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임이든 ‘패’를 먼저 내보이는 건 금물이다. 상대에게 수를 미리 읽히는 건 자신의 전술 구사에도 제약이 될 수밖에 없다. 협상도 그렇다. ‘패’를 먼저 오픈하는 것은 무장해제나 다름없고, 조직 내부적으로도 ‘협상의 마지노선’을 천명한 것이니 그 이상을 따내지 못하는 순간 ‘밑져도 본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본 협상이 시작되기 전 ‘꺼낼 수 있는’ 패가 뭔지를 판단해서 공개하는 순간, 상대도 협상에서의 자신이 구사할 전술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전 유리한 고지 선점’이 될 수도 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9일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에서 꺼낸 ‘패’는 일종의 배수진이다. 그리고 총대를 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소 민감할 수도 있지만 이 위원장은 “비정규직 ‘확산’이라는 독소조항만 제거된다면 법안 제·개정의 시급성을 따져야 한다”, “권리보장 부분은 절충선을 찾을 수 있을 것”, “노동계 내부 문제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부분은 내가 총대를 메겠다”, “합의가 안 된다면 논의를 존중해서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비정규 협상 시한과 합의가능 내용, 정치적 판단, 미합의시 처리방안까지 아우르는 발언으로, 바로 다음날인 10일부터 진행되는 비정규 협상에서 내놓을 한국노총의 ‘패’를 공식화한 셈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최근 노사정위 복귀 등을 주장하며 공식 행사 불참까지도 강행한 몇몇 산별연맹 문제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 한국노총 내부가 조금 혼란스럽다. 노사정위 복귀냐 아니냐 등 논란이 많다.
“우리가 김대환 장관 퇴진을 내걸고 투쟁한 이후 변한 게 없다.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정부 자세도 노조에 냉소적이다. 반노동정책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위원회와 노사정위에서 탈퇴를 했는데, 조건의 변화 없이 복귀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노동운동이 현장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결국 현장으로부터 불신 받는다면 이는 한국노총의 손실이다.”

- 그렇지만 노사정위 ‘특위’에는 복귀하는 것으로 정리하지 않았나.
“꽤 많은 사람들이 노사정위 복귀를 얘기하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현안을 감안할 때, 활용해야 할 특위는 있다.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예산과 구조조정 등을 정부에 다 맡길 수 없다. 시급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해 특위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회의나 상무위원회에는 복귀할 수 없다.”

노사정회의 불참, 특위는 참석

- 본회의는 안 가고 특위만 간다는 것인데, 일종의 절충안인가.
“특위는 노사정위 안에 설치돼 있지만 회의는 노사정위 밖에서 열리기도 한다. (노사정위에 여전히 불참하고 있는) 지금도 당사자들은 현안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제 아침에도 공공 노사정 모임이 있었다. 기획예산처, 재경부 등에서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분들이 (노동계가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노동부를 고려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특위’ 명분을 빌리면 현실적으로 노사정이 만나는데 유리하다.”

- 어차피 특위 논의 결과는 본회의를 거쳐 최종 확정되는데, 본회의와 특위를 분리해서 판단하는 건 이해가 잘 안 된다.
“7일 중앙위원회에서 노사정위 본회의에는 안 간다고 했더니 반발이 컸다. 한국노총 지도부가 ‘하나’가 안 되더라. 한국노총에서 이런 모습 보이는 것도 처음이다. 반발이 있다는 이유로 조건이 변한 것이 없는데 복귀하자고 하면 현장에서 봤을 때 한국노총은 또 망가진다. 다만, 시급한 현안을 다루기 위해 특위에는 참석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현장이 더 잘 안다. 현장은 이를 노사정위 복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 ‘적전분열’이라는 지적까지 있을 정도다. 내부 통합력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어떤 중앙위원은 노사정위 복귀를 주장하는 산별에 대해 ‘생각이 없는 건지, 정부나 노사정위가 로비한 것인지’ 라고까지 말하더라. 이유야 어찌됐든 한국노총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대정부 관계에서 한국노총이 잃을 게 더 많다. (장관 퇴진 요구가 관철되기까지) 길어야 두 달이라고 본다. (산별) 내부 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면 안 된다. (나더러) 독선이라고 비판하는데, 독선은 제의를 묵살했을 때 할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사전에 제의 한번 없이 노총 행사 불참 결정을 했다. 서로들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 올바른 수순에 의해 (장관 퇴진 등이) 해결되면 지금의 이 모습은 하나의 좋은 학습효과를 내올 것이다.”


