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매일노동뉴스가 노동을 바꾸는 사람 24명을 만납니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부조리한 노동의 세계에 작지만 확실한 균열을 내고 변화를 만드는 이들입니다. <편집자>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노무법인 ‘돌꽃’ 사무실 한편에는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 사이로 ‘맥주 한 잔 하실래요?’라고 쓰인 액자가 있다. MBC 생방송 뉴스프로그램 <뉴스투데이>에서 일하다 해고된 방송작가가 전달한 선물이다. 법인 대표노무사 김유경(51)씨에겐 남다른 의미를 가진 상장이다.

‘맥주’는 김 노무사에게 승리를 뜻하는 암호였다. 2021년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심문회의 결전의 날을 앞두고 해고 당사자와 일종의 암호를 만들었다. 이미 초심에서 ‘각하’라는 결정을 받아봤던 터라 지면 소주를, 이기면 맥주를 마시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해 3월19일 심문회의를 마치고 방송작가유니온(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회의실에 모인 이들 양손에는 소주와 맥주가 들려 있었다. 저녁 8시2분 중노위 메시지를 받은 김 노무사는 “맥주 한 잔 하실래요?”라고 말했고, 주변에선 환호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안도와 환희의 시간은 ‘싸우는 여자들’이라는 이름의 짧은 영상으로 남았다. 중노위 판정 이후 MBC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도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판단했다. 해당 영상은 “작가들은 2022년 가을 MBC에 복귀했다”는 자막으로 끝이 난다.

복직 이후 1년여가 흐른 지금, ‘싸우는 여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기존 정규직과의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방송 비정규직 ‘인정투쟁 2라운드’에 돌입한 국면에서 첫 판정을 이끈 김유경 노무사를 만났다.

 

‘이 사람들이 노동자가 아니면 누가 노동자야’

MBC 작가와 김 노무사가 함께 쏘아 올린 공은 방송 비정규직 투쟁에 큰 파장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노동위·법원에서 잇따라 작가 포함 아나운서·PD 등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잇따라 노동자로 인정받았다.

김 노무사도 처음부터 방송 비정규직 문제에 깊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첫 단추는 우연히 흘러 들어간 직장갑질119 직종별 모임 ‘방송계갑질119’ 활동이었다. 모임을 만들 때 본인의 1지망은 IT쪽이었는데 원치 않게(?) 언론노조 경력을 이유로 방송쪽을 담당하게 됐다.

스태프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상품권 페이’ 공론화부터 CJB청주방송 이재학 PD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까지. 그야말로 ‘비정규직 백화점’에 열악한 노동실태를 체감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2020년 여름, 작가 1명이 돌꽃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MBC <뉴스투데이>에서 9년간 일하다 일방적으로 해고돼 억울하다고 했다.

“‘이분들이 근로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근로자야’ 이런 생각을 했어요. 10년 가까이 생방송을 위해 매일같이 새벽에 출근하고, 기자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 원고작성 이후 수정 지시를 받는데, ‘프리’한 여지가 ‘1’도 없어 보였거든요.”

그는 계약의 형태보다 근로 실질을 살펴봤을 때 ‘방송사 직원’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법리로나, 업무 내용으로나 정규직 기자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선례가 없다는 장벽은 생각보다도 거대했다. 결론은 각하였다. 부당해고 구제신청 자격이 없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당사자들은 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했다.

담당 조사관 7시간 대면조사 … 기자 참관 ‘작전’도 실행

“초심 판정을 무조건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건마저 인정이 안 되면 영원히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은 인정 못 받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사건에만 오로지 집중했습니다. 지금 또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웃음).”

재심부터 방송작가유니온이 결합해 단순 법률 사건이 아닌 비정규직 투쟁으로 전환됐다. MBC 앞 1인시위 등을 시작하며 사회적 관심도 커졌다. 운도 따라줬다. “본연의 업무를 200% 충실하게 해낸” 중노위 사건 담당 조사관을 만난 것이다. 조사관은 심문회의가 열리기 전, 서면 검토 시점에 당사자와 김 노무사를 세종으로 불러 대면조사를 했다. 장장 7시간에 걸쳐 ‘구성작가가 무엇인지’부터 세세한 질문이 이어졌다.

