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올해 보도사진 중 가장 충격적인 사진 하나를 고르라면 머리에서 피를 흥건하게 흘리는 한 사람이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사진일 것이다. 올해 5월 마지막 날. 그는 8미터 높이의 철탑에 올라 사다리차로 다가오는 경찰 네 명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사다리를 내리쳤다. 경찰은 곤봉으로 15차례 그의 머리를 가격했고, 그는 쓰러졌다.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자 과잉진압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정당한 법 집행이었다고 맞섰다.

사진 속 주인공은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56·사진)이다. 김 처장은 그 자리에서 연행돼 6월 구속됐다. 쇠파이프를 휘둘러 형사 3명의 손 등을 다치게 한 혐의를 받았다. 5개월간 감옥에서 지내다 지난달 보석으로 풀려났다.

진압 직후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원장 시절 그를 평가한 글이 회자됐다. 2013년 동아일보에서 뽑은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든 김 처장을 두고, 이 장관은 “원칙을 견지하되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현실에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노동운동의 희망이다”고 했다.

정확히 10년 뒤인 올해, 그는 한국에서 주목받는 노동운동가 중 한 명이 됐다. 그의 인지도와 그를 향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속노련 사무실에서 김 처장을 만났다. 몸이 성치 않은 상황에서 시작한 수감생활부터 현 정권을 향한 메시지, 한때 뜻을 함께했지만 각자의 선택을 한 동지들과의 사이까지 들어봤다.

“노조활동하다 이렇게 심하게 맞은 건 처음”

김 처장이 석방된 뒤 주위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건강’이다. 감옥에 들어갈 때 몸이 성치 않아서였다. 머리를 맞은 데다가 오른쪽 무릎 연골이 파열되는 상처도 입었다. 철탑에 오를 때부터 단식을 시작했고 구속 뒤에도 단식을 이어 갔다. 기력이 떨어져 연골 파열 치료도 받지 못했다. 건강 상태가 너무 나빠지자 연맹이 단식 중단을 강력히 권고했고, 단식 16일 만에 이를 수용했다.

현재 건강은 많이 나아졌다. 그는 “아직까지 피 흘리는 사진으로 저를 기억하고 있으셔서 건강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건강은 거의 회복했고 녹색병원에서도 건강검진을 다 해 주셨는데 후유증이 없는 걸로 나왔다”며 “오히려 감옥을 나온 뒤 연말 술자리가 많아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1년부터 노조활동을 한 지 33년이 됐지만, 올해 5월처럼 흠씬 맞아 본 적은 없다. 정확히는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 김 처장은 “회사 구사대들하고 투닥대다 멍들고, 몸싸움하다 옷이 다 찢어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심하게 맞은 적은 노조에선 처음이다”고 했다. ‘학생운동 시절에는 병원을 많이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때도 최루탄 파편이 몇 개씩 박히기도 하고 곤봉으로 맞기는 했지만 멍이 든다고 병원을 가진 않잖냐”며 “제가 좀 회복력이 빠르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학생운동 시절 크게 다친 적은 “머리 근처에서 ‘사과탄’이 터졌을 때”라며 옛날 경험을 들려줬다.

성균관대 철학과 86학번인 김 처장은 1987년 6월12일 쁘렝땅 백화점(현 장위빌딩) 앞에서 시위를 하다 얼굴 바로 앞에서 사과 모양의 최루탄, ‘사과탄’을 맞았다. 플라스틱 파편 200여개가 오른쪽 눈 주변과 머리에 박혔다. 피를 흘리며 겨우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다. 수술을 해도 100여개만 뽑아낼 수 있다고 해 수술은 하지 않았다. “오른쪽 얼굴이 완전히 새까맸다”며 “눈에 든 피멍은 6개월동안 빠지지 않아 안대를 하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파편은 후에 피부 위로 올라와 제거됐다. 정말 그의 말처럼 회복력이 좋은 건지, 그의 웃는 얼굴에서는 흉터를 찾아볼 수 없다.

말 못해서 힘들었던 수형 생활

김 처장은 “아픈 것보다 힘들었던 건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김 처장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그에게 말할 상대가 없는 환경은 고역이었다. 그는 “제가 평소에 떠드는 양이 있는데 하루 운동시간 30분, 면회시간 10분 외에는 말을 못했다”고 말했다. ‘면회자가 많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면회를 매일 와 주셔서 정말 감사했지만, 그 시간을 포함해도 평소 말하는 양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고 했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해 책을 들었다. 처음에는 독후감처럼 줄도 치고 메모도 하며 읽었는데, 나중에는 빠르게 넘어가는 책들을 더 많이 보게 됐다고 한다. 재미있고 빠르게 읽은 책으로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노회찬 평전>, <같이 가면 길이 된다>를 꼽았다. 다시 봐야 할 책으로는 <평균의 종말>을 소개했다. “감옥이 아니었다면 평소 읽지 못했을” 책들이었다.

