주시고는 삶은 옥수수를 3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채소가 담긴 보따리를 머리에 이시고는 학교 바깥으로 걸어나가시던 모습. 보슬비까지 왔다. 우산도 없으신데. ‘아빠는 빨갛기라도 하지만 엄마는 완존히 촌 아줌마… 에휴, 불쌍한 우리 엄마.’

문화적 충격에 학습적으로도 충격을 먹게 됐다. 아이들이 수학 <정석>을 다 배우고 들어 온 것이다. 하늬씨는 <정석>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1학년1학기 첫 시험을 쳤을 때 60명 중에 55등을 했다. “어~씨, 잘난 놈들 투성이네.” 잠깐 주눅이 늘기도 했지만 어디서나 즐길 것을 찾아내는 성격의 하늬씨인지라 금방 원상회복이 됐다. 학교수업시간은 재미있었다. 실험수업도 많았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돼 좋았다. 문제의 그 수학 <정석> 책도 5번을 풀었다.

2학년 2학기, 과기대 마지막 모의고사를 친 뒤, 선생님에게 “이제 됐다”는 말씀을 들었다. 과기대의 정식명칭은 한국과학기술원, 보통 카이스트라고 하는 그곳은 통상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선발한단다. 하늬씨도 고등학교 2학년말에 과기대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대학교 입학할 때가 만16살. 하늬씨의 산골동네에서는 신동 났다고 난리가 났다. 과기대 합격 발표를 듣고 시골집에 갔더니 평소 감정을 표현을 전혀 하시지 않는 할아버지께서 하늬씨를 업으시더니 마당을 둥둥 뛰어다니시는 게 아닌가.


신동, '운동권'의 총아가 되다

하늬씨는 과기대 '운동권' 학생이 된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확실히 '똘똘이과'다. 그리고 <우리이웃>을 정독하고 정답까지 준비해 왔다고 하지 않는가.

학생운동이 들불처럼 타오르던 80년대도 아니고, 운동하면 못 배겨나는 과기대에서 하늬씨가 운동권이 된 첫번째 이유. 그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입학도 하기 전에 과기대 '운동권' 선배에게 '찍힌' 것이다.

입학하기 전 선배들과 어울려 호프집에 갔는데 안주로 나온 감자튀김이 나왔다. 그리고 하늘같으신 선배께서 근엄한 목소리로 가로되, “이 감자튀김이 수입감자인 줄 알고 있냐?” “저 감자튀김 오늘 처음 먹어보는데요? 얌얌.” 이게 하늬씨의 답이었다. 근엄한 목소리의 선배는 운동권 학생이었고 맹랑해 보이는 신입생 하늬씨를 찍어 '포섭'하기로 했다. 제 아무리 천방지축이라도 '마수'에 걸리면 별 도리가 없다.

두번째 이유. 역시 과기대에 입학하기 전, 입학허가를 받아놓고 기숙사를 떠나 잠시 시골집에 머무르면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시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격하게 반응을 하시는 게 아닌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농산물 개방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 저…, 총 맞아 죽을 놈" 소리를 지르시고는 진짜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다. 다행히 곧 일어나기는 하셨다.

세번째 이유는 조금 오래됐다. 바로 ‘빨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어릴 때는 ‘아빠를 신고해야 되는 건 아닌가' 하며 부녀지간에 약간의 사상갈등도 있었지만 하늬씨도 서서히 물이 들었던 게다. 커가면서 아버지가 사주신 책, 아버지 책장에 꽃혀 있던 책들이 거짓말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리하여 만16세에 과기대에 입학한 신동은 ‘인간사랑’이라는 동아리에 '나포'돼 '운동권 처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하늬씨가 누구인가.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하늬씨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한총련에서 만든 책자 <새내기 1년 나기>, <껍데기를 벗고서> 이밖에 선배들이 직접 만든 학습자료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했다. 무슨 내용이든 반박할 내용을 생각하고 꼬투리를 잡아 따졌다. 더이상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만 받아들였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동아리 선배들께서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는지. 학교 특성 상 숙제도 많고 쪽지시험도 많은데 밤이면 밤마다 술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 도망갈 데도 없다. 술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던 차에 동아리방에서 임수경 언니(?)께서 평양축전에 참가했던 비디오를 보게 됐다. 한참 보고 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눈물을 펑펑 쏟고 있다. 하늬씨는 진짜 눈물이 한방울도 안 나왔다.


