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지난 85년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난 지 20주년이다. 당시 파업을 주도하고 동참했던 ‘동지’들로 꾸려진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18일 정신계승 토론회 등을 시작으로 다채로운 행사를 펼쳤다. 이 글은 18일 토론회에서 발제된 유경순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의 글의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주> 


 


1980년대 전반기에 광주민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가들의 현장투신에 의해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가 형성됐다.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은 1980~85년경까지 1,000명 이상이 노동현장에 투신해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70년대 민주노조활동을 통해 배출된 선진 노동자들도 비공개적으로 사업장모임을 조직, 새로이 활동을 모색했다. 이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의 차이 속에서도, 공통되게 노동운동의 고립분산성 극복 및 정치지향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노동자들의 연대성 확보를 위한 시도를 했다.

이들 두 주체의 움직임은 구로지역에서 '1984년 구로지역 민주노조운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면서 대중과 결합해 갔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이러한 학생운동출신 노동자과 선진노동자들의 활동이 민주노조활동을 통해 노동자 연대의식을 발전시켜 갔던 성과를 기반으로 발생되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직접적으로는 6월22일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발생했다. 동맹파업은 6월24일 4개 노조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강제해산 당한 6월29일까지 6일간 전개됐다. 6일 간의 투쟁은 5개 노조의 동맹파업과 5개 노조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산됐고, 노동운동 단체와 민중운동 세력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성과이자, 동시에 정부와 자본가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폭로한 투쟁이었다.

노동조합 차원의 지역 동맹파업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부의 민주노조탄압을 저지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과 계급성을 지킨 비타협적 투쟁이었다. 사업장간 연대투쟁은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주변 노조들의 지지농성, 점심식사 거부투쟁 및 노동운동단체의 가두시위, 지지농성 등으로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개별적 이해를 넘어 노동자 일반으로 이해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한 투쟁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1980년 초 정부의 탄압에 개별노조로 대응하면서 와해됐던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보존논리와 조합주의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다.

동맹파업이란 투쟁방식은 그 시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 역시 매우 컸다.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생산활동을 정지하고 각 현장을 점거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동맹파업은 사회 제계층의 지지투쟁으로 확산되고, 이에 놀란 정부가 일시적으로 노동법개정을 고려해 보겠다는 태도를 보일 정도였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연대의식을 고취시키고, 단결의 힘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노동자들은 해방춤, 탈춤, 즉흥 촌극, 장기자랑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의 운용과 상호지원을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았다. 또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경찰 및 노동부 등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게 했다. 농성장에는 조합원토론이 항상적으로 열려 노동자들의 탄압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인식해 갔다. 당시 토론의 내용은 '투쟁의 의의와 민주노동운동', '관리자의 태도', '노동운동사강의', '10·26사태를 풍자한 연극과 토론', '왜 동맹파업을 하는가', '신민당의 태도' 등이었다. 또한 파업과정에서의 토론은 매 사안에 대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민주적인 훈련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어 감과 동시에 '투쟁대상'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의 제약을 뛰어넘어 연대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조가 대중조직, 지역별 투쟁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

구로동맹파업은 민주노조세력이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정부의 노조탄압에 정면으로 대응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이었다. 투쟁의 대상을 개별 기업주를 넘어 정부에 두고 정부의 노조탄압정책을 폭로해 들어갔다.

이러한 투쟁의 성격을 집약해서 나타낸 것은 투쟁에서 제기된 요구사항들이다. 구로동맹파업의 요구사항은 정부의 탄압에 의한 '노조 존립위기'의 상황에서 탄압의 수단이 된 제반 악법의 개정·폐지요구와 결합되어 제기됐다. 각 사업장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가 정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정치적 요구'와 결합된 것이다.

