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
파업을 결단한 것은 노동자였다”
역사 속 진짜 주인공인 노동자의 결단과 용기가 제대로 평가되기를


12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 식모부터 공장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80년 노동야학에서 처음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접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노조 만드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던 시절, 가난해서 노동자가 된 소녀는 20살 무렵 이미 투사가 돼 있었다.

김영미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는 1984년 효성물산에서 노조를 결성을 주도했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감금과 폭행, 협박을 이기고 어렵게 노조를 출범시키고,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쟁취하고, 일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면서 “우리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달 지나지 않아서 구로동맹파업이 있었고, 김영미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은 연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해온 1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해 투쟁한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6월 동맹파업 둘째날부터 회사는 부모님들을 동원했다. 딸이 불순분자들의 꼬임에 넘어 갔다는 말을 듣고 공장 앞으로 찾아와 오열하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래 동안 상처가 됐다. 김영미 위원장은 “당시 군사정권이 노동자의 ‘생각’과 ‘판단’을 (잡아끄는 데로 끌려 다니는) ‘짐승의 정신세계’ 수준으로 규정하고, 조작한 것”이 두고두고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졌다. “노동자 스스로의 판단”을 깎아내린 것은 군사정권뿐이었을까? 김영미 위원장이 9개월간 감옥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구로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과 조합원들은 이미 직장을 잃었고, 찾을 길도 없었다. 공단을 돌며 어렵게 모은 ‘동지’는 불과 60여명뿐. 다시 시작해야 할 김 위원장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블랙리스트’. 새로 직장을 구해도 2~3일만에 쫓겨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가정부와 세차장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다시 소모임을 만들고, 야학 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고, 서노협, 전노협을 거치며 활동을 해 나갔고, 병원노련에서 재정위원을 맡았다.

김 위원장은 “한번도 내가 노동운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현재 직업은 북한술을 수입하는 업체인 대동무역의 전무다. 1998년에 그는 병원노련의 재정위원을 그만두고, 현재 일을 시작했다.

동맹파업 직후에 벌어진 노선투쟁의 과정에 대해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조합주의자, 경제주의자로 매도됐다,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다 알지 못 한다”며 말을 어렵게 꺼냈을 따름이다. 왜 노동운동을 그만두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는 “1987년부터 1998년까지의 활동은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며 말을 아꼈다.

“물대포를 맞고, 구사대와 경찰에게 얻어맞아도 투쟁현장에 있을 때가 행복했다. 사무실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한 기자, 이 말의 행간을 다 알지 못한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위해 마음 하나라도 보태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말을 전할 따름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노동자가 됐던 소녀가 왜 노동운동가가 됐는지, 20살 남짓한 여공들이 1985년 엄혹한 시기에 왜 동맹파업을 감행했는지, 그들은 지난 20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는 ‘역사’는 아직 없다. ‘불순분자들의 꼬임에 넘어갔었던 것’은 아니었음은 다 ‘입증’된 것일까?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힘겨움’까지가 쓰여졌을 뿐, 아직 목숨(생계)를 걸었던 현장 노동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역사’는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그 역사를 새로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는 김영미 위원장의 얼굴은 상당히 ‘신이 나’ 보였다. 민중운동의 역사 속, 그 중심에 서 있던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의 결단과 용기가 제대로 평가되길 바랄 따름이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인터뷰 부흥사 파업 주도했던 공계진 현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상처 입은 현장 노동자들 정당하게 평가해야”
당시 2천명 이상 강제해고돼…'학출'들이 뒷감당 못한 사이 노동자들이 고통 커


“당시 2천여명의 노동자가 강제 해고됐다. 이들의 희생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학생출신인 우리가 뒷일을 추스르지 못한 채 구속되거나 떠난 사이에 파업에 참가했던 현장 노동자들이 겪은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구로동맹파업. 공계진(47)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은 20년 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공씨는 학생운동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83년 말, 복학을 하지 않은 채 당시 1,200여명이 일하던 구로동 ‘부흥사’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양복을 만들던 업체였다. 공씨는 당시 본명을 쓰고 입사했는데도 신체 장애인이라는 점 때문에 회사쪽으로부터 별 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85년 6월26일. 가리봉에서 대학생들과 청계피복 노동자들이 구로동맹파업 지지시위를 벌였다. 한 학생은 굴뚝에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 공씨와 부흥사 노동자들은 시위 현장을 배회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튿날인 27일 밤. 부흥사노조 일부 간부들과 활동가 20여명은 완성반 노동자였던 안경환씨 집에 모여 파업 ‘작전계획’을 짰다.