"왜 내눈에서는 눈물이 안 흐르지?"

‘나는 뭔가 다르구나!’라는 소외감. 그리고 ‘모든 문제가 반미와 통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하늬씨를 덥쳐 왔다. 방황이 시작됐다. 동아리방 출입은 소홀해졌고, 친구들과 만나 새벽까지 놀거나, 게임을 하며 '폐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낙천적인 성격의 하늬씨인지라 방황기간은 고작 두달로 끝났다. 이 와중에도 봄 농활에 참여하고 대동제 자원봉사를 했다.

봄농활에서 또다른 '운동권' 선배를 만나게 됐다. 그 선배는 교지를 만들고 있었다. 사상적(?) 방황을 하던 하늬씨는 교지 사무실을 들락날락 거리게 됐고, 이전 동아리와는 다른 분위기가 하늬씨를 이끌었다. 좀더 논리적이고, 사고방식도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것 같았다. 이래서 하늬씨는 ‘교지사람’이 됐다. 당시 과기대 교지는 두 명이 만들고 있던 터라 기자고 편집장이고 없었다. 학교에서는 이 두 명을 ‘교지사람’이라고 불렀고, 말하자면 이들이 과기대 내의 '좌파그룹'이었다. 이 그룹에서는 하늬씨가 보물단지였다. 하늬씨가 들어가기 전까지 멤버는 달랑 두 명. '재생산'을 걱정하던 때 1학년 하늬씨가 제발로 걸어 들어왔다. 선배들로서는 정말 '이게 웬떡'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늬씨가 가입하자 이미 학부 과정을 끝내고 석사 과정에 있던 80년대 학번 선배들까지 몰려 와서 하늬씨를 집중 교육시켰다. 완전히 과외다. 대학 올 때까지 과외는커녕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는 하늬씨인데. 하늬씨에게는 그때, 1학년 여름방학 시절이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선배 2명과 교지 사무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밥해 먹고 책 보고, 점심 먹고 토론하고, 저녁이면 학년이 더 높은 선배들이 찾아와 같이 밥먹고 얘기하고.

선배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학습을 한 하늬씨는 2학년이 되자 교지 편집장이 되었고, 3학년 봄부터는 그해말에 있을 총학생회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부총학생회장으로 입후보해 덜렁 당선이 돼버렸다. 과기대의 'NL' 진영은 50여명, '좌파' 진영은 하늬씨를 포함해도 10명이 되지 않았다. 워낙 운동권이 약세이고 대중운동 경험도 없어 과기대에서는 정파갈등이 별로 없었다. 모두 소수인지라 문제가 생기면 정파간의 입장을 떠나 공동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회관에 모이는 학생이 20여명이므로.

총학생회를 맡게 된 하늬씨는 “학내복지, 외부집회를 벗어나 학생들의 일상을 조직하자”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특정한 주제 주간을 정해 전시회, 토론, 초청 강연회, 퍼포먼스 등을 배치해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만화 주제 주간이라면 만화, 애니메이션 동아리와 함께 만화전시회,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하고, 관련된 토론회, 인디 작가들을 초청해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 학생들이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환경 등의 주제를 택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선후배들과는 틈틈이 노학연대 차원에서 노동절, 노동자대회에 참가했고, 조폐공사에서 파업을 했을 때는 아예 천막 농성장에 가서 살았는데,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단다.