<매일노동뉴스>를 읽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각종 노동소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감사하게도 감옥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도 제가 심심할까 그랬는지 제 이야기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감옥에서보다 외부에서 더 힘들게 투쟁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연대해 준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 읽는 게 지겨워지면 그림을 그렸다. 수감자에게 제공되는 검정·파랑·빨강색 플러스펜과 형광펜, 심지어 커피까지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했다. “플러스펜 꼭지에 물을 살짝 적신 뒤 짜고, 붓은 일회용 커피믹스 봉지 끝을 접어서 썼어요.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평소 글보다도 좋아요가 많이 눌렸더라고요.” 그의 옥중 편지와 그림은 연맹과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가 있다.

‘이번 경험을 책으로 쓸 생각은 없느냐’고 제안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감옥에서 유시민 작가 책도 여러 권 읽었는데,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나는 글 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좌절했어요. 제가 책을 내는 건 독자들에게 나쁜 상품을 강매하는 격이 될 것 같아요.”

“33년간 일관되게 싸웠고, 필요하면 합리적 선택”

감옥에서 소통이 고팠던 그는 편지로 외부와 소통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편지들을 읽고 외부의 사람들이 궁금해한 것은 답장에 담았다. 금속노련 SNS를 통해 외부로 알려졌다.

가장 주목을 모은 글은 6월22일 공개된 첫 편지다. 김 처장은 “몇몇 편지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처장이 ‘왜’라는 의문과 걱정을 담았더라”며 “왜 합리적인 너가 그러냐는 말에, 33년 노동조합을 하면서 한결같은 태도로 노동운동에 임해 왔는데 그것이 약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싸워야 할 땐 싸웠고, 유연한 태도가 필요할 땐 합리적인 선택을 해 왔다는 얘기다.

이런 노동운동을 일관되게 해 왔다는 사실을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방안을 합리적으로 선택해 온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두 가지 예시를 내놓는다. 첫 번째는 2002년 12월 말 부천시노동복지회관에서 했던 농성이다. 당시 노조를 조직한 조합원들은 위탁업체가 변경될 때 고용승계가 되지 않아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부천지역노조 위원장이었던 김 처장은 복지관 문을 걸어잠그고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농성장에서 2002년 대선 개표방송을 다 봤다”며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복지관을 지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두 번째는 2021년 오비맥주 경인직매장 조합원들의 해고 사태다. 오비맥주 경인직매장에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한 후, 조합원들은 도급업체가 변경될 때 고용승계가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해고당했다. 조합원들은 278일간 경인직매장 앞에서 농성을 벌였고, 김 처장은 고용보장이 아닌 금전적 보상 합의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복지관을 점거했던 김준영, 노조를 만들었다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오비맥주 경인직매장 조합원들에게 고용보장이 아닌 돈으로 합의하게 한 김준영, 철탑을 오른 김준영은 다르지 않다.” 김 처장이 편지에 적은 내용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33년을 똑같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 오며 운동해 왔다”고 힘 줘 말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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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노조법 2·3조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

8미터의 철탑에 올랐던 건 합리적인 것일까. 그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라면 그렇다. 결과적으로 김 처장이 철탑을 오른 후 갈등은 일단락했다. 구속된 뒤 두 달이 흐른 8월, 김 처장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 1년이 넘어가면서도 체결되지 않던 포스코 하청업체 포운과 광양지역기계금속운수산업노조 간 단체협약이 체결됐다.

김 처장은 광양 현장에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잘 조정해서 마무리해야지”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1주일간 현장을 살핀 뒤 “단위노조 힘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고 느꼈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조합원들처럼 투쟁 수위를 올리는 것밖에 답이 안 보였는데, 조합원에게 강요할 순 없었습니다. 포스코와 포운이 나를 해고할 수는 없고, 다만 막대한 손해배상의 위험은 각오해야 했지요. 포스코가 여론과도 싸워야 하니 부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포운과 노조 갈등의 본질은 포스코와 성암산업(포운의 전신)이 2020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맺은 사회적 대화 정신 이행이었다. 김 처장은 처음 갈등이 발생했을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쉽게 말해 회사 하나를 공중분해시켜 고용은 지켜준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은 단협도 없어지고 임금과 근로조건이 낮아지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기존처럼 일하게 해 달라는 거였다.”