28일 아침8시. 출근길 노동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8명의 남성 노동자들은 쇠파이프와 커다란 재단가위를 치켜들고 3층 재단실로 뛰어들었다. 파업에 부정적이었던 200여명의 재단사들은 이들과 한번 맞붙지도 못한 채 엉겁결에 쫓겨 달아났다. 여성 노동자들도 불을 붙일 솜방망이를 치켜들고 재단실로 뛰어 들어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재단용 대형책상을 밀어 바리케이드를 쳤다. 재단실 안에는 여성 110명과 남성 8명 등 모두 118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파업! 드디어 부흥사도 파업에 성공했다.

경찰병력과 구사대가 공장 밖에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의 가족들을 앞장 세워 파업을 중단하라는 호소작전도 썼다. 즉각 진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더 단단히 뭉쳤다. 신나에 담근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창밖으로 흔들었다. 다가오면 원단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파업은 이날 오후5시께 깨졌다. 경찰병력과 재단사들이 주축이 된 구사대가 소화기를 쏴대면서 문을 부수고 미친 듯이 들어왔다. 닥치는 대로 짓밟고 때렸다. 20대 초중반의 여성노동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대항했다.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일산에서 일식집을 경영하는 문윤수씨는 당시 진압경찰 군홧발에 깔려 의식을 잃었다. 노동자들은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쳤다. 118명 모두 연행됐다. 자욱한 소화기 분말 가루 속에서 파업이 끝났다.

“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에 가려져 구로동맹파업이 빛을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이들이 각자 흩어지면서 당시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측면도 크다. 주역들이 모두 떠나면서 현장을 챙겨줄 사람들도 없었다.” 공씨는 구로동맹파업과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직결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흥사만 하더라도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안경환씨 등 5명의 구속자들은 생계거리나 다른 일을 한다며 구로를 떠났다. 파업 직후 지독한 고생을 했던 대부분의 20대 초중반의 여성 노동자들도 이제 40대 주부나 직장인이 됐다. 이들에게 구로동맹파업은 ‘과거의 가슴 떨리고 아픈 추억’ 정도로 남아 있다.

믿었던 이들이 모두 구속되거나 떠난 황량한 지역에서, 남은 이들이 겪었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공씨의 말이다. 그는 “구로동맹파업이 '전평'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는 일반적이고 긍정적인 평가에 동의한다”면서 “영웅중심의 역사적 평가보다는 현장노동자들이 겪은 마음의 상처가 정당하게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정치 속에서 떨쳐 일어난 동맹파업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며 “파업후에 잃은 것도 많지만, 해서는 안 될 투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맹파업 이후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서노련-남노련 논쟁이 벌여졌다. ‘노조운동’이냐 ‘노동운동’이냐 하는 논쟁도 치열했다. 공씨는 남노련에 가담했고 노조운동을 택했다. 남노련 사건으로 그는 87년 1월 또 구속됐다.