‘복불복’이라 불리는 공익위원 명단도 다행히 법률 전문가로 꾸려졌다. 단편적 사건이 아닌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언론사 기자 참관이라는 ‘작전’도 실행했다. 재판과 달리 심문회의는 보통 노사 양쪽만 참석해 ‘비공개’로 진행된다. 모든 박자가 맞아떨어졌고, 심문회의 당일 저녁 역사적 판정을 받아안게 됐다.

IT전문 일간지 기자 10년
4년간 노조활동 ‘터닝 포인트’

김유경씨는 올해 10년차 노무사다. 2015년 10월 노무사로 일하기 전까지 그의 직업은 기자였다. IT전문 일간지 전자신문에 2000년에 입사해 10여년을 기자로 일했다. 2000년대 초반 ‘IT 붐’ 속에서 소프트웨어·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전 등 출입처를 거쳤다.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노조 전임자 활동이 터닝 포인트가 됐다. 출산 직후 ‘숨고르기’ 차원에서 노조 사무국장을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언론노조 전자신문지부는 편집권 침해 등에 맞선 투쟁의 깃발을 올리던 때였다.

“선배들한테 완전히 속은 거죠(웃음). 사무국장으로 처음 한 일이 주요 주주들이 상근하는 회사 앞 1인시위였거든요.”

사무국장 1년 재임 후 지부장까지 맡아 3년 더 노조활동을 했다. 4년 내내 ‘투쟁모드’였기 때문에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CEO나 사용자쪽이었어요. 듣는 것도 성과나 신기술 개발 같은 이야기였죠. 그런데 노조에 있던 4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우리 싸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정도로 너무 많은 싸움의 현장이 곳곳에 있었던 거예요.”

“입직 경로가 사회적 신분으로 작동
비정규직-정규직 구분, 합리적인지 의문”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김 노무사는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수습생활을 마치고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바위 위에 낮게 무리 지어서 피는 ‘돌꽃’을 이름으로 택했다. 척박한 현실에서 무리 지어 싸우는 노동자들 곁에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실제로 그는 법률 상담과 서면 작성만이 아니라 방송사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피켓을 들었다.

사건은 노동위 판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투쟁 끝에 일터로 어렵게 돌아가도 ‘괘씸죄’로 고립됐고 실질적인 노동조건도 나빠지기 일쑤였다. MBC <뉴스투데이> 작가들만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복직생활은 대부분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사회적 신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용형태가 분류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사용자가 사람을 뽑을 때예요. 프리랜서로 채용되면 10년을 일해도 퇴직금을 못 받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된 그 기준 자체가 합리적인지 묻고 싶어요. 한 프로그램에 40명이 일한다고 치면 여기서 1명만 빠져도 방송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누가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사자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김 노무사는 이들과 나란히 걷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그에겐 이재학 PD 사건 투쟁부터 함께한 이들이 있었다. 지난해 9월1일 출범한 노동인권단체 ‘엔딩크레딧’은 비정규직 투쟁에 정규직의 연대를 꿈꾼다.

“‘노동자는 하나다’ 같은 거룩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손잡아야 할 때가 필요한 거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연대, 이걸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단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고은 기자

김유경 노무사가 맡았던 사건들

김유경 노무사는 여러 방송 비정규직 사건을 수임해 근로자성 인정 판정을 이끌었다. 각각의 사건들은 사업장만 다를 뿐 양상이 비슷했다. MBC <뉴스투데이> 작가들은 9년간 일한 직장에서 방송사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 한 방송국에서 6년 넘게 일한 KBS전주 <생방송 심층토론> 작가는 명확한 사유도 듣지 못한 채 재계약이 어렵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리한 법적 다툼을 거쳐야 했다.

MBC와 KBS전주 작가는 모두 일터로 복귀했지만 온전한 의미는 원직복직은 아니다. MBC는 작가 직군을 신설해 정규직과 다른 임금체계, 휴가·병가 제도 등을 적용하고 여전히 차별하고 있다. KBS전주는 해당 작가를 작가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에 배정했다. 경남CBS에서 일하다 해고된 아나운서의 경우 사측이 원직복직 명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당초 프리랜서로 복직시켜 논란이 됐다. 방송사의 각종 꼼수 대응으로 ‘무늬만 원직복직’이 이어지며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싸움도 끝날 수 없는 상황이다.

어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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