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민주화 이후 관 주도의 일방 정책과정을 극복하고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자 행정부 위원회나 자문기구가 늘었다. 2022년 6월 기준 중앙정부 자문위원회만 636개이고, 17개 광역자치단체로 범위를 넓히면 3천여개에 가깝다. 문제는 한국에서 ‘집단’이나 ‘조직’이 자신의 이익과 열정을 증진하고자 ‘갈등’하고 문제를 논하는 공간으로서 ‘시민사회’ 의미가 취약하다 보니, 위원회·자문위 구성도 조직과 집단의 참여가 크게 늘진 못했다. 2021년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 국정감사에 의하면 지방자치단체 자문기구 위원 중 노동단체가 자치하는 비율은 1% 미만, 사용자단체는 2% 미만이고, 기타 이해관계 집단은 아예 통계조차 잡히지 않는다. 위원회 대부분은 50대, 남성, 유관 공직 관계자, 교수, 기업가 등 ‘교육받은 중산층 전문가’로 구성된다. 그런데 노사단체의 합의와 조정을 목표로 하는 노사정위원회를 분석해도 비슷한 문제에 다다른다.

통상 노사정위원회는 노사정 동수로 위원이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회미래연구원이 1998년부터 2021년까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회의체별 노·사·정·공익 위원의 인물 데이터를 구축해보니, 지난 23년간 130개 회의체에 참석한 총 인원은 2천166명(중복 인물 제외하면 전체 사람 인원은 총 1천65명)이고 이들 중 공익이 34.5%, 정부가 22.5%로 전체 위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노사위원은 모두 합해도 30%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처럼 관료제가 강한 국가로 분류되는 프랑스·일본과도 차이가 크다. 일본 후생노동성 노동정책 심의회는 노·사·공익 10명씩 동수 참여가 원칙이고 행정부는 회의체 운영 실무진이지 결정 주체가 아니다. 프랑스의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도 233명의 위원 중 정부위원은 없고 전문가가 40명, 나머지 위원은 노·사를 포함해 모두 이해관계자 집단이다. 사실 한국 노사정위가 1998년 처음 출범할 때만 해도 노사정은 동수였다. 그런데 3기 노사정위부터(1999년9월) 정부·공익위원 숫자가 대폭 늘기 시작했다. 특히 보수정부는 연구회·포럼이란 이름으로 노사정기구에 노사를 배제한 공익위원 중심 회의체를 만들어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명박 정부는 노사 빠진 회의체가 5개나 되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11개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임금체계 개편·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 가장 첨예한 쟁점을 다루면서도 정작 노사란 이해당사자를 제외하고 추진해 오히려 정부가 현장의 극단적 갈등만 부추겼다. 정권이 교체되고 2018년 11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재편되며 본위원회는 정부·공익위원을 합한 숫자보다 노사가 많도록 20년 만에 회의체 구성을 바꿨다. 포럼이나 연구회에도 노사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노사 정상교섭 중심의 회의체 운영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여당이 ‘탄력적 근로제’ 합의를 강요하며 노사정기구를 정부주도 정책 도구로 활용하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정부 당파성과 무관하게 많은 전문가, 행정관료, 정치인은 이해관계자 간 첨예한 갈등도 지난하고 오래 걸리는 조정과정도 참지 못한다. 행정부 주도로 정책을 결정하고 필요에 따라 공익위원(전문가)을 활용해 정당성을 확보해, 여당이나 다수당이 입법을 빠르게 추진하는 방식은 하나의 ‘한국형 정책 유형’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행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은 끊임없이 실시됐고 민주화 이후 국회에서 가결된 노동 법률만 지금까지 398건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제도와 입법이 늘어났지만 일하는 시민의 삶이 그에 비례해 개선되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노동정책 과정에서 노사 조직 간 당사자 합의를 주축으로 삼는 이유는, 일하는 당사자인 노동자와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에게 수용성이 떨어지는 정책을 실시해 봤자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거나 부작용만 늘린다. 다차원적 조정이 필요한 노동정책이야말로 국가 차원의 목표와 공동체 지표를 설정하고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정치적·사회적 풍토를 옹호하는 방식이 오히려 문제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참여를 늘린다는 의미는 공적 공간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한 조직과 집단의 참여 비율을 늘려 갈등을 표면화한다는 뜻이다. 화끈한 ‘개혁정책’의 추진보다 집단 간 지난한 대립과 조정·합의라는 느린 속도의 정책과정을 견디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 민주적 거버넌스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haeyoonj@naf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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