현재 아내와 사이에 고등학생 딸 하나를 둔 공씨는 88년 석방 후 “더이상 구속되면 안 되겠다”싶어 영등포 산업선교회에 들어가 일했단다. 이후 경기 안산지역에서 노동단체 활동도 했고 민주노총 자동차연맹(금속연맹의 전신 중 하나)에서도 활동했다. 이어 경기 시흥 시화공단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난해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구로동맹파업이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동지’들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더 급하다. 그는 이번 20주년 기념사업들이 ‘동지’들을 찾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조상기 기자 westar@labortoday.co.kr



유화청 대우어패럴노조 부위원장
“노동자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파업이었다”
"20년, 고단했지만 후회 않는다"…"동맹파업은 전태일정신의 계승"


“말도 마세요. 이사 다닐 때마다 어찌나 경찰서 쫓아다니던지…. 경찰이 다녀간 후엔 집주인은 방 비우라고 하고…. 수배자들 찾아내라면서 남편을 괴롭히고…. 수년을 그랬어요.”

지난 24일 오후 가리봉동 우시장. 유화청 대우어패럴노조 전 부위원장(48·사진)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만난 그의 부인의 첫 마디다.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의 고통스런 기억은 생생한 듯했다.

“노동자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파업”

“당시 파업은 노동자들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선택이었어요.”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여러 측면의 평가가 있다는 기자의 말에 대뜸 던진 유하청 전 부위원장의 말이다.

“20년 전, 김준용 위원장과 간부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제가 임시위원장을 맡게 됐어요. 솔직히 막막했지요. 가슴도 떨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노조 간부들 다 모이라고 했어요. 그리곤, 이대로 물러날 거냐고, 그럴 순 없다고, 다 알리자고, 여론화 시키자고 그랬죠.”

85년 6월24일 오전9시를 기해 파업은 진행됐고 파업에 참가한 400~500명의 조합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찰은 음식물 반입을 철저히 막았고, 시골에서 가족들을 상경시켜 ‘불효자는 웁니다’ 류의 노래로 조합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파업 6일째, 경찰은 마침내 벽을 뚫고 진압에 나섰다.

6일의 파업. 그가 기억하고 평가하는 구로동맹파업은 ‘학출’ 중심이 아닌 ‘노동자’의 자발적 분노의 표출이었다. 이런 ‘자발적인 선택’의 배경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전 원래 회사에 충실했고 더 공부해서 전문대도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어쩌다 재단실의 김준용과 친구가 됐고 그가 권해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접한 뒤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것이 노조 결성에까지 이르게 된 거죠.”

당시 구로지역은 유별났다고 한다.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도 노조가 결성되면서 평상시 노조간 도움을 주고 받는 ‘끈끈한 정’이 유지돼 왔다. 이것이 역시 동맹파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20년, 고단했으나 후회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삶은 고단했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 유화청 전 부위원장은 당시 벽을 뚫고 들어온 경찰에 끌려간 뒤 6개월간의 징역을 살았다. '사내커플'이었던 부인은 임신한 몸으로 그의 옥바라지를 해 왔단다.

감옥서 나온 뒤 그는 막막했다. 워낙 집이 가난했고 이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져 취직할 수도 없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을 계속 할 것인가 기로에 섰다.

“누가 두 마리 토끼를 쫓지 말라더군요. 전 자신이 없었어요. 아내는 임신 중이고 취직도 안 되고. 결국 어머니가 운영하는 지금의 우시장에서 일하게 됐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건강상태도 말이 아니다. 끌려가던 당시 경찰은 그가 임시위원장인 걸 알고 6일간 고생했던 게 ‘약이 올랐던지’ 1시간여를 닭장차에서 돌려가면서 무진장 ‘팼다’. 머리를 하도 많이 맞아 지금까지 편두통으로 고생하고 있고 허리, 어깨 등 안 아픈 곳이 없단다. 게다가 3년 전 그는 암 선고를 받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조심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잊혀져 왔던 20년. 지금 다시 그때를 떠올리려니 새록새록 새로운가 보다.

“김문수 의원 등이 노동현장을 내팽개치고 변절해가는 모습을 보며 ‘노동자 등에 업고 뭐하는 짓인가’라는 회의도 들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습니다. 제가 잘 한 것은 노조를 결성하고 변절하지 않고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최근 그때의 동지들이 다시 모이고 있단다. 20년간 보지 못했던 동지들. 지금 그들은 다시 뭉쳐 복직투쟁에 나섰다. 복직투쟁위도 발족한단다.

