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사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유럽·남미·아시아·아프리카를 포함한 모든 대륙에서 강도는 다르지만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무제한으로 폭주하는 자본주의의 고삐를 쥐고서 이 체제의 지속을 가능케했던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퇴락하면서 자본주의 자체도 크게 삐걱거리는 형국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겨눈 미국의 글로벌 공급사슬 해체 공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사실상 종식됐음을 보여주는 세계사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연합이 출범할 때 표방한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을 향한 구상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군국주의적 유럽’(militaristic Europe)으로 변질되는 과정도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징후다.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는 낯설어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넘어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다당제와 정기적 선거라는 방식에 의존해 온 자유민주주의는 보름달의 밝음을 잃은 지 오래고, 이제 그믐달로 치닫고 있다. 자연의 달은 그믐달을 지나면 다시 보름달이 되지만, 현생 인류가 알고 있는 역사적 기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박물관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우익성향 월간지 문예춘추가 새해를 맞아 발행한 ‘2023년의 논점’ 역시 동일한 진단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경제·다양성·사회·문화·생활·예능·스포츠·황실·교육·과학 및 의료 등의 영역에서 새해에 주목할 100가지 주제를 담은 문예춘추의 무크지 ‘2023년의 논점’은 머리말로 일본의 대표적 소장학자인 사이토 코헤이와 나리타 유스케의 대담을 실었다.

사이토 코헤이는 마르크주의 경제학자로 “탈성장 공산주의”를 주장한 책 <신인세(人新世)의 자본론> 저자로 유명하다. 이 책은 2021년 신서대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국내에서 45만권 넘게 팔렸다. 탈성장 공산주의가 말하는 “탈성장”은 자본의 무한 증식이 계속되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으며 지구도 종국적으로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의 가치증식 운동에 급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 다른 대담자인 나리타 유스케는 경제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로, 그가 쓴 <22세기의 민주주의>는 20만부 넘게 팔렸다. 이 책에서 나리타는 “젊은이들이 선거하러 가서 정치 참가를 하는 것으로는 일본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낡아 버린 게임의 법칙, 즉 선거가 민주주의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와 정치인이 없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그의 대안은 인터넷과 감시카메라 기술을 이용한 “무의식 민주주의”다. 첨단기술을 활용해 사람들의 생각과 소리, “민의 데이터”를 수집해 이를 한 데 모아 자동화·기계화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통해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적은 자본주의일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일까’라는 제목을 단 사이토와 나리타의 대담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능부전”이다. 독자 여러분은 의학용어인 발기부전(勃起不全)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부전은 “몸의 기능이나 발육 등이 완전하지 않은” 상황을 뜻하는데, 의학적으로 부전은 “병적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에게 발기부전은 생물학적 재생산의 장애와 단절을 가져온다. 나리타와 사이토가 말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능부전”도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재생산 장애에 부딪혔고, 이제 단절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진단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으로는 개인의 행복감이나 물의 깨끗함, 그리고 환경보전 같은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 성장률과 주가 상승으로 혜택을 보는 집단이 있고 그렇지 못한 집단이 생기는데, 문제는 후자의 집단이 자본주의 체제의 운용방식을 정하는 의사결정에서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해 온 장치가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민주주의 기제의 핵심 수단인 선거라는 행위는 당이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개별 정책에 투표를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찍은 정당과 후보가 당선 후 내가 원하는 정책을 수행하지 않을 때 선거의 효능감은 사라지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모든 선거에서 경험하는 바다. 빈민층이 부자를 위한 정당과 정치인에게 투표하고, 빈민층을 위한 공약을 내건 정당이 선거 승리 후 그 공약을 배신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부유한 소수만이 경제적 안정감과 사회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가난한 다수가 경제적 불안감과 사회적 열패감을 느끼는 사회에서 두 당 혹은 세 당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투표한다고 해서 이를 민주주의라 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 경제와 중국 경제의 동조화(coupling)를 통한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에서 전개된 글로벌 공급사슬의 건설이었다. 이 커플링은 막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 경제와 중국 경제의 비동조화(decoupling)는 흥미롭게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디커플링 속도를 배가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종언한 이후의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패한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새롭게 등장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부를 수 있을까.

정확히 90년 전인 1933년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다. 그 위기는 지금 우리가 “2차 대전”이라 부르는 세계대전쟁의 학살극을 통해 극복됐다. 2023년 인류문명은 90년 만에 다시 맞이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치명적 위기를 평화롭게 극복할 만큼 성숙해졌을까. 반대로, 그 모든 교훈을 잊고 몽유병 환자처럼 세 번째 세계대전쟁의 사형대로 성큼성큼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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