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 한국 노동계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국제노동기구(ILO)가 이번처럼 강한 어조로 유감을 표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후안 소마비아 ILO 사무총장은 서한에서 “유감”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실망” “협박” 등의 용어를 쓰면서 강한 어조로 양대노총 방침에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또 한국 노동계가 대회 개최지 변경 요구를 위해 ILO를 방문하더라도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노동계에 ‘호소’

일단, 이런 내용의 서한은 ‘한국 노동계와 선을 긋겠다’는 극단적인 의미보다는 국가수반까지 참가하는 노사정 국제행사 파행에 대한 부담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노동계에 보내는 ‘호소’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되면 ILO 아태지역총회 개최국 노동자들의 항의대상이 되는 정치적인 부담감과, 개최국 정부와의 갈등, 회의 개최지 변경에 따른 재정손실 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대노총에 보낸 서한 내용도 강한 유감 표시를 하되, 원만한 회의 개최 보장 등 모양새를 살려줄 경우 필수공익사업장 폐지 등 그동안 ILO가 한국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노동조건 개선 등의 문제해결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김대환 장관이 태국 방콕 ILO 아태지역본부 사무소를 방문했으며, ICFTU에도 공문을 보내 “한국 노동계가 국내문제를 국제문제로 비화시킨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ILO 내에서 노동자그룹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는 ICFTU를 통해 한국정부의 메시지가 사무총장의 서한에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노동계 대응은

지난 19일 열린 양대노총 대책회의에서는 개최지 변경요구, 부산에서 개최될 시 불참 등 기존 방침을 유지하되 ILO쪽과의 불필요한 감정 대립은 피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21일 벨기에 ICFTU 본부와 스위스 ILO 본부 방문을 위해 출국한 이석행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ILO에 부담을 준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고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번 설명할 것”이라며 “ILO를 충분히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이번 사태는 한국정부가 필수공익사업장 폐지 등 ILO 권고를 이행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는 점, 그런데도 김대환 장관이 최근 ILO 아태지역사무소를 방문해 외교작업을 벌인 점을 분명히 지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특히, ILO가 김대환 장관은 만났으면서 한국노동계 면담은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해외 방문에서 ILO쪽에는 개최지 변경과 변경시 대회참가 입장만 밝히되, 개최 강행시 반대집회 등을 언급해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ICFTU 쪽에는 회원국 노동단체의 불참과 개최 강행시 반대집회와 대항포럼 개최 등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한다는 방침이다.

노정 “대회개최 불가능할 듯”

이처럼 한국노동계의 입장이 기존 방침을 유지하기로 함에 따라 대회강행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ICFTU 등 노동자그룹이 유치국 노동자들의 방침을 무시하고 회의에 참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참가 강행 역시 국제노동연대 조직의 불문율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노사정 공동기구인 ILO에서 노동자그룹이 회의 불참으로 가닥을 잡으면, ILO 역시 개최지 변경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게 노동계, 정부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한국노총 한 관계자는 “비록 양대노총이 이번 해외방문을 통해 ‘개최 강행시 반대 집회 조직’ 등 강한 입장을 ILO에 직접 전달하지 않더라도 대회 강행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정부에 대회 개최 반납을 요청하지 않겠냐”고 전망했다. 노동부 관계자도 “ILO가 3자 시스템인데다가 태생적 근거도 노동자를 위한 조직인데 한쪽에서 피켓시위를 하는데 뚫고 들어갈 리는 없다”며 대회가 개최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다른 노정갈등 불씨

이처럼 아태지역총회 부산 개최가 힘들 것으로 전망되면서 ILO 총회가 노정갈등의 또다른 불씨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노정 모두에게 부담과 피해가 돌아갈 것으로 보이면서 어느 쪽이 더 큰 손해를 입게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국노총 한 관계자는 “ILO 총회 불참 결정은 김태환 열사 사망과 직권중재 등에서 출발한 노정갈등에서 비롯됐지만, 또다른 노정갈등의 독립변수가 될 것”이라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정부가 그만큼의 앙갚음을 노동계에 하지 않겠냐”고 분석했다. 특히 ILO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민주노총과 ILO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등 국제노동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동부 관계자 역시 "(노동계가) '제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듯이 (노동계에) 가장 큰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