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목 한국노총 정책2본부 부장

국민연금기금은 ‘국민연금기금운용지침’이라는 투자정책서에 기반해 운용된다. 이 지침에 따라 국민연금기금 운용은 수익성과 안정성, 공공성과 유동성, 지속가능성과 운용 독립성이라는 6개 원칙이 적절히 달성될 수 있어야 한다. 대표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제고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도, 수익률을 더 높이면서 위험도를 함께 일정 정도 높이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검토된다.

따라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금운용위는 전략적 자산배분 등 기금운용의 핵심적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 최고의사결정기구다. 국민연금법이 부여하는 기금운용위의 권한과 책임 아래 그동안 각 위원 한 명 한 명이 기금운용에 대한 근거 있는 고민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상호합의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내려왔다. 기금운용위는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위원들 간 합의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정부의 거수기 혹은 자본시장의 하수인으로 취급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장치는 자칫 잘못해 국민연금기금과 연금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훼손되는 것을 막아 왔다.

하지만 7일 열린 기금운용위에서는 이 같은 의사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수탁자책임 활동 운영규정’ 안건을 회의 전날에야 위원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회의에서는 장관 스스로 해당 안건을 직접 상정해야만 하는 명확한 근거는 밝히지 않은 채 의결을 시도했다. 안건 상정 처음부터 끝까지 표결을 통해 처리하겠다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기존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총 9인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중 가입자가 추천하는 6명의 전문가 중 3명의 몫을 자본시장과 연관된 각종 기관에서 추천받고, 정부가 추천받은 자들 중 지명하는 방식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이 해당 안건의 주요 내용이다. 내용상 자본시장의 이해를 대변할 만한 인사 중 정권 코드에 맞는 사람을 장관이 임명하겠다는 것이어서 충분히 논란이 예상되는 바였다.

노동계가 추천한 3명은 회의석상에서 ‘수탁자책임 활동 운영규정’ 안건 상정에 대해 절차상·내용상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다. 그럼에도 복지부 장관은 이를 그저 소수의견으로 치부하고, 이 방법만이 수탁자책임 활동의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다며 끝까지 표결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회의 말미 민주노총 윤택근 위원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마이크를 던지는 일이 발생하자 복지부는 10일 민주노총에 ‘해당 위원이 위원회의 품위를 손상시켰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며 해촉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일로 인해 기금운용위의 민주주의는 무너졌다. 위원회의 사회적 합의를 중시했던 절차적 과정 존중 문화는 이번 기금운용위를 기점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노동계가 주장했던 절차적 과정에 대한 근거 있는 문제제기는 기금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에 의해 무시됐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간 쓴소리를 많이 했던 노동계 추천위원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국민연금기금에 손을 대려는 윤석열 정부의 시도는 과거 박근혜 정권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기금을 악용한 것과도 유사하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절차적 과정을 거침없이 무너뜨리는 비민주적 개입 행위는 어디까지 갈까?

문제는 연기금의 민주주의 훼손을 두고 양대 노총을 제외하고는 시민·사회단체 대다수가 이 사안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제도개혁을 앞두고 무수히 쏟아지던 갑론을박은 왜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이 기금운용위를 길들이려는 야욕 앞에서는 조용한가. 지금 노동·시민사회 진영의 목소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순간이다. 자본과 정권 앞에 무너지는 우리의 노후를 지켜 내기 위해 노동·시민사회 진영의 결단과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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