최초 갈등의 시작은 포스코의 하청업체 쪼개기였다. 2020년 3월 포스코는 성암산업의 작업권과 장비를 쪼개 5개 협력사에 매각했다. 노동자들이 반발했다. 같은 일을 하는데 노동조건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반발이 거세자 문성현 당시 경사노위 위원장이 나서 갈등을 중재했다. 합의가 도출됐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조합원들은 포운으로 고용승계한다. 가장 많은 조합원이 가는 신설 법인에 성암산업노조 단체협약 승계를 보장한다. 다만 다른 하청업체들이 장비를 이미 매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행 시기는 1년 뒤로 한다.

합의는 이행됐을까. 노동자들은 1년 뒤 포운으로 모였다. 임금은 다른 협력사들에서 일하다 포운으로 넘어갈 때, 성암산업 시절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던 경우 보상받았다. 그런데 기존 호봉은 인정되지 않았다. 단협은 승계됐지만 포운은 성암산업 시절에 비해 하락한 근로조건을 강요했다. 근속연수에 따라 정해지던 호봉과 배차의 원칙을 무시했고, 심지어 자유로운 연차사용도 사라졌다.

노조는 다시 쟁의행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협력사에서 대체인력이 투입됐다. 쟁의행위가 무력화된 셈이다. 부당노동행위 논란이 불거졌다. 포스코의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개입해 이를 해결해 보려 시도했지만 포스코는 꿈쩍하지 않았다. 김 처장은 1주일간 현장을 살피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만났다. “포스코는 대체근로를 넣지 말던가, 개입해서 사태를 해결해 주든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요구했다. 포스코는 고개를 저었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했다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원청사용자와 하청노동자 간 교섭 구조를 만드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 처장이 철탑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 중 하나다. “법이 있었다면 포운이 쟁의행위를 하는데 포스코가 대체근로를 밀어붙이는 게 위법이 된다. 이렇게 돼야 비로소 힘의 균형이 맞춰지는 것이지요.”

김 처장은 노조법 개정안이 재추진된다면 원청사용자와 하청노동자 교섭 구조, 하청노동자 쟁의권 보장에 방점을 찍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이 하청노동자들의 온전한 교섭권 보장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이 담겨 있는 법이다”며 “노조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설명될지 모르겠지만,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이 높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차별 철폐 캠페인 노사가 함께
부천 사회적 대화가 성공한 까닭

그의 구속으로 한국노총은 경사노위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그의 석방은 한국노총이 5개월 만에 경사노위에 복귀한 배경 중 하나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적 대화 주의자인 김 처장. 그는 현재 경사노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991년 전국 최초로 부천지역 노사민정협의회를 이끌어 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생기고 신뢰가 형성되면,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의 협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신뢰관계를 제대로 형성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섭을 원하는 대로 한 방에 이루는 건 혁명을 통해 가능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실제로 부천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이를 이뤘다. 오비맥주 경인직매장 집단해고 사태 당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당시 부천지역노조 의장이 고용노동부 부천지청 앞에서 농성을 했는데, 상공회의소에서 와서 격려하고 밥도 사고, 부천 경기도의원 모두가 이를 지지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며 “그런 조건에서 만들어진 합의만이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1991년 부천에서 노사정위원회를 할 때 그가 처음 한 것은 상공회의소 사람들과 얼굴을 트는 것이었다. 노사정이 함께 산에 오르고 탁구도 쳤다. 그래도 일은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작은 일부터 시작했고, 그러다 찾은 것이 공동직업훈련이었다. 성과가 나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신뢰를 쌓다가 비정규직을 줄이자는 고민도 노사가 같이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부천에서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 캠페인도 노사가 늘 함께한다.

김 처장은 현재의 사회적 대화가 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신뢰감 없이 어딘가에 떠밀려 진행된 합의는, 어떻게든 합의문은 어기지 않으면서도 합의를 무력화하려는 ‘꼼수’로 이어진다. 합의 취지와 정신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포운의 경우도, 현재 경사노위도 마찬가지다.

“신뢰감 없이 가장 예민한 이야기를 던져 놓고 ‘안 따라오면 죽는다’며 노사가 자기 입장만 외치는데 되겠어요? 우선은 서로가 서로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모습을 취해야 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양대 노총을 배제한 각종 정부위원회는 11개에 달한다.