공장 가서 확 뒤집어진 '빨간' 대학생

과기대 공부는 장난이 아닐 터. 얼렁뚱땅 해서는 졸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늬씨는 졸업을 했다. 비록 6년을 다녔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하늬씨 고향 산신령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인지 하늬씨가 학교 다니는 동안 학사경고제도가 차츰차츰 완화되어 학사경고를 3번을 받고도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또 5학년, 6학년 동안은 산업경영학이 재미있어 실제로 공부도 좀 했다. 산업경영학은 포드-테일러시스템 이래 자본주의의 총아 가운데 하나다. 하늬씨는 투지가 생겼다. 경영학 교과서에 <공산당선언>의 한 구절, “자본은 본질적으로 세계화를 추진하다”는 대목을 적어놓고는 교수님들과 붙었다.

이랬건저랬건 산업경영학이 전공이 됐고, 6학년을 끝으로 졸업을 한 하늬씨는 '중앙무대'에서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로 진출했다. 좌파학생운동단체인 “전국학생연대회의”와 “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스탭 역할을 2년 동안 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에 대한 하늬씨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노학연대투쟁이라는 것이 노동자들이 훨씬 더 투쟁 잘 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쫓아다니는 거잖아요? 자기 고민 없이 이미 깔려진 판에 가서 싸우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이 무렵 하늬씨 시골집에서는 “공부 잘 해도 소용없다”는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총학생회장이 돼 검찰에서 ‘귀댁의 자제는 한총련에’ 어쩌고저쩌고 해서 수배가 됐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내도 끄덕도 않으시던 ‘빨간’ 아버지께서 한숨을 쉬기 시작하신 것이다. 아무리 학생운동을 해도 과기대 출신이다. 못해도 박사가 될 줄 알았는데 딸년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공부는커녕 취업할 생각조차 않고 있으니.

하늬씨 역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기도 했다. 달리 생각해보면 공부라는 게 대학원에서만 하는 건 아니다. 취직을 할 생각도 해 봤다. 그런데 ‘나만큼 운동하기 좋은 조건이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과외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세상 경험이 많은 선배들은 얘기한다. 하루이틀 운동하고 말 것도 아닌데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게 더 크게 기여하는 것 아니겠냐고. 하늬씨의 답은 ‘운동을 좀더 하고 난 뒤 사회에서 자리잡아도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겸 2002년 여름, 하늬씨는 아산에 있는 작은 공장에 취업을 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만 봐 왔는데 일상적인 노동자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확 깼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일이 힘든 데다, 힘든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은 서로 다툼이 잦았고, 사장은 17살짜리 여자아이를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하는데 누구도 그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노동 현안 중심의 노동운동은 이 작은 사업장에서, 하늬씨 곁에 앉아 일하는 구체적인 한 노동자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됐다. ‘이 작은 사업장에서 머리 박고 싸워 해결을 한들 옆 공장의 문제는? 그렇다면 개별 사업장의 현안 문제를 넘어서 노동자 전반의 보편적인 문제를 갖고 주체적인 노동운동을 해야 되지 않을까? 또 노동자들이 임단협 투쟁 할 때는 노동자지만, 작업복을 벗으면 시민으로 돌아가 버리는 노동자들의 일상을 조직해야 노동운동의 발전이 있지 않을까?’

하늬씨가 고민 고민 궁리를 하고 있는데, 아는 선배를 통해 민주노동자연대라는 노동운동단체에서 일을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민주노동자연대도 하늬씨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이 맞아 떨어진다고 판단이 되자, 민주노동자연대에서 어떤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지 타진을 해보지도 않고, 보수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만 출근부터 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수(?) 인 것 같다고 웃는 하늬씨. 조금 버티는 척이라도 할 걸.

“딱 2시간만 우울해 하자”

과기대가 보장(?)하는 우수한 머리에, 발랄한 성격에, 웬만한 남자보다 강한 체력(?)에, 각종 대회를 휩쓸 정도로 음악, 미술, 무용, 체육 아무튼 못하는 게 없는 하늬씨다. 집안에서는 신동, 학교에서는 선배들에게 보물단지처럼 대접받으며 지내왔다. 모르는 사람들도 과기대 하면 다 알아준다. 열등감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게 문제다. 열등감이 없으니 질투, 시기, 결핍, 자랑 등의 감정이 엷고, 그러니 타인과 감정교류가 잘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곁에 있는 동지가 어떤 문제로 심각하게 괴로워하고 있으면 하늬씨는 이게 이해는 되지만 더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지난일에는 미련을 갖지 말자는 게 하늬씨의 신조다.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몸과 마음도 따라간다. 그래서 "자, 우리 딱 2시간만 우울해 하고, 일하자!"고 하는데, 이게 사람들에게는 안 먹힌다.

