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법안과 사회적 대화’

노사관계를 둘러싸고 현재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단어들이다. 성격이 다른 두 문제는 어느 순간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 비정규법안 처리 방향에 따라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그림자가 더 짙다. 비정규법안을 놓고 실질적인 대화를 시작하자는 노동계와, 이미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노동부, 경영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사회적 대화의 안착을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는 김금수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연임됐다. 한사코 “할 말이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던 김 위원장을 지난 2일 어렵게 만났다.

“축하전화가 오면 오히려 위로를 해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의욕에 차서 일했는데…. 문득 옛날이 생각난다. 11살 때인가, 짐을 가득 메고 30리 길을 걷는데 평지에서는 내려놓으면 혼자 다시 짐을 멜 수 없기 때문에 무거워도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짐을 덜어줄 수도 없었고.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연임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김 위원장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다.

약력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1961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1972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76-1985년 한국노총 연구위원 및 정책연구실장
1986-1995년 한국노동교육협회 대표
1988-1999년 한겨레 논설위원
1995-2003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1997-2003년 중앙노동위원회 조정담당 공익위원
2000-2003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
2000-2003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
2003-현재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노사관계가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꼬여있기 때문이다. 대립, 갈등으로 서로 상처만 주고받았던 노사정 관계를 ‘정책의 장’으로 바꿔내기 위해 업종별(산업별), 지역별 중층적 교섭과 ‘사회적 대화’ 등 논의 틀 마련에 매진했던 김 위원장. 이러한 위원장의 처음 구상이 민주노총 복귀가 계속 미뤄지면서 2년째 ‘계획’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다. 민주노총 복귀 문제는 국정감사, 여론 등에서 “노사정위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비판의 핵심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일자리 사회협약도 체결되고 노동계 핵심 과제였던 전력산업 배전분할도 노사정위라는 틀에서 중단이 결정됐다. 또한 스톡옵션형 우리사주제(우리사주 매수선택권제도), 고용서비스 선진화, 근로소득보전세제(EITC) 도입에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도 진행됐다. 하지만 노사정위는 계속 ‘동네북’이다. 민주노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실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명확한 평가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계가 있는 속에서도 의미있는 사업을 진행했던 지난 2년의 시간이 ‘민주노총 복귀’라는 잣대로 평가절하되는 것이 위원장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모양이다.

“비정규법안 노사관계 파탄 가져올 수도”

어쨌든 사회적 대화 기구의 활성화와 관련, 4월 처리를 앞두고 있는 비정규법안은 발등의 떨어진 불이다. 김 위원장은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현상만을 놓고보면 막막하다. 최악의 경우를 벗어나 보자는 생각을 해야 한다. 노사정 모두 현 상황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단순히 법 조항 몇 개, 어디서 논의하느냐 이런 관점이 아니라 자칫 잘못됐을 때 노사관계 파탄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파국은 피하자는 태도로 노사정이 노력해야 한다.”

그럼, 위원장이 생각하는 해법은 무엇일까. 상투적이고 진부한 대화로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이 위원장의 생각이다.

“공식 협상, 물밑 대화 등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어느 쪽에서든 대화를 거부하면 안 된다. 우선 노사정대표자회의 재가동을 통해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비정규법안을 처리하는 과정이 우리나라 노사관계가 앞으로 진전되느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중요한 ‘시험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비정규법안 4월 국회처리 문제도 노사정이 진지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 부족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논의가 연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도 법안 폐기가 아닌 구체적인 법조항을 놓고 현실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화의 시작이다.”

노사정위원장이라는 위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무게중심은 비정규법안보다는 ‘사회적 대화’에 놓여 있었다.

