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오늘 지긴 했지만….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온라인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ID 데프트)가 2022년 월드 챔피언십 16강 전에서 패배한 후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인터뷰 기사 제목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얼마 뒤 극적으로 8강에 진출한 그의 팀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중꺾마’의 탄생이다. 중꺾마 열풍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계기로 확산됐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유행어가 됐다. <매일노동뉴스>가 2023년 10대 노동뉴스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올해의 중꺾마를 선정했다. <편집자>

먹튀 기업 상대로 꺽이지 않는 투쟁
사회적 고용기금으로 ‘결실’

물량감소에 따른 고용불안이 확산하자 ㈜한국와이퍼블레이드 노동자는 회사에 고용보장을 요구했다. 그 결과 2021년 10월 한국와이퍼 노사는 물량확보와 노동자 총고용을 보장하는 합의를 체결했다. 모회사와 계열회사인 일본 덴소와이퍼시스템과 덴소코리아가 합의 이행에 연대책임을 지는 내용까지 담았다. 그러나 고용안정을 확약받았다는 안도는 잠시였다. 회사는 고용안정 협약 체결 9개월만인 2022년 7월, 폐업 계획을 통보했다. 올해 1월 공장 문을 닫겠다는 것이었다.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의 ‘꺾이지 않는 투쟁’이 시작됐다. 단식과 오체투지, 공장점거 등 할 수 있는 방안은 총동원 했다. 지난 8월 노사는 고용기금 마련을 뼈대로 한 의견일치안에 합의했다. ‘중꺾마’ 정신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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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하겠다는 회사를 상대로 싸워 이기는 일은 쉽지 않다. 긴 투쟁이 예상됐다. 그럼에도 시작했고 1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 이유를 묻자 최윤미 분회장은 “너무 정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산을 이유로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 아이들한테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 고용안정 합의서가 있었고, 정부라는 존재가 있었고,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으니깐요. 상식에 기초한 일이니 자신 있게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월15일 회사는 노조가 지키고 있는 공장에서 장비를 반출, 청산하려 시도했고 경찰력 700여명이 이를 지켰다. 경찰은 노조가 약속을 지키라며 장비반출을 저지하는 행위가 업무방해라고 해석했고, 노동자 4명이 연행됐다. 믿었던 국가의 배신이었다.

최 분회장은 당시를 가장 분노했던 날로 기억했다. 그는 “고용안정 합의가 단협에 버젓이 있는데, 고용노동부는 외국자본이라 본사가 외국에 있어 역할하기 힘들다고 하고, 경찰은 노동자 200여명 잡겠다고 700명의 경찰력을 동원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돌이켜보면 사실 매 순간이 위기였다. 하지만 200여명의 조합원이 똘똘 뭉쳐 서로의 버팀목이 됐다. 그리고 승리했다. 과실은 함께 나누기로 했다. 투쟁 끝 받아낸 고용기금은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을 위한 재고용 지원사업, 중장년층·여성 등 사회적 고용약자를 위한 고용안정 지원사업에 쓰인다.

쉬운 정규직 해고 본보기 돼선 안 돼
호텔·서비스업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것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승리를 그리며 투쟁하는 노동자도 있다. 경영악화를 이유로 해고된 세종호텔 노동자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52일째(22일 기준) 파업 중인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가 주인공이다.

세종호텔은 코로나로 인해 경영이 악화됐다며 직원 15명에게 2021년 12월10일부 해고를 통보했다. 지금은 노동자 7명이 남아 세종호텔 앞 천막농성을 하며 원직복직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은 “코로나 때문에 해고가 된 것인데, 코로나가 종식된 지금 일터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복직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지부에 유리하지만은 않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1월 지부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마음 시리게 하는 판결이다.

체감온도 20도에 가까운 혹한, 칼바람은 눈치도 없이 천막을 때리는데 해고노동자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이유는 사람이다. 고 지부장은 “해고가 2년이 넘어서고 있지만 각종 연대를 해주는 주변의 동지가 많다”며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지부는 천막농성뿐 아니라 매주 목요일마다 원직복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다. 길어지는 투쟁에 생활이 녹록지 않지만 바자회를 열어 물품을 판매하거나 후원주점 등을 열어 투쟁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싸움은 노동자 7명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만은 아니다. 십여 년 전 세종호텔에서 일하던 정규직 노동자는 200명이 넘었다. 하지만 2021년 정리해고를 거쳐 호텔에 남은 정규직원은 20여명 수준이다. 정규직이 떠난 일자리는 비정규직이 채웠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투쟁은 외주화를 확대하는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의 싸움인 셈이다.

고진수 지부장은 “정규직들 해고가 이렇게 쉽게 이뤄지면 호텔 사업 등 서비스 산업은 대부분 하청·비정규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며 “괜찮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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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 파업, 50일 넘겨
“좋은 일자리 만들기 위한 투쟁”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조합원 700여명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50일 넘게 파업 중이다. 이들의 요구는 단슨하다. 현재 도급업체 소속 상담노동자 전원을 공단 소속기관으로 직접고용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단은 2019년 2월27일 이후 입사자들은 직업기초능력평가(NCS)를 통해 공개경쟁 채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쟁채용 대상 노동자는 700명인데 경쟁채용을 할 경우 직접고용 여부가 불확실하다. 길게는 5년여간 건강보험을 위해 일해 온 고객센터 노동자에게 다시 업무능력을 입증하라는 것도 황당한데, 하던 일을 그만둘 각오를 하고 채용시험에 응하라는 것이다.

공단이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노동자 파업은 길어지고 있다. 지부의 한 조합원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 파업을 힘내서 하고 있다”며 “내년 4월이면 용역업체 재계약이 예정돼 있어 소속 업체가 바뀔 수도 있다. 생계문제도 포기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조합원은 “결국 우리 투쟁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라며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은 내놓지 않으면서 민생을 책임진다는 윤석열 정부 말은 거짓말”이라고 꼬집었다.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의 파업이 계속되는 이유다.

투쟁은 종종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상흔을 딛고 견디다 보면 투쟁은 성공하고, 다른 이의 희망, 또 다른 길이 된다. “노동자를 쉽게 해고해선 안 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라” 구호를 외치며 나아간 길에 뒤따르는 동료가 늘어나면 그때 구호는 주장이 아닌 시대의 상식이 된다. 그래서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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