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의 산화 이후 삭제된 ‘건설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이들이 모였다. 인권, 노동안전, 미디어, 구술기록 등 다영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건설노동자의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노동자 인터뷰를 보내왔다. 여덟 차례 걸쳐 싣는다. <편집자>

“일하려고 노조에 가입했어요.”

이태봉씨(46·사진)가 건설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명료했다. 일자리가 절실했다.

마흔여섯이라는 늦깎이에 건설현장에 발을 디뎠다. 적은 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은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인생은 위기를 맞았다. 세상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다. 기능을 배울 곳도 없이 소개만 받고 찾아간 건설현장은 초보자인 이씨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유로폼을 옮기고, 자재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선배 목수가 망치질하는 걸 지켜봤다. 심부름하다 보면 이태봉이란 이름은 온데간데없이 여기서 “야” 저기서 “어이”로 불렸다. 월급은 제날짜에 맞춰 나온 적이 없고, 건설현장의 ‘유보임금’ 관행은 기어코 체불임금이 됐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 사장이 건설사로부터 받은 공사대금과 인건비를 챙겨서 잠적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달 치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한 500만원 정도였어요. 며칠 동안 (하청) 사장을 찾아 헤매다가 포기했어요.”

억울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사장 전화번호와 거주지밖에 없었다. 두 달 치의 임금을 받지 못한 건 쓰라렸지만, 형틀목수팀에서 지낸 일 년 동안 기능이 숙련되자 현장에서 만난 동료가 다른 팀을 소개해 줬다. 소개받은 팀은 노조에 가입해야 일할 수 있었고, 그는 일하기 위해서 민주노총 건설노조 대구경북지역지부의 조합원이 됐다.

▲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노조가 있는 현장은 안전했다

건설노조 조합원이 되고 출근한 곳은 대구 현풍에 위치한 중소규모의 아파트 신축 현장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작은 컨테이너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동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휴게공간이 있었다. 이씨는 노조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를 확연히 느꼈다고 한다. 임금은 매월 15일이면 나왔다. 지급이 늦어지면 전문건설업체는 미리 공지했고, 노조는 노동자의 임금을 우선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라는 존재가 든든했다.

혹서기에 정부는 근무시간 조정 지침을 내리지만, 노조가 없는 곳에선 건설사가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노조는 정부지침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조업단축을 요구하고 건설사를 설득했다. 지금 대구 건설현장에선 33도 이상 폭염경보가 울리는 날에는 오후 2시면 작업을 마친다. 모든 현장은 아니더라도 노조가 있는 곳은 조업단축을 한다. “노조가 요구하면 수용하는데 노조가 없는 곳 노동자는 적용을 받지 못하죠. 착취하는 거죠.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장이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이씨의 생활은 안정됐고, 도면을 보고 거푸집을 척척 만드는 목수 기능공이 됐다. 거푸집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외벽 형틀을 만드는 작업이다. 아이스크림에 비교하면 아이스크림을 꽂은 막대는 철근, 아이스크림 모양은 형틀목수가 만드는 거푸집이다. 아이스크림 틀에 액체를 붓고 얼린 고체를 틀에서 빼면 막대 아이스크림이 된다. 콘크리트 양생을 마친 거푸집을 해체하면 건물 외벽이 드러난다.

건축물이 다른 만큼 거푸집 규격도 달라 창틀·문틀에 합판을 대고 손수 제작해야 할 정도로 다양하다. 특히 계단은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목수가 된다면 도면만 보고도 각양각색의 거푸집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도면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틀을 제작해야 건물이 반듯하고 매끄럽게 지어진다.

“노동자들이 산재만큼은 안 당해야죠. 즐겁게 출근했다가 즐겁게 퇴근해야 하는데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떨어지고 부러지면 참 안타깝잖아요.”

▲ 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 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경찰조사 받았다고, 비겁하게 물러날 순 없어

노조가 있어 분명 현장은 변했지만, 안전하게 일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이씨는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걸 지켜봤다. 이씨의 양쪽 무릎에도 큰 흉터가 생겼다. 안전발판을 설치하지 않은 채 ’빨리빨리‘ 공정을 마무리하려다가 4미터 높이에서 추락했다. 산재는 신청하지 못했다. 산재사고가 많은 건설사는 다음 입찰에서 불리하고, 이씨가 소속된 팀은 다음 일자리가 중요했다.

그래서 이씨가 노조 대의원이 되고 나서 건설현장에서 제일 먼저 살핀 것이 안전발판 설치였다. 산업안전 관련 법령이 지켜지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목숨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서 노조는 단체협약을 맺고 현장에서 산업안전 활동을 했다.

“한번은 단체협약을 안 맺은 현장에 갔더니 우리 조합원들이 점심 먹으러 나와서 너무 열악하다고 하소연해요. 실제로 바깥에서 제가 봐도 비계쪽 5미터, 7미터, 10미터 되는 높이에 안전망 하나 없이 그냥 작업을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국민신문고에 10여 차례 민원을 넣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현장에 나와서 시정조치를 해도 현장은 바뀌지 않았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노조의 노력을 헌신짝처럼 여겼다. 노조는 산업안전법령 위반사항을 고발했고, 건설업체는 벌금을 맞았다. 한두 현장이 아니었다. 현장은 바뀌지 않고, 민원을 넣은 사람만 피의자 신분이 됐다. 경찰은 ‘폭력행위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을 들먹이면서 ‘공동강요’와 ‘특수협박’ 혐의로 이씨를 소환했다. 세 번이나 조사를 받았다. 대여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나면 ‘내가 정말 죄를 지었나’싶을 정도로 경찰의 질문은 집요하고 반복됐다. 조사받고 나온 며칠 동안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덮칠 것 같은 불안에 숨이 막혔다. “양회동 열사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그러다 결국 지난 6월23일 건설노조 대구경북지부장이 ‘건폭’으로 몰려 구속됐다. “우리 지부장이 구속됐어요. 제가 세 번 경찰조사를 받았다고 해서 (노조간부를) 그만 둔다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지부장이 돌아오면 떳떳하게 (현장으로) 내려가야지, 여기서 비겁하게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이씨는 건설노동자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노조는 꼭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글=시야(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

사진=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영상=효진(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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