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의 산화 이후 삭제된 ‘건설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이들이 모였다. 인권, 노동안전, 미디어, 구술기록 등 다영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건설노동자의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노동자 인터뷰를 보내왔다. 여덟 차례 걸쳐 싣는다. <편집자>

▲대전에서 체불임금 투쟁 중인 건설노동자들과 지효근(맨 왼쪽), 이훈규(왼쪽에서 세 번째)씨.
▲대전에서 체불임금 투쟁 중인 건설노동자들과 지효근(맨 왼쪽), 이훈규(왼쪽에서 세 번째)씨.

“우리 크레인 같은 경우는 철판 안에 있잖아요. 유리창으로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아요. 기름값 때문에 에어컨도 못 틀고요. 앉아서 일한다고 편해 보이죠? 엉덩이 겹치는 부분에 땀띠 다 나요. 아이들 땀띠 날 때 바르는 거 다 발라 봤어요.”

34년 동안 크레인 작업을 해 온 지효근씨가 말했다. 여름이면 하루에 500밀리리터 생수를 10통씩 먹어도 화장실에 갈 일이 별로 없단다. 다 땀으로 배출돼서. 그는 탱크 바퀴처럼 생긴 캐터필러가 달린 크롤러크레인을 몰다가 하이드로크레인으로 바꿨다. 둘 다 고정된 타워크레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건축자재 등을 옮기는 장비다. 이동이 어렵다는 점도 같다. 크롤러크레인은 일반도로에서 주행이 안 돼 트레일러에 실어서 다닌다. 하이드로크레인은 시내주행이 가능하나 출·퇴근 시간대는 또 안 된다. 늘 출근시간보다 일찍 출근하고 퇴근시간이 지나 퇴근한다.

지반에 따라 차가 넘어질 수 있어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일이다. 위험 작업임은 그의 손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른손 중 손가락 두 개가 짧다. 함께 작업하던 보조기사의 부주의로 잘렸다. “그때 노조를 알았더라면 산재 신청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당시 차주였던 작은 아버지가 구속될 수도 있다는 관리자의 말에 생각도 못했다. 작은 아버지는 군대를 제대한 지씨에게 “크레인 하면 먹고는 산다”며 크레인의 길로 이끈 은인이었다.

허울은 몇 억원짜리 기계 소유자, 현실은 월세살이

“먹고는 산다”던 크레인 기술자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일을 배울 때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크레인을 산 뒤로는 할부금에 쪼들렸다. 수억 원인 중고크레인을 캐피탈을 통해 구입하면 할부금만 수백만 원이다. 게다가 건설기계 노동자는 개인사업자로 취급돼 부가가치세와 종합소득세를 내야하고, 기름값과 통행료·보험료 등 들어가는 돈도 숱하다.

당장 들어가는 돈은 많은데 임금은 일을 하고 보통 두 달 뒤에 받았다. 그것도 밀리기 일쑤고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 현장이 끝나고 금세 다음 현장이 구하지 못하면 바로 생활고에 허덕였다. 그럴 때도 할부금과 세금은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장이 압류되고, 채권추심단에게 차를 뺏기기 때문이다. 힘든 날이 많았다.

“2007년인가 경유값이 1리터에 2천원이 넘어갈 때가 있었어요. 일이 전혀 없어서 마누라하고 아침·저녁으로 신문과 우유 배달을 다녔어요. 부가세도 못 내 사업자등록도 말소됐고요. 그때 마누라 붙들고 울면서 우리 같이 죽자고 한 적도 있어요.”

몇 억원짜리 기계 소유자라고 세금까지 냈지만 정작 지씨 가족은 사글셋방에서 살았다. 내일 걱정 없이 일하길, 또 일한 돈을 떼이지 않고 제때 받길 원했다. 그래서 2012년 건설노조에 가입했다.

노조를 하니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건설노조가 투쟁한 결과, 일요일에 쉬게 됐다. 지역민 우선고용 조례들도 만들어졌다. “객지에 나와 일하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갔는데 딸이 세 살 때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묻더니 갈 때는 ‘또 놀러 와요’라고 인사하대요.” 과거 이야기를 하던 지씨 목소리가 잠겼다.