투쟁은 징검다리


- 하지만 ‘장관퇴진’ 구호를 내건 이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 변한 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가 퇴진을 내걸고 싸우지 않았다면 김대환 장관이 하자는 대로 다 됐을 것이다. 비정규법이나 로드맵도 강행처리 됐을 것이고. 하지만 우리의 투쟁 과정에서 장관은 청와대, 총리실, 여당 쪽에서도 신뢰를 잃었다고 본다. 김대환식 노동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김대환 장관이 강행처리 얘기를 해도 언론에만 나왔지만 추진이 안 된다. 결국 김대환 장관의 정책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낸 효과가 크다고 본다. ‘예방’ 차원의 투쟁으로 의미가 있었다. 투쟁해서 뭘 얻었느냐는 얘기는 투쟁하지 말자는 말로 이어진다. 투쟁은 징검다리다. 성과가 없다고 투쟁하지 않으면 내를 건널 수 없다. 관료들이 투쟁을 의식해서 정책을 만들도록 하는 것도 성과다.”

- 장관퇴진 요구의 핵심은 현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대통령은 악화된 노정관계의 책임이 노동계에 있다고 한다.
“언제 한번 노동계 얘기 제대로 들어봤냐고 묻고 싶다. 노동장관 얘기만 듣지 않았나. 이 정권의 문제는 노조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선입견이 있는 상황에서 시각 교정이 쉽지 않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격이다. 노동문제 반쪽 전문가가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것이 이 정권의 가장 큰 문제다.”

- 앞으로 정부와의 관계는 어떻게 가져갈 생각인가. 한국노총은 11월 협상에서 정부가 빠질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한국 노사관계 패턴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압축성장기 정부가 노사관계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정부가 말하는 2만불 시대를 가기 위해선 전제돼야 할 게 두 가지다. 우선 노동뿐 아니라 모든 부분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과, 정부는 빠진 채로 노·사 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방안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선진국들을 보면 제도, 정책 입안과정이 당사자 중심이다.”

- 그동안 노사관계가 노정관계로 치환돼 있었다는 얘기인가.
“노사정을 함께 만나면 사는 소멸된다. 정 뒤에 가려져 있다. 당사자에 맡기는 것이 합의도출이든, 합의사항 집행이든,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부는 자기 권력이나 일자리 축소를 우려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정부는 지원, 서비스 기능을 하면 되고, 노사관계 틀이 구축되면 정부의 위상도 제고될 것이다. 이번 노사 협상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노사가 100% 요구 관철은 아니더라도 협상의 물꼬를 트는 측면, 또한 비정규직 보호와 함께 바로 이어 로드맵 논의까지도 가져갈 수 있다는 데 있다.”

비정규보호입법 시급하다

- 내일(10일)부터 비정규 협상이 재개된다. 이번 협상의 목표는 뭔가.
“협상은 한발씩 양보 아닌가. 합의도 가능하다고 본다. (비정규직 남용 가능성을 담았던) 독소조항은 4월 협상에서 많이 제거됐다. 남은 건 비정규 권리보장 관련이다. 100%는 안 되더라도 절충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 입법은 시급하다.”

- 4월 협상결과가 최소한의 기준이 된다는 말인가.
“사용자단체는 대화에 응하려 하지도 않았다. 여당쪽 만났을 때 이번 협상 성사를 촉구했다. 사용자쪽은 4월 협상에서 의견접근된 독소조항 삭제 등을 다시 꺼낼 것이다. 협상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4월에 의견접근된 부분은 인정하고 얘길 해야 한다.”

- 이법 협상이 갖는 의의는 뭐라고 생각하나.
“시급하게는 합의를 통한 비정규법 연내 국회 처리다. 만약 합의가 되면 노사관계는 대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갈 수 있다. 이는 또한 정부 없이 노·사 당사자들이 처음으로 비정규법처럼 중요한 내용을 놓고 논의를 하는 것인 만큼 노사관계 틀을 새롭게 만들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 중요한 기회다.”