“구로동맹파업의 정신은 전태일 정신의 계승입니다. 최저생계비도 못 받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비정규직 문제가 있더군요. 20년 전 보여줬던 연대의 정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연윤정 기자 yon@labortoday.co.kr




학생지원투쟁 나섰던 노철호씨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예고한 투쟁”
'현장투신' 10년, 지금은 사용자…"당시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약자를 위한 보편적 운동"


"감개가 무량합니다." 25일 서울 구로 가산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열린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행사를 찾은 노철호(43)씨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짧게 대답했다.

1985년 6월26일, 서울대학교 생물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었던 노씨는 대우어패럴 옆 공장의 굴뚝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구속, 집시법과 폭력위반 등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살았다.

"22일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이 구속됐다는 소식과 24일 파업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친구 한 명과 공장 건너쪽 협동봉제공장 굴뚝에 올라가서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다 10분만에 경찰에 진압당했습니다."

대학 3학년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져 왔다는 노씨에게 구로동맹파업의 인연은 이처럼 짧은 10분의 인연이었다. 하지만 10분의 인연은 이후 18개월의 징역과 10년간의 노동 현장 투신의 시작이기도 했다.

노씨는 이후 몇군데의 공장을 다니면서 현장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안산의 크레인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인생에 한 획을 그었던 구로동맹파업에 대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노씨는 "아무리 단결력 있게 조직화 됐다고 하더라도 정권의 물리력을 당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파업'이란 평가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한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의미를 "학생출신 등으로부터 계급인식이 이식된 것보다 대중들의 자각으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며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을 예고하는 투쟁이었다"고 밝혔다.

현장활동을 10년간 해오던 노씨가 운동을 접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93년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갑작스레 어려워진 집안문제는 당시 사회변혁에 대해 혼돈을 느껴오던 노씨의 결정을 앞당겼다.

"사회변혁에 대한 비전이라든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혼돈이 왔어요. 사회주의권도 무너지고…. 운동권도 사분오열돼서 무엇이라도 힘있게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운동을 포기하고 복학을 하기로 결정을 했지요."

학교를 졸업한 노씨는 95년 대우자동차에 입사를 했다. 당시 대우는 김우중 회장의 특별지시로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운동권 출신들을 특채해 약 120명 정도가 입사를 했다. 김 회장은 학생운동 출신들의 채용을 통해 이들의 '지도력'과 '추진력'을 기업경영에 접목 시키는 한편 노무관리에 있어서도 톡톡한 효과를 봤다. 특히 94년 한달 동안 장기파업을 벌였던 대우자동차노조를 상대하기에 대졸 일반직들은 역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2001년까지 대우자동차 구매개발부에서 일을 한 노씨는 이후 사업가로 변모를 한다. 자동차 시트를 만드는 KM&I에 입사해 현재 이 회사 부사장을 맡고 있다. 1985년 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위해 굴뚝에 올라 구호를 외치다 구속당했던 20대 청년이 지금은 노조와 임단협 테이블에 마주앉아 협상을 벌이는 불혹의 사용자가 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노 부사장은 노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노조와 회사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몫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몫을 창출하는데 있어서 사용자가 약탈적인 방식을 취해선 안 되지만 노조 역시도 회사를 불신하거나 무력화 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노부사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정상적인 부분들도 많이 방해를 받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개별 중소기업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요구할때는 갑갑하지요. 특히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습니다."

노 부사장은 인터뷰 말미에 과거의 노동운동과 최근 노동운동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층 자체가 지금처럼 양극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자에 대한 보편적인 운동이 가능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비정규직과 대기업 노조와의 차이가 심각하게 벌어져 있고 노조는 이익단체적인 성격이 강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5일 가산종합사회복지관, 인터뷰를 마친 노 부사장은 총총걸음으로 예전의 동지들과 다시 인사를 나눴고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이은호 기자 bankol@labortoday.co.kr




양용자 가리봉전자노조 쟁의부장
“세상에 눈뜨게 한 노조와 구로동맹파업”
해고 뒤에도 민주노조활동…“동지들은 아직도 삶의 조언자”



지난 25일 서울 금천구 가산종합복지회관에서 열린 구로동맹파업 동지들의 만남의 장 ‘20년 만의 해후, 아름다운 만남’ 행사에 나타난 양용자(42)씨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목소리도 떨렸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양씨에게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동지들과의 만남은 누가 뭐래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옛 동지들을 회고하는 그의 눈에는 희미한 이슬이 맺혔다.