또 카이스트를 나와 운동을 한다고 하면 기대를 많이 한다. 이게 또 부담이다. 사소하지만 이런 문제도 생긴다. 똑같은 일을 두 사람이 했는데 하늬씨가 한 것을 보고는 “음 과기대 출신이라 역시 다르군”, 이렇게 되면 서로서로 피곤해진다. 하늬씨에게는 이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예뻐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 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마음먹는다는 게 가슴 한켠에 서늘함으로 와닿지도 않는다.

어쨌든 하늬씨는 씩씩하다. 실제 힘도 세다. 남자 두 명이 끙끙대며 옮기는 무거운 책장을 혼자서 슥 밀어내는 괴력의 소유자인 하늬씨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 과기대 체육학과 나왔지?”

최근 하늬씨가 가장 공을 들이는 사업은 영등포역 공공성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활동이다. 철도노조, 장애인이동권연대,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영등포 지역위원회, 영등포 산업선교회가 함께 하고 있다. 민자역사인 영등포역은 롯데백화점과 철도공사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시민들의 통행이나 장애인의 이동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 민주노동자연대 회원인 철도노조 조합원이 실태조사를 한 것을 바탕으로 롯데백화점과 철도공사에 대한 요구안을 만들어 공공성을 확보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영등포구청, 롯데백화점, 철도 공사 항의방문에 일주일마다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영등포역이라면 상업시설이 들어서더라도 탁아시설이나, 농수산물 장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역 주민들에게 얘기해서 공감대를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이 사업이 ‘삽질’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하늬씨는 걱정하지 않는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늬씨의 좌우명은 요즘 텔레비전만 켜면 등장하는 노홍철과 비슷하다. “재미없어? 그럼 왜 해?”

하늬씨는 엽기, 발랄, 코믹 해 보이기를 원한다. 이 코드들은 하늬씨와 잘 어울린다. 생김새도 그렇다. 하지만 이 코드들이 하늬씨의 정체성은 아니다. 어쩌면 이 코드들은 하늬씨에게 있어 '갑옷'인지도 모른다. 운동은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늬씨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하늬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코드는 따로 있다. '성실', '근면', '동정', '양보', '명석', '튼튼' 그리고 '빨강색'이다.


2002년 겨울, 하늬씨는 민주노동자연대 일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3년 동안 ‘따까리’ 노릇 하면서 열심히 '짱'을 보자. 그리고 난 다음 10년 동안 할 일을 결정하자.” 이제 그 시한이 한달 남았다. 운동은 계속할 것이다. “착한 사람들이 운동을 하게 되는데,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착한 사람들은 못 배겨나는 게 '운동판'인 것 같다.” 이래서 슬프지만 하늬씨는 신조대로 딱 2시간만 우울해 하고 운동을 할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늬씨는 목하 고민 중이다. “고만고만하게 따라 갈 것인가? 좀더 대차게 나갈 것인가?” ‘고만고만 하게 따라가다’ 보면 하늬씨의 정체성은 엽기, 발랄, 코믹이 될 것이다. 발전 없는 나날이 계속되면 수재는 '범재'가 될 것이다. 하향평준화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운동일수록 더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빛나는 사람은 더 빛이 나도록 해 주어야 하고, 빛이 안 나는 사람은 그 빛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내줘야 한다. 그게 운동이다.

다이아몬드를 우리는 어디에 쓰고 있는 것일까. 하늬씨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힘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일까. 노동자의 일상을 조직하겠다는 하늬씨가 ‘너바나’의 음악을 듣는다. 눈물 대신이다. 소시민을 만드는 운동은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김하늬씨 10문10답>

4. 신령님이 개인과 관련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 백살까지만 건강하게 살게 해주세요!