- 지난 4월 협상 때 결실을 맺지 못했던 데에 정부 책임이 크다고 보기 때문인가.
“만약 4월 협상 때 정부가 빠졌으면 노사간 의견접근된 부분에 대해 후속작업을 해 결실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오만하게 굴었다. 정부 법안을 관철시키려는 의도만 너무 강했다. 당시 정부 법안은 단병호 의원, 배일도 의원이 낸 안과 함께 3가지 법안 중 하나였고, 협상을 위한 발제문 정도였는데, 정부는 그걸 ‘기준’이라고 보는 착각을 했다. 정부 빠지고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 한국 노사관계 다 망친다. 노사가 좀더 흉금 터놓고 양보하고 기회비용 줄이는데 전혀 도움 안 됐다고 본다.”

- 노·사 당사자들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노동계 내부 공조문제도 중요하다.
“일부 산별대표자들은 공조를 끝내자는 얘기도 한다. 하지만 양대노총이 경쟁관계에 있다는 이유에서인데, 그럼 보자. 공조 안했을 때 한국노총이 발전했나? 정체했다. 오히려 퇴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조(연대)하고 나니 조직이탈이 없다. 공조해서 잃은 게 뭐가 있나.”

- 비정규법안 처리 시한에 대한 입장은.
“반드시 이번 정기국회에서 돼야 한다. 법안도 없는 상태에서 비정규직 규모 줄어들 리가 없다. 올 4월에 법안을 만들었다면 올해 늘었다고 하는 29만명(비정규노동센터 추산, 노동부 9만명)은 비정규직이 아닐 수 있다. 기존의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됐을 것이다.”

- 만약 합의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비정규직 ‘확산’이라는 독소조항을 없앤다면 권리보장 부분은 법안 제·개정의 시급성을 감안해서 유연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합의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합의가 안 된다고 해서 모든 걸 무(無)로 돌릴 수는 없다. 논의 내용을 존중해서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노사간 첫 협상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미래 노사관계의 새 틀을 짠다는 점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서로 슬기롭게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합의 안 된다고, 모든 걸 무(無)로 돌릴 수 없어

- 막판 결단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양대노총 모두 지도부의 입장과 다른 의견그룹들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충분히 협의하겠다. 민주노총이 도저히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 고려를 해보겠다. 그러나 양대노총이 합의할 수 있는 안이라고 판단되는데 내부 조직 문제 때문에 도장을 찍기 힘들다면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총대를 매겠다.”

- 오늘(9일) 노동장관은 로드맵을 두고 노사정이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명분 쌓기로 가끔 나와서 노사정 대화를 하자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 로드맵도 신뢰가 있어야 대화를 할 텐데, 정부는 대화할 자세가 안 돼 있다. 정작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인 양대 노총에 대화를 제의해야 하는데, 지금은 언론을 상대로만 그런 얘길 하고 있다. 결국은 입법예고 수순 아니냐.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드맵 대화에는 임할 수 없다.”

- 지금 예정하고 있는 일정대로라면 비정규법 협상 이후 내년 초부터 로드맵 논의를 노사간에 진행한다는 것이다. 34개 과제가 제출돼 있다.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문제를 제외하고서는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과제들이다. 사용자 편향적인 내용들이 너무 많다. 복수, 전임자 이 두 가지 과제만 논의하면 된다.

- 8일 단위노조대표자수련대회에서도 확인됐듯이 전임자 임금문제에 대한 단위노조 대표자들의 우려는 크다.
“어떤 제도든, 현재 우리가 놓여진 상황을 전제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상만 좇거나 선진국의 사례만 운운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기업(사업장) 단위, 대주주(대기업) 중심이다. 산별노조가 몇개 만들어져 있지만 아직은 반쪽짜리, 여전히 내부 운영체제가 기업별 중심인 곳도 있다. 그게 우리 현실이다. 제대로 된 산별구조가 갖춰져 재정운영에서도 숨통이 트인다면 전임자 임금문제도 제고할 수 있겠지만 아직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전임자 임금지급을 법으로 금지한다면 산별노조 전환도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노조에 불리한 것만 법으로 강제한다면 이는 반노동정책이다. 현 정권은 전임자 임금 요구를 노동계의 ‘어거지’로 보는데, 현 노조 체제로는 전임자 문제에 관한 한 양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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