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택단지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들. 수십 킬로그램의 에어컨과 실외기를 옮기는 에어컨 설치·수리 기사들은 중노동과 추락사고 위험에 시달린다. <자료사진 금속노조>

1인 자영업자로 대구지역에서 에어컨 수리·설치 일을 하는 A씨(사망 당시 만 64세). 그는 2022년 11월 에어컨 설치 일을 나갔다가 고객 집에서 쓰러져 숨졌다. 사인은 허혈성심장질환(급성심근경색).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청구했는데 최근 승인을 받았다. 고인이 생전 중소기업 사업주 산재보험에 가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들은 A씨처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신체·정신적으로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300명 미만 사업장 사업주와 1인 자영업자들은 산재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서
에어컨·실외기 들고 오르락내리락

A씨는 1987년부터 대구에서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사업체를 홀로 운영해 왔다. 주로 하던 일은 에어컨 설치 및 수리업무였다. 삼성전자에게 가전제품 수리·설치를 외주받은 한 업체와 업무 위·수탁 계약을 맺고 아파트나 주택 등에 에어컨을 설치해 왔다.

고인이 사망한 2022년 11월16일에는 삼성전자 물류센터에 방문해 당일 설치할 벽걸이형 에어컨을 상차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배송한 에어컨의 무게는 12.5킬로그램이었고 실외기는 40킬로그램에 달했다. 오후께 고인은 일을 돕는 아내와 함께 배달지인 경북 칠곡에 있는 상가건물 옥상에 설치된 가건물에 방문했다. 옥상은 4층 높이였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고인은 상가건물에 도착해 옥상에 올라갔고 다시 내려와 에어컨과 실외기를 들고 4층 높이의 건물을 3번 오르내렸다. 고인의 아내에 따르면 여러 번 1층과 옥상을 왕복한 고인은 땀을 많이 흘리고 숨을 거칠게 쉬었다고 한다.

옥상 가건물은 원룸처럼 꾸며져 있었다. 사건은 방 안 침대에 여성의 외형을 본뜬 ‘리얼돌’을 보면서 발생했다. 고인의 아내에 따르면 고인은 건물 안에서 10여분간 준비작업을 거쳐 에어컨을 설치하던 중 침대에 놓인 리얼돌을 보고 놀라 뒤로 쓰러졌다. 고인이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을 본 거주자가 “아저씨”라고 소리쳤고, 이를 들은 고인의 아내가 심폐소생술을 하며 거주자에게 119 신고를 요청했다. 이후 고인은 119를 통해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이날 오후 6시께 숨졌다.

“높은 업무강도, 정신적 긴장으로 심근경색”

고인은 생전 음주나 흡연 경력이 없었다. 고혈압이 있었지만 꾸준히 약을 복용해 관리하고 있었다. 부검 등을 통해 확인된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에 의한 심정지였다.

업무시간은 고용노동부 과로사 고시 기준에 다소 미달했다. 노동부는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 고시를 통해 뇌, 심장, 근골격계 질환의 업무상 질병 관련성을 판단한다. 이 고시에 따르면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와 질병과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하고,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업무와 질병과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대구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확인한 고인의 업무시간은 이보다 적은 수준이었다. 질병판정위는 구글 타임라인 및 설치 내역 자료를 근거로 업무시간을 산정했는데, 발병 전 일주일동안 업무시간은 55시간30분이었다. 발병 전 4주 동안 업무시간은 1주 평균 43시간29분,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은 1주당 평균 47시간46분으로 확인했다.

높은 업무강도는 인정됐다. 노동부는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하지 않더라도 교대제 업무, 휴일이 부족한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 가중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되는 업무라면 업무와 질병과의 관련성이 증가한다고 본다. 고인의 경우 최대 22킬로그램에 달하는 에어컨과 실외기 등의 중량물을 취급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에 해당한다고 봤다. 실외기를 설치할 때 높은 곳에 올라가 작업하기 때문에 긴장해야 하고 사망 당일을 포함해 10일간 휴일 없이 연속해 일한 사실이 확인됐다.

질병판정위는 “업무시간이 만성과로 기준에 다소 부족하지만 중량물 취급으로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를 수행했고 고소작업으로 인한 정신적 긴장을 동반했다”며 “고인은 평소 혈압관리를 적절히 하고 있었고 고인의 연령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고인의 사망은 업무상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산재보험 가입 덕 유족 보상 가능
“임의가입이라 산재보험 가입률 낮아”

질병판정위는 리얼돌로 인한 돌발상황은 없었다고 봤다. 고인 아내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보면 설치 작업을 시작하기 전 고인 아내와 고인이 함께 리얼돌을 목격했고 고인은 방 안에서 (이를 인지한 채로) 작업했기 때문에 돌발상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노동부 고시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 3에 따르면 질병 등이 발생하기 전 24시간 이내에 업무와 관련된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급격한 업무 환경의 변화로 심근경색 등이 발병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본다.

이번 사건에서 유족을 대리한 신현국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사람과 산재)는 “이번 사건은 중소기업 사업주의 산재보험 가입이 흔치 않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고인은 1인 자영업자이자 중소기업 사업주로 2020년 9월 산재보험에 가입했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홀로 일하는 자영업자는 415만9천명인데 산재보험 가입자는 1만6천76명(0.38%) 뿐이다. 300명 미만 사업장의 사업주이거나 종사원이 없는 사업주라도 원한다면 누구나 중소기업 사업주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중소기업 사업주 산재보험 가입은 2015년 1만8천671명에서 2021년 4만8천103명, 2022년 5만1천174명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지만 의무가입해야 하는 고용보험 대비 가입자는 무척 저조한 수준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 5명 미만~300명 미만 사업장 중 고용보험 가입 사업장은 250만6천603개에 달했다.

1인 사업주를 포함한 중소기업 사업주 산재보험 가입률을 높여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계청이 매달 조사하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고용원이 없는 사업주, 즉 1인 사업주는 423만4천여명이다. 신 노무사는 “1인 사업주를 포함한 중소기업 사업주 산재보험 가입률이 낮은 근본적 원인은 임의가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홍보를 통한 인식 개선 등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1인 사업주는 사용자가 있는 근로자와 유사하게 일하는 데다가, 5명 미만 사업장 재해율이 높은 것처럼 재해율이 매우 높을 가능성이 있어 의무가입 전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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