5. 지금 이 순간 천만 원이 생긴다면?
에구, 요즘 세상에 천만원 갖고 뭘 할 수 있지? 참 애매한 금액이로군요. ^^;;;
노트북을 하나 사고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한다.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두고 쓴다.


6. 연애 경험은 몇번?
4번. 그중 한번은 연애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는 애매한 관계를 잠깐 유지한 것일 뿐이어서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7. 결혼을 하게 된다면 배우자에게 바라는 핵심적인 세 가지만.
1) 가부장적·권위적인 사람은 절대로 NO!
2) 개방적인 사고방식, 자유롭고 상상력 풍부한 사람이었으면…. 가능하면 운동하는 사람이었으면….
3) 서로의 생활 방식에 대해 최대한 자유롭게 보장할 것.
근데….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려고 할까요? ^^;;;


8. 가장 친한 ‘친구’와 ‘동지’가 동일 인물인가?
네. 운동하면서 만난 동지이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된, 동갑내기 여자친구.


9. 내가 'NL'이 되고 싶지 않은 이유 세 가지만(아무쪼록 용어에 얽매이지 말고 행간을 읽어주시기를).
특별히 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구요…. ^^;;
그리고 특별히 좌파가 잘 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구요…. ^^;;;
1) 아무래도 사상적(혹은 노선적) 차이가 가장 크겠죠? 구체적 사업이나 활동과 관련해서는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나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꼭 'NL'이 되어야 가능한 것은 아니고 함께 연대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2) 봉건적, 위계적 질서가 강하다는 느낌…. 학생 때 한총련 출범식에서 보여줬던 의장 옹립식, 학생회장에 대한 ‘충성’에 가까울 정도의 감정들…. 특히 봉건적 여성관. 다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NL' 활동가들에게서 많이 느꼈던….


3) 내가 'NL'이 되어야 한다면, 나 혼자 'NL'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활동하는 공간 자체를 그렇게 변화시켜 가겠다. 즉, 굳이 'NL'이 된다기보다는…. 내 사상적 근간이나 활동 내용 및 방식이 틀렸다거나 바꿔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함께 바꿔나가야겠다는….


10. 운동을 해서 좋은 점 세 가지, 좋지 않은 점 세 3가지.
좋은 점
1) 내 가치관과 하는 일의 충돌이 가장 적은 일이 아닐까?
2) 감동이 크다. 기쁜 것도 많이 기쁘고, 분노스러운 것도 많이 분노스럽고, 성취감도 크고 패배감도 크고….
3) 자유롭다.


좋지 않은 점
1) 가난해서 때로 불편하다. 천원을 갖고 전철 패스를 사야 하나 우유 하나를 사먹어야 하나를 갈등해야 할 때. ^^
2) 부모님과 가족들의 쓸데없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한다는 점.
3) 일하는 시간이 매우 불규칙하다.
하늬씨의 수입과 지출
한달 55만원 수입…3년 동안 모은 돈 250만원
한달 수입은 55만원. 민주노동자 연대에서 한달에 30만원을 받는다. 과외를 해서 25만원을 더 번다.


지출은 교통비와 핸드폰 요금으로 10만원이 나간다. 민주노동당 당비 1만원, 민주노동자연대 회비 5천원, 노들 장애인야학 후원회비, 햇살보금자리(노숙인쉼터) 후원회비 5천원씩을 낸다. 이외 부정기적으로 후원회비를 낸다. 수입 55만원의 10%를 연대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쓴다는 생각에서다.


엄마 화장품을 사 드린다거나, 집에 음료수를 사간다고 한달에 5만원 정도를 쓴다. 이외 남는 돈이 밥값과 용돈이 된다. 술은 먹지 않기 때문에 술값은 들지 않는다. 주거비는 결혼하지 않은 오빠와 함께 살고 있어 들지 않는다.


한달 55만원으로 생활하면서 3년 동안 모은 돈이 250만원. 가끔 홈페이지 제작이나 편집일을 해서 가외로 수입이 생긴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모을 수 있었다.

25일자로 <후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자원봉사자 황기우씨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