“사회적 대화 목적 아닌 수단”

사회적 대화의 시작을 위해 비정규법안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라면, 민주노총 내부의 의견 조율은 ‘두 번째 산’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고 해도 지난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를 보듯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내부 조율은 만만치 않은 과제다. 시기상조론, 자본의 포섭기구, 신자유주의 들러리 등 노사정위에 대한 민주노총 내부 의견은 접점을 찾기 힘들 정도다. 이러한 비판의 한 가운데 ‘노동계 대부’로 불린 김금수 위원장이 있었다. 정작 김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마치 목적처럼 치부되는데 사회적 대화는 정책과 제도의 결정을 둘러싸고 적극적으로 자기 조직의 주장을 표명하고 개입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수단이자 방편이다. 노동계가 이전부터 요구했던 ‘정책 참가’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제도 개혁 요구 투쟁은 노동운동 입장에서는 조직된 노동자가 아닌 전체 노동자를 위한 활동이다.” 사회적 대화 부분이 나오자 김 위원장은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내듯 장시간 말을 이어갔다.

“사회적 대화를 둘러싸고 노동계 입장에서 (자본, 권력의) 개량적 요구, 체제 내 포섭 등 우려되는 지점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이는 노조 자체 역량으로 극복할 문제다. 처음부터 정책 참가를 하지 않겠다면 제도요구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조 스스로 노동자 이익을 위한 활동을 접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대화기구의 ‘원하는 상’을 요구하고 얻어내면 된다. 정책 역량과 추진 동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가 목적인양 부각시키는 것은 노선을 포장한 패배주의다.” 김 위원장은 ‘시기상조론’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낮은 조직률, 취약한 진보정당, 산별교섭 체계의 미정립, 산하 조직에 대한 통제력 미약 등을 사회적 대화의 제약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오히려 역으로 현재 조건이 이러하기 때문에 노동계는 사회적 대화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제도개혁이라는 정치운동 없이 하루아침에 진보정치 세력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조직률이 낮은데 미조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어디서 요구할 것인가. 불리한 요건이지만 부딪히지 않으면 (노동계) 역량은 언제까지나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 “지나친 기대도 금물, 지나친 우려도 금물”이라며 발언을 이어갔다. 스스로를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는 ‘중개자’ 역할이라며 그간 말을 아꼈던 김 위원장은 누구보다 하고픈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아직 우리는 지역, 산업, 업종, 전국 차원에서 정책이나 제도를 놓고 깊이 있게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노사정위 내에서도 낮은 수준에서 의제가 맴돌고 있다. 사회적 대화의 수준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각 주체들의 정책역량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져야 한다. 또한 어느 한 쪽의 이익이 또 다른 쪽의 손해라는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분과가 꾸려지면 세계 자동차 시장, 기술혁신, 직업훈련 등의 문제를 노사정이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상생이 종속적 의미도 있지만 적극적 상생은 노사 공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대화 정착 ‘사회협약’ 필수조건

질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최근 사회적 대화 논의와 맞물려 정치권, 시민단체, 정부, 경영계까지 사회협약을 거론하고 있다. 공통적인 내용은 양극화 해소의 관점에서 대기업노동자가 양보해 취약계층의 수준을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아직 사회적 대화 틀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유럽 선진국처럼 사회협약이 불쑥 체결될 수 있는 것일까. 김금수 위원장은 “모든 사회협약은 선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사회협약이 어떤 형태, 어떤 목적으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내용을 담아 체결되느냐 하는 요소들이 분명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는 ‘전시효과’로만 남게 된다”고 경고했다. 김 위원장은 ‘대기업노동자 양보를 전제로 취약계층 보호’라는 내용과 관련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한가지 방편은 될 수 있지만 아주 소극적이고 (정부의) 책임회피일 수 있다. 대기업노동자는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양극화 해소, 불평등 해소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구조적인 문제, 사회 개혁 등 큰 테두리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 정착 및 활성화는 필수조건이다. 토대 없이 나오는 사회협약은 경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임기를 새로 시작한 김 위원장에게 각오와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그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금 있는 문제도 풀지 못했는데 무슨…. 교착돼 있는 현 상황을 깨고 새로운 지형을 여는 계기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 계기가 머리에 가득한데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누구에게 덜어 줄 수도,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을 지고 강을 건너고 있는 김금수 위원장의 발걸음이 ‘잔인한 달’이라는 4월에 조금은 가벼워질 것인가, 더 무거워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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