불도저를 운전하는 이훈규씨는 지씨보다 1년 빠른 2011년에 건설노조 조합원이 됐다. 영종도 신공항, 동탄1신도시, 세종특별시 등 국내 굵직한 건설사업에 두루 참여했다. 그가 건설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경험담을 들려줬다.

“2007년에 이천에서 골프장 만드는 공사에 갔어요. 추석 끝나고부터 12월31일까지 쉬는 날 없이 하루 13시간씩 일했습니다. 일요일만 10시간 하고요. 대통령 선거날도 투표하고 오라고 오후 1시에 출근해 밤 12시까지 일했습니다.”

그렇게 100여 일을 쉼 없이 일하는 동안 이씨는 건강했던 치아를 잃었다. 이빨이 흔들리더니 3개가 저절로 빠졌다. “그때는 ‘작업시간이 길다’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는 이씨는 “일 열심히 하면 다음 현장에 데려가 줄게”라는 사측의 사탕발림에 가족의 생사가 달려 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01번부터 27번까지 있는 건설기계 중 01번인 불도저 기사라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건폭 몰이’ 이후 안전사고·체불 늘어

지효근, 이훈규씨와 만난 장소는 대전의 한 제약회사 본사 앞이었다. 건물은 번듯하게 지어졌지만 건물을 지은 건설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지효근, 이훈규씨와 만난 장소는 대전의 한 제약회사 본사 앞이었다. 건물은 번듯하게 지어졌지만 건물을 지은 건설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요새같이 더우면 식염수 주고 그늘막 설치하는 거 오래된 거 같죠? 몇 년 안 됐어요. 건설노조가 활동하면서 생긴 거지. 그전에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죠. 집에서 물 얼려 와서 마시고, 일사병 걸린 사람들은 그늘에 눕혀 놓고 팔다리 주물러 주는 게 다였어요.”

이씨는 이처럼 노조 덕에 인간적으로 바뀐 현장이 요즘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몰라도 현 정부의 건폭몰이 이후 체불도 늘고, 안전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입니다.”

얼마 전에도 대전의 한 공사장에서 덤프트럭이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씨와 건설노조 간부들이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갔더니 갑자기 뒤에서 바삐 안전띠를 두르고 롤러를 부르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건물은 30센티미터쯤 흙을 깔고 진동롤러로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올려야 하는데 그 현장은 흙 위에 굴삭기로 몇 번 오간 흔적만 보였다. 이씨는 “이렇게 다지지 않고 건물을 올리면 결국 지반침하가 일어난다”고 걱정했다.

건폭몰이 이후 안전을 살필 건설노조 간부들의 출입을 막는 현장이 늘면서 6미터 펜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수 없어졌다. 검단신도시 주차장 붕괴 같은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도 높아졌다.

임금체불은 확실히 많아졌다. 지난달 6일 지씨·이씨와 만난 장소도 대전의 한 제약회사 본사 앞이었다.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 앞에서 건설노동자들이 불볕 아래 천막농성 중이었다. 그 뒤로 ‘체불은 살인이다’는 글이 적힌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건물은 다 지었는데 하청업체가 법정관리 신청을 하면서 임금이 체불된 것이다. 발주처인 제약회사는 나 몰라라 하다가 노조가 농성에 들어가자 그제야 대화에 나섰다. 건설노동자들이 건설노조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까닭이다.

지씨는 노조활동으로 공정거래위원회와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위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내가 떳떳하니까요.” 이씨도 자신 있게 전했다.

“우리는 건설 폭력배가 아니라 현장의 안전을 지키는 건설 현장의 보안관입니다. 결코 다시 13시간씩 일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윤석열보다 건설노조가 오래갈 겁니다. 노동자들에게는 끈끈한 의리와 사명감이 있으니까요.”

 

QR코드를 확인하면 더 많은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를 확인하면 더 많은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글=신정임(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
사진=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영상=선미(스튜디오 한하)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