김 처장은 협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가 현 정부에는 부족하다고 본다. 윤석열 정부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의 근거로 내민 “노동자들이 원한다”는 말 자체는 인정했다.

“연장근로 안 하면 위원장에게 항의하는 게 우리 조합원들이지만, 이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장근로를 선택하는 겁니다. 다만 중소기업의 노동시간이 늘어나면 총소득이 늘어날 수 있지만 시간당 단가로 계산하면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더 심해집니다. 하청업체 지불능력 강화를 위해 원청이 하청에게 돈을 더 지급하고, 가처분소득을 늘려 주는 방향으로 시행하는 게 맞습니다.”

김 처장은 “(정부 정책은) 진짜 해결 방안을 고민하기보다는 ‘쟤네는 이렇게 해도 돼’라는 뜻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정부·여당에 있는 옛 동지들에게

그는 현재 서 있는 곳이 달라져 있지만, 한때 함께했던 한국노총 출신인 이정식 노동부 장관과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김 처장은 “김 의원이 한국노총에 근무할 당시 급여 수준을 잘 아는데,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도 10년을 넘게 한국노총에서 일했다”며 “이 장관은 좋은 학교 나와서 노총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지금은 입장이 달라져 있지만, 자기 세계관이 뚜렷하고 대화가 되는 사람들이에요. 예민한 문제에서 부딪히면 문제겠지만, 말이 안 되는 사람들보단 그분들하고 대화하는 게 낫습니다.”

그는 “한국노총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기대와 신뢰가 실망으로 바뀌다 보니 분노까지 이어진 측면이 있다”며 “그건 두 분도 아실 거고, 감수할 부분이라 생각하지 않겠냐”고 했다.

다만 이정식 장관에게 우스갯소리로 “서운한 게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수감된 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해촉됐을 당시, 노동부는 사유를 “품위손상”이라고 밝혔다.

“제가 33년 한결같이 합리적으로 노조활동을 했다고 했는데, 최저임금위 해촉 이유를 품위손상이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33년을 품위 없이 살아온 게 되는 거 같은데요. 장관이 대통령에 제청할 때 다른 사유를 좀 만들어 내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실효성은 제로지만 법으로 다퉈 볼까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요. 하하.”

석방 이후 수상한 ‘전태일 노동상 공로상’
“‘진짜 노동자’임을 증명해 준, 가장 고마운 상”

앞으로 김 처장의 행보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우선은 노조 일을 계속 하며 연맹의 ‘백과사전’이 되겠다는 생각이다. 연맹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그의 경험을 참조하게 하고, 그렇게 되도록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사무처 간부를 세 번 모집을 시도했는데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이 지원하지 않는 걸 보고,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조로 유입되는 구조가 끊겼다고 생각해 나온 방향이다.

그는 “나이가 든 걸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과 나이 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후자의 일은 다 털어 낼 것”이라며 “나이를 먹은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이 남겠지만, 그것도 할 수 있는 기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봤다.

김 처장은 석방 직후 전태일노동상 공로상과 고려대 노동대학원 노동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그중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상은 전태일노동상 공로상이다. 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전태일 평전이기도 했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일 받고 싶어 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재단은 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광양에 내려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내고, 스스로 몸을 던져 해결하려고 했던 용기와 33년간 운동해 온 김 처장의 오랜 헌신을 높이 평가해 공로상을 수여했다.

전태일노동상 공로상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노동자가 됐다가 자연스럽게 노조를 하게 되는 보통의 경우가 아니라, 노조 일을 하기 위해 노동자가 된 케이스였다. ‘나 진짜 노동자 맞아?’라는 질문을 늘 했다.

“몸짓과 말투까지도 스스로 변화시키며 진짜 노동자가 되려고 살았는데, 전태일 노동상이 그 의심을 하지 않게 해 줘서 가장 고마웠어요.”

김 처장이 웃으며 말했다.

자신에 대한 시선에는 몸을 낮췄다. 그는 “최근에 구속자가 워낙 없다가 제가 구속이 됐고, 제가 가진 지위와 역할 때문에 이전 구속자들보다 폭발력을 지닌 것 같다”며 “개인적으로는 삶에 큰 변화는 없고,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져서 더 조심스럽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있다”고 말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깨는 무거워진다. 특히 한국노총이 그의 석방을 위한 홍보캠페인을 벌이며 ‘우리가 김준영이다’는 슬로건을 사용해서 더 그렇다.

“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상이 부끄럽지 않도록, 캠페인을 해 준 분들에게 죄송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죠.” 김 처장이 여러 번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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