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우여곡절 끝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에 시행됐다. 이에 앞서 국회에서는 법 개정 공방 속에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이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여당의 네 탓 내 탓 실랑이가 이어졌다. 28일 <매일노동뉴스>가 산업안전보건청을 둘러싼 논쟁의 진원지를 짚어봤다.

◇법 시행 10일 앞두고 민주당의 산업안전보건청 요구?=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25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 통과가 불발되자 브리핑을 열고 민주당의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요구가 법 시행 열흘 전인 1월16일 갑자기 나왔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사실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유예 조건으로 내건 세 가지는 △정부의 공식 사과 △산업현장의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재정지원 방안 △재유예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경제단체의 약속 등이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11월23일 오전 국회 본청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이같은 조건을 내걸며 산업안전보건청을 거론한 바 있다. 홍 원내대표는 “만약에 2년간 유예될 경우 향후 그 2년간 산업현장의 안전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재정지원 방안을 갖고 오길 바란다”며 “정책위 의장 시절에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선진국에 있는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내용들을 포함해 산업현장의 안전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와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홍 원내대표의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포함한 계획’ 발언은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여야 논의에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16일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민주당은 보다 명확한 입장을 내놨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과 산재예방 직접예산을 1조2천억원에서 2조원으로 증액하고, 올해 집행계획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안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한 계기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은 오래된 민주당의 당론이었고, 이재명 대표도 2022년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안전보건청 설립을 노동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실패는 민주당 탓?=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2020년 7월 이미 발의된 상태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 끼임 사망사고, 2020년 이천 물류센터 화재 등 산재가 반복되니 김영주 민주당 의원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동부 장관 소속 산업안전보건청 설치하는 내용으로 산업안전보건 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인력을 확보해 전문성을 제고하고, 산재를 예방하자는 취지다. 당시 법 개정안 발의 과정에서 민주당·정의당 의원 40명이 동의했다. 당시 대세였다는 의미다.

이은주 전 정의당 의원도 2021년 3월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내용으로 한 법안을 발의했다. 김영주 의원안이 산업안전보건청의 역할을 산업안전보건 기준의 설정·관리, 산재 조사·방지 등에 국한한 반면, 이은주 의원안은 산재보험에 관한 내용도 청이 맡도록 했다. 하지만 두 법안의 논의는 국회에서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다만 국회의 책임만으로 미룰 수도 없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포함한 산업안전보건 행정체계 개편은 2020년 4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노사정이 합의한 내용이기도 하다. 2020년 4월 노사정은 “산업안전보건행정의 구성원들이 직무에 대한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역량을 제고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의 특성을 실질적으로 반영한 채용·교육훈련 및 경력관리 시스템(인사구조)을 마련하고 중장기적으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포함한 시스템 개편을 검토·추진”한다고 합의했다.

노동부도 2021년 구체적인 시점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2단계에 걸쳐 추진하겠다고 했다. 2021년 7월 산업안전보건국을 산업안전보건본부로 격상시켜, 인력을 대폭 확대한 것은 전초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같은 기조는 사라졌다.

◇산업안전보건청 필요한가?=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에 대한 찬반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문성이 축적되기 어려운 국내 산업안전보건 행정체계의 고질적 문제에 대한 안전보건 전문가들의 인식은 대동소이다. 산재 예방·감독·수사 등을 담당하는 노동부 직원들은 인사구조상 순환보직을 하고, 안전보건 관련 문제가 익숙해질 때쯤 소관 부서·업무를 떠나 전문성이 축적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고조사 업무는 안전보건공단과 안전보건진단기관이 맡으면서 노동부가 사고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산재 예방 행정으로 연결시키는 역할도 충분히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청을 만들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고비용 저효과의 행정이 될 수밖에 없다”며 “산업안전보건의 경우 법과 규제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전문성이 없으면 아무리 민간에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노동부의 사고조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비전문성은 중대재해 등의 근본 원인 조사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재발방지 대책의 부실과 미이행 그리고 사회적 인식 확대 미흡으로 연결된다”고 덧붙였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노사정 합의도 있었고, 정부가 예방업무를 책임감 있게 하려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예를 들어 노동부 장관이 말하는 연장근로 문제 등은 (노동자 안전보건 문제와) 상충되는 면이 있는데, (외청이 있다면) 지금처럼 동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한국에서 산업안전보건청을 만든다면 산업재해에 대해 중요하게 제기되는 과로사 문제를 포괄해 해결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청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적인 안전보건연구원 설립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교수(안전관리학)는 “안전보건연구원 설립이 시급하다”며 “안전보건공단 산하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있지만 연구원은 30~40명으로 1977년 국제노동기구(ILO) 재정지원으로 국내에서 설립한 국립노동과학연구소(40명)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단적인 예로 소음은 환경 분야에서도 연구하고 안전보건 분야에서도 연구해야 하는데, 국립환경과학연구원에는 소음 관련 연구자 10명가량이면, 안전보건 분야 소음 연구자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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