동맹파업에서 제기된 '정치적 요구'는 '노동운동 탄압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기법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 최저생계비 보장하라'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제도개선을 요구한 정치투쟁이라도 그 시기까지 노동자의 의식상태, 노동운동 역량의 발전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시기 노동자들은 낮은 권리의식 상태에 있었고, 동맹파업 이전의 노조활동은 현장 내의 노동조건 개선투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동법개정투쟁 등의 제도개선적 정치투쟁은 개별 노조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되었고, 주로 노동운동단체를 중심으로 가두에서 제기됐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을 대상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한 '정치투쟁'이 '대중의 동맹파업'을 통해 제기된 것은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투쟁과정 중 일부 노동자들이 전투경찰과 사복경찰의 폭력을 직접 당하면서 '폭력경찰 물러가라', '살인정권 물러가라'는 요구로 표출되기도 했고, 동맹파업 해산 이후 노동자들이 7월23일 가두시위 과정에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발전되어 나타나 의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구로지역의 노동자투쟁은 경제적 요구와 제도개선의 정치적 요구가 결합된 성격을 보여주었고, 이는 '동맹파업'이라는 투쟁방식과 결합되면서 그 정치적 의미가 확대됐다.

구로동맹파업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의 전환

동맹파업이 전체 노동운동과 구로지역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맹파업은 투쟁을 통해 다수의 선진노동자들을 배출했으며 구로지역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동맹파업을 경험한 노동자들이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에 참여했으며, 1985년 8월에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결성에 중심이 됐다.

또 한 축으로 동맹파업에서 노조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효성물산 위원장, 가리봉전자 2인, 선일섬유 1인 및 지역노동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1986년 5월 '노동조합결성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구로지역 및 전국적으로 노조교육과 지원활동을 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구로동맹파업을 경험한 선진적 노동자들은 구로지역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일 역할을 했다. 당시 서노협 사무처장은 전 대우어패럴 위원장이었던 김준용이였고, 쟁의국 간사로는 전 효성물산위원장 김영미 등이 맡았다. 1987~88년 투쟁과정에서 동맹파업을 통해 배출된 다수의 선진적 노동자들이 투쟁을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하려 시도했다. 또 이들은 지역운동단체를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고자들이 1987년 7월19일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복직투쟁·구속노동자 석방투쟁과 노조투쟁을 지원했는데, 위원장은 김준용이었다.

이처럼 구로동맹파업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은 동맹파업 이후에도 지역활동과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 활동 등을 통해 1987년 대투쟁 이후 '지역노조협의회' 건설과 이후 활동에 결합하여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둘째, 동맹파업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을 위한 실천적 계기점이 됐다. 동맹파업은 투쟁 직후 평가논쟁을 통해 당시 노동운동의 방향모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동맹파업에 대한 평가는 주로 동맹파업의 성격과 동맹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 파악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건설'을 중시하는 입장과 대중정치노선으로 그 입장이 서로 크게 구별되었다.

이런 평가 논의는 당장의 실천과제로서 어떠한 조직을 건설해야 하는가와 맞물려 진행됐다. 노조를 넘어서는 조직의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는 그간의 고립분산적인 소모임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지역적 운동틀'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제반 논쟁은 현실에서 서노련의 결성과 운동주도로 나타나 외적으로는 논쟁이 일단락됐다. 서노련은 동맹파업이 보여준 대중투쟁의 위력과 노조의 대중조직으로서의 가능성을 일면 부정하고, 동맹파업의 정치적 성격, 지역 정치소모임 활동가들의 역할 등을 강조했다.

서노련의 해체 이후 노동운동 내부에서 동맹파업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었다. 이는 서노련의 정치투쟁중심의 활동을 비판하는 기조와 맞물려 동맹파업의 대중적 연대투쟁의 성격에 주목하며, 그를 현실 운동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이에 대해 민주노조 건설론-자주적 노조의 지역연맹 건설주장-대중적 정치조직 및 공장정치소조론 등이 제기되었고 그에 준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수도권 중심 노동운동의 다양한 논쟁과 실천의 모색과정 중에 발생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조합을 대중조직으로 일반화시켰고, 경제투쟁의 의미가 인정되면서 현장 내 조직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 됐다.

동맹파업의 성과를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던 1980년 중반기 노동운동진영은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에의 결합과 아울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직접적으로 실천하려 했다. 이러한 모색은 노조결성과 운영에의 참여, 반공개 운동단체 활동 그리고 물밑으로 비합법적인 정치조직건설과 변혁운동이념의 구체화를 위한 활동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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