동맹파업, 다시 민주노조 건설 활동

당시 구로공단 지역에서 몇 안 되는 이른바 ‘민주노조’였던 가리봉전자노조는 1986년 5월 노조결성 1년도 채 되지 않아 임단협을 체결했다. 이어 이웃에 있는 대우어패럴노조 지도부 체포 소식이 알려졌고 효성물산노조 등과 함께 6월23일 동맹파업에 돌입한다.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한 지 2년 반만의 일이었고 꽃다운 22세였다. 당시 노조 쟁의부장으로 파업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양씨는 파업이 마무리된 뒤 1차 해고자 명단에 오르고 한달여간의 복직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해고 전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던 그에게 한달 이상의 무직 신세는 큰 부담이었다. 복직의 꿈을 뒤로 하고 양씨는 ‘후지카 대원전기’라는 업체에 취업을 했다. 구로동맹파업으로 인한 해고자 출신이라는 점을 숨겼음은 물론이다. 호구지책을 위해 찾은 두번째 직장이고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리봉전자노조와 구로동맹파업의 ‘전사’ 출신인 자신을 속이지는 못했다.

이미 후지카 대원전기에도 민주노조를 만드려는 이들이 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양용자씨에게 은밀히 접근을 해온 것.

“재취업한 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한 남자가 저를 미행하듯이 따라오더니 다방으로 끌고 가더군요. 그 남자도 다른 공장 해고자 출신이었고 대원전기에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지고 제안하더군요.”

양씨는 대원전기의 민주노조를 꿈꾸는 6~7명의 다른 노동자들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습, 유인물 만들기로, 새로운 민주노조의 꿈을 일궈갔다. 하지만 어용의 뿌리가 깊었던 그곳에서 민주노조 건설은 쉽지 않았고 학생운동 출신이었던 활동가가 해고됐다. 이어 양씨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도 활동을 시작한 지 2년 반만에 쫓겨나다시피 공장을 나오게 된다.

공장을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양씨는 대원전기 민주노조 건설 운동을 함께 하다가 만난 오요환(48)씨를 지금의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으로 들어섰다.

“연락끊긴 동지, 노동계 비리 안타까워”

“세상을 보는 눈도 생기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양씨는 구로동맹파업 당시 가리봉전자노조 파업을 함께 이끌었던 윤혜련씨, 서혜경씨, 유시주씨 등 ‘언니’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사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우리가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권리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언니들은 파업 이후에도 계속 만났고, 힘들때 조언자가 돼 주었지요.”

옛 동지들을 1년에 한두번씩은 꼭 만났지만 가리봉전자에서 함께 해고돼 대원전기에도 함께 취업해 활동했던 친구 한영선(43)씨는 대원전기에서 쫓겨난 뒤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양씨는 “연락도 안 되고, 연락할 방법도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또 안타까운 것은 최근에 들려온 노동계 비리소식이다. 양씨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려운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면서 “그들을 위해서는 노조들이 잘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 했다.

인터뷰 때문에 20년만에 모이는 동지들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지. 양용자씨는 “그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행사장이 열리는 복지관 5층으로 급히 뛰어갔다.


김학태 기자 tae@labortoday.co.kr




당시 노학연대투쟁 활동했던 장혜경씨
“역사 기록의 주체는 노동자”
현장에 투신했지만 기계가 너무 무서웠다



‘노학연대…’. 노동자와 학생이 손을 맞잡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서일까. 이 네 글자에는 여전히 무거움과 답답함이 묻어난다.

