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대통령실>
▲ 자료사진 <대통령실>

정부가 ‘킬러규제 혁신’을 명목으로 안전보건규제 축소에 나선 가운데 재계가 안전보건 규제완화 요구를 노골화하고 있다. 한국경총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위험성평가 관련 벌칙 조항을 도입하기 전까지 50명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시기를 유예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위험성평가는 윤석열 정부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핵심 내용이다. 정부는 ‘위험성 평가 중심의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확산하겠다며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벌칙규정을 신설해 위험성평가를 내실화·의무화하겠다고 밝혀왔다.

TBM으로 위험성평가 갈음했는데
“처벌도 미루고, 처벌 전까지 법적용도 미루자”

경총은 ‘산업안전보건법령 개선에 대한 경영계 의견’을 28일 정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 3월 산업안전보건법령 정비추진단(TF)을 발족해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편,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을 개편하기 위해 논의 중이다.

경총 의견은 처벌을 최대한 늦추고, 법을 명확히 해 기업의 책임을 덜어 달라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부칙을 개정해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 벌칙 도입 전까지 50명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시기를 늦춰 달라고 요구했다. 이와 함께 위험성평가 제도 정착과 운영 내실화 전까진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평가 벌칙 도입을 재고해 달라고 했다. 예정대로면 내년 1월 상시근로자 5명 이상 50명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는데 위험성평가 벌칙 도입도 미루고, 벌칙 도입 전까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도 미루자는 얘기다.

정부는 위험성평가 중심의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확산하겠다며 지난 5월 위험성평가 절차를 간소화했다. 위험성 빈도나 강도를 곱해 위험 정도를 계량화하는 ‘위험성 추정 절차’를 없애고, 정기·수시평가는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tool box meeting) 등 상시평가로 갈음하게 했다. 노동계는 위험성평가 유명무실화를 우려하고 있는데, 재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노동자에 책임 떠넘기기?

노동자에게 사고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시도도 포착된다. 경총은 의견서에서 “근로자가 준수해야 할 안전보건교육·위험성평가와 같은 중요 의무사항을 법률에 규정하고 사업주 조치에 대응하는 근로자의 협력의무를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산업안전보건법 29조에는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실시해야 할 안전보건교육 의무를 담고 있는데 노동자 의무도 담자는 것이다.

연장선상으로 산업안전보건법 38조(안전조치)·39조(보건조치)를 개정해 법위반 정도의 경중을 따져 합리적 벌칙 부과기준을 마련하자고도 제안했다.

특히 노동자 안전보건 의무 관련 부분은 산업안전보건법령 TF에서 법조문에 반영하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조문에는 노동자가 보호구를 제대로 착용해야 하고, 방호설비를 임의로 해제하면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처벌조항 없이 입법된다고 해도 업무상 재해가 발생할 경우 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처벌법 해석 과정에서 법적 근거로 쓰일 수 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노동자 책임 부과 및 처벌은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전후로 경영계가 끈질기게 요구해 오던 것”이라며 “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법령 TF를 운영하고 첫번째 주제로 다뤘고 조문이 이미 완성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최 실장은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 기업 내 징계·처벌 등을 통해 책임 떠넘기기가 더 확대될 것”이라며 “중대재해처벌법의 원칙은 사고가 발생할 때 노동자 과실이 없다는 것이 전제가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기업이 최선을 다했는지가 핵심인데, 노동자에 책임을 떠넘기는 조항이 생기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자 현대중공업은 올 초 하청노동자에게도 ‘나의 안전 다짐’이라는 서약서에 서명을 받기도 했다. “나는 위험 작업시 안전조치를 철저히 이행하고 확인 후 작업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전으로 시계 돌리나

경총은 원·하청 간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자며 산업안전보건법 2조와 63조 등을 개정하자는 제안도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면서 원·하청이 함께 도급·하청노동자의 안전보건의무를 지고 있는데, 도급 범위와 책임 범위를 명확하게 바꾸고, 원·하청 역할에 부합하는 벌칙을 부과하자는 뜻이다.

최명선 실장은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 전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계가 쪼개기 입법을 추진해 안전보건 규제완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명선 실장은 “예방규정과 처벌규정을 나눈 뒤 구체적인 기준은 고시나 가이드로 빼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노동자의 안전보호구 착용과 같은 노동자 안전보건의무를 법률에 명시하는 것은 시민들이 보기에 합리적인 예방의무 조치로 보일 수 있다. 해당 조항에 대한 처벌규정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본부장은 “중대재해가 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업주 의무 중심의 법령과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규제에 원인이 있다”며 “정부가 마련 중인 법령 개편안이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실효적인 방안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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