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2024년 매일노동뉴스가 노동을 바꾸는 사람 24명을 만납니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부조리한 노동의 세계에 작지만 확실한 균열을 내고 변화를 만드는 이들입니다. <편집자>

“라이 뺀질이! 라이 뺀질이! 그 말이 안 잊혀져요. 정말 그땐, 죽고 싶었어요.”

우다야 마하다르 라이(57·사진) 이주노조 위원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1990년 한국에 들어와 금속·봉제공장 등을 거치며 지금껏 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한국인 사장이 했다던 모욕적인 말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대전의 가죽공장에 갔더니 부를 때마다 욕이었어요. 1년 동안 일하는 내내 ‘개새끼’라고, 그렇게 불렀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말끝을 흐리는 라이 위원장의 눈가가 젖었다. 이제는 고향인 네팔보다 한국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아졌다. 30여년간 이곳에 머물며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적 변화를 체감했다. 하지만 이주노조 활동가인 그에게 한국은 여전히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만큼은 바뀌지 않은 곳이다. 정부는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16만5천명의 이주노동자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느 해보다 노동시장에서 이주노동자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이주노조 사무실에서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을 만났다.

이주노조 합법화 투쟁의 10년

여느 이주노동자처럼 라이 위원장도 젊은 날 성공을 꿈꿨다. 원래는 일본에 가기 위한 교두보쯤으로 한국을 생각했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고향인 네팔까지 흘러들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일본행은 좌절됐고 한국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기대와는 달리 너무 큰 차별을 마주했다. 언어의 한계도 느꼈고 임금체불, 폭행과 폭언 등 상상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지내던 중 함께 일하던 동료가 노조를 소개해 2001년 평등노조 이주지부에 가입했다. 2004년 한국인 아내를 만나 2007년 결혼비자를 얻고 마침내 한국에 정착했다. 2009년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에 가입해 2012년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2014년 9월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라이 위원장의 노조활동은 법에 보장된 ‘노조할 권리’를 찾는 것부터 출발한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이어진 ‘이주노조 합법화 투쟁’은 이주노조 초대 임원들이 강제 추방과 표적 단속을 감내하며 10년간 이어졌다. 고용노동부는 2005년 6월 이주노동자의 노조 설립신고를 반려했고, 노조는 반려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2월 내려진 1심은 노조가 패소했지만 2007년 2월 2심은 ‘노조 설립 반려가 부당하다’며 이주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이 진행되는 사이 아노아르 후세인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 초대 위원장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에 걸려 1년여간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뒤 2007년 방글라데시로 강제추방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법원에서만 8년간 계류됐던 사건은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끝에 이주노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그해 8월20일 이주노조는 마침내 노동부에서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합법화 이후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라이 위원장은 “많은 것이 변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꼽았다. 이주노동자가 권리에 기초해 다양한 요구를 하거나 면담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주노조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또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에게 노조 가입을 권유하거나 활동을 제안할 때도 많은 희생을 결심해야 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고용허가제 도입 20년, 후퇴하는 이주노동자 인권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 이후 이주노조의 활동은 온통 ‘고용허가제와의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불리한 여러 조항 탓에 ‘노예제와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20년 가까이 노조 활동을 해 온 라이 위원장이 “이주노동자가 처한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고용허가제에서 이주노동자가 출국과 재입국 과정을 거쳐 최대 9년 8개월을 우리나라에서 일할 수 있다. 사업장 변경의 횟수와 사유가 법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특별한 사유가 아니라면 사업주와 합의해 사업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 변경’이라는 권력을 쥔 사업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는 지역 이동 제한도 추가돼 최초 입국한 지역 안에서만 사업장을 바꿀 수 있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더욱 제한된 것이다.

고용허가제에서는 이동권뿐 아니라 주거권도 제약받는다. 2020년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난방이 되지 않는 비닐하우스에서 사망한 이후 정부는 가설건축물을 기숙사로 금지하는 다소 진전된 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 역시 지방자치단체의 승인이 있으면 가설건축물을 기숙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나아진 것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2014년에는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의 퇴직금을 출국 후 수령하도록 했고 2017년에는 이주노동자 숙식비를 월급에서 선제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 지침을 만들었다. 이주노조는 제도가 개악될 때마다 ‘공동행동’을 만들어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계도 컸다. 우선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9년이 지나면 출국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노조에 가입하는 데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라이 위원장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자’는 마음이 들면서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면 화가 나는 것이 사실”이라며 “전 세계에서 경제 규모 10위 안에 드는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이 이러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 씁쓸할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한계 속에서도 이주노조는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2014년까지 대학생들과 함께 ‘이주노동자 한글학교 레인보우 스쿨’을 열기도 하고, 2018년과 2020년에는 ‘이주노동자 투쟁 투어 버스(투투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의정부, 여주, 양평, 성남, 서울 등 수도권 중심으로 이주노동 활동가들이 찾아가 노동청 관계자들을 상대로 사업장 변경을 늦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항의면담을 진행하거나 임금체불, 기숙사 문제 등이 산적한 지역의 사업주에게 항의하는 내용의 집회를 열었다. 2022년에는 여러 인권·사회단체들이 ‘찾아가는 인권버스’를 운행하기도 했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권리라는 가치가 사라지는 한국 사회 우려”

라이 위원장은 고용허가제의 대안으로 ‘노동허가제’를 꼽는다. 고용허가제가 제한하는 각종 자유와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노동허가제의 골자다. 가족 이주를 보장하고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것, 또 체류 기간 제한 대신 정주를 목표로 설정할 것,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허가제를 요구하는 배경은 ‘권리’다. 그는 권리와 평등 같은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는 우리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까 불쌍해서가 아니잖아요. (사람으로서)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권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주노조가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연대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언젠가는 한국 사회도 바뀔 것이라고 믿지만 ‘(이주노동자는) 권리 같은 이야기 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영영 바뀌지 않을까 걱정도 되죠. 코로나19 시기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백신을 맞을 권리나 가장 기본적인 건강권에서 차별받은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이주노조가 걸어 온 길

2000년 이주·취업의 자유 실현과 이주노동자 노동권 완전 쟁취를 위한 투쟁본부 결성
2001년 5월19일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창립
2003년~2004년 11월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명동성당 투쟁’ 380일간 농성 진행
2005년 4월 서울경기인천 이주노조 창립
2005년 6월 고용노동부,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
2006년 2월 서울행정법원 원고 패소 판결
2007년 2월 서울고등법원 원고 승소 판결
2007년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투쟁 전개 및 이주탄압분쇄 비상대책위원회 기독교회관 99일간 농성
2010년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강화돼 명동 향린교회에서 30일간 단식농성
2014년 정부가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퇴직금 출국 후 수령으로 개정
2015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원고 승소 판결로 이주노조 합법화
2017년 정부가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숙식비 징수 지침 시행
2018년 이주노동자 투쟁 투어 버스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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