대학강사 장혜경(42)씨. 82학번인 장씨는 구로동맹파업 당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아래 노동위원회에 몸담고 있었다. 민주화추진위원회는 전두환정권이 조직사건으로 엮어낸 85년 민추위 사건, 일명 '깃발' 사건의 본체로 서울대 비밀조직이었다. 김근태 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장씨는 구로동맹파업 때 유인물을 등사하며 학생시위, 지지시위를 조직했다. 파업동맹 바로 다음날 이루어진 재빠른 시위였다. 학생들의 지지시위가 이렇게 신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던 대학생들이 ‘사회변혁의 원동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으로 80년대 초 구로공단 등 현장으로 일제히 투신하면서 노학간 연대의 고리가 형성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학생출신(학출) 노동자들, 더 나아가 ‘노학연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구동파에 있어 막상 노출은 학출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시각과 당시 이름없이 투신했던 학출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 것.

이에 대해 장혜경 씨는 “당시 현장에서도 '안티-학출'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는 노출을 운동의 주체로 보지 않으려던 기득권 세력의 시각이 크게 작용했다”며 “역사의 기록 주체는 어디까지나 민중이고 역사가 노동자 중심으로 쓰여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심지어 감옥에서도 노출과 학출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며 “학출은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노출은 잡범 취급을 받았고 이런 것들이 쌓여 학출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이 생겨난 것 같다”고 전했다.

다만 장씨는 학출로서의 어려움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당시는 지식인운동을 철저히 부정하던 때였고 4학년이 되면 동을 뜨다 구속되거나 현장으로 가거나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장에 투신한 학출은 주위 기반이 약해 자칫 한 발만 어긋나도 좌절하거나 다른 길을 걷기 쉬웠다는 것. 장씨 역시 그랬다.

그는 “학출이 공장에 첫 발을 내딛는 나이가 20대 초반인데 반해 노출은 14~15세 어린 나이에 들어와 18살만 되면 미싱사로 큰 소리를 치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다”면서 “그런 상황을 모두 극복하고 끝까지 현장에 남아계셨던 분들은 지금도 굉장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나 자신보다 사회를 먼저 돌아봤던 당시 많은 대학생들처럼 장씨 역시 어렵고 힘든 길을 걸었다. 구동파 이후 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됐고 형 3년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이후 신분증을 위조해 구로공단 섬유공장에 들어가 1년 넘도록 일했지만 미싱사가 되지는 못했다. 기계가 너무 무서웠다고. 지금도 미싱일은 못한단다. 어쩔 수 없이 공장을 나와 구로 영등포교회의 ‘개똥이네’ 야학교사가 됐다. 그리고 전노협 편집위원회에 들어가 ‘전국노동자신문’을 만들었다. 그 때 심상정,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그리고 90년, 학교 때부터 동지였던 동갑내기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다. 여기서 숨은 얘기 하나. 당시 전노협 창립식이 정권의 눈을 피해 마포 신혼살림집에서 이뤄졌다고.

이듬해 전노협을 그만두고 9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은 남편을 따라 속초에 정착, 10년 동안 대학원을 다니며 두 아이를 기르고 이제는 학생이 아닌 선생으로 대학강단에 선다. 평범한 주부로서 장씨는 민중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구동파의 정신을 안고, 그렇게 사회의 일원이 돼 있었다.

문득 노학연대를 주도했던 때와 주부로서, 선생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는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답했다. 그저 주어진 조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요즘은 ‘삶에 대해 너무 건방지다’는 얘기까지 들어요. 모든 일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니까…. 구동파때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웬만한 일에는 일 자체에 겁이 안나요. 그 때의 경험이 지금 힘을 발휘하는 원천이지요. 시대가 요구했던 일을 했고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여의치 않아요.”

만약 중학생 아들이 엄마와 똑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면 말릴 거냐고 우문했다. “자신의 길이에요. 자신이 내린 선택이면 안말려요. 막을 이유가 없죠.” 현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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