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김복철씨는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한다. 의류수선업체 사장이지만 그가 고용한 직원과 똑같이 일한다.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지만 제도권 ‘노동’을 하는 이들이 누리는 권리는 없다. 노래하고, 연기하거나, 축구경기를 보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위탁이나 용역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계약관계를 맺는 ‘나 홀로 사장님들’이다. 그들처럼 다른 n명의 개인사업주가 사회적 보호벽 밖에 놓여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편집자>

배우, 동네 목수, 대학 시간강사, 공연예술인노조 위원장.

이종승(48·사진)씨를 꾸미는 수식어들이다. 이 중 가장 많은 벌이를 가져다주는 일은 무대제작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주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배우 이종승”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한다. 대학에서 무대제작·장치제작 수업을 하기도 하는데 배우 외 그가 가진 모든 직업은 그가 배우를 계속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배우란 어떤 의미냐고 묻자 “어떻게 보면 지뢰를 밟은 것 같기도 하다”며 웃었다. 어느새 진지한 얼굴을 한 그는 “고행 길에서 성취감을 얻을 때도 많다”며 “할 때마다 새롭고 기대된다”고 눈을 반짝였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2일 오전 대학로에 위치한 공연예술인노조 사무실에서 배우 이종승씨와 만나 일과 노동의 의미를 물었다.

“무대 올리려면 한 달반 연습
연습시간은 보수 못 받아”

이종승씨는 야학 발표회에 올린 연극에서 전태일역을 맡으면서 연기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의 꿈은 배우가 됐고, 스무 살에 처음 극단에 들어갔다. 운명적 이끌림에 가까웠다. 배우를 업으로 삼자 ‘고행’이 시작됐다. 형편없는 수입 탓이다.

연극 하나를 올리는데 평균 45일가량의 준비 기간이 걸리지만, 그가 받는 돈은 출연료뿐이다. 하루 4시간 연습에 들어가는 시간은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두 번 나눠 지급되거나, 세 번으로 쪼개 지급된다. 바꿔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이씨는 “연습페이도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계약서에 넣고 싶지만 대부분 죽는소리를 한다”며 “제작비 단가가 올라가 공연을 올리기 힘들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한국고용정보원이 공개한 ‘2020 한국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연극 및 뮤지컬 배우의 평균소득은 연 1천474만원으로 낮은 축에 속했다. 월평균 소득이 122만원 수준이다. 올해 1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116만6천887원인데, 이를 간신히 넘는다. 연극배우로 범위를 좁히면 이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크다. 배우 일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으니 연극배우 대부분은 부업을 병행한다.

“직업 여러개지만, 불안정노동에 무직자 취급”

모자란 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n잡러’가 된 이종승씨는 매순간 불편함을 느낀다고 했다. 개중 힘든 것은 은행 대출이다. 집을 구하려면 전세대출이든, 주택담보대출이든 받아야 하는데 은행은 담보가 있는지,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지만 본다. 이씨는 “좋게 말해 프리랜서지, 최저임금도 적용받지 못하는 환경이라 무직자처럼 취급된다”고 설명했다.

2년여 전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됐다. 최소한의 안전망이 생겼다고 기대했지만 “보호를 받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종승씨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집계하는 가입자수는 이미 가입조건이 됐던 시립·도립극단 소속이거나, 정부 지원급을 받는 사업으로 반강제적으로 가입하게 하는 경우로 보인다”며 “소득이 월 50만원 이상이어야 하는데, 정부 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연극의 제작비 액수를 보면 모든 배우들이 다 가입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장소 임대, 연습실 대여, 무대제작, 음향, 조명, 의상, 분장 등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우의 보수는 이 중 보통 가장 마지막에 책정된다. 출연 배우가 많으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은 더욱 적어진다.

고용보험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자리를 잃었을 때 생계를 유지하도록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예술인보험은 24개월 중 9개월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해야 지급한다. 주기적으로 무대에 서지 못하는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기초예술은 모든 예술의 그루터기,
국가가 사용자”

그는 2017년 3월 공연예술인노조를 설립했다. 50명의 발기인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든 이유는 “예술인 모두가 직업란에 예술가라고 당당하게 적고, 예술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코로나19로 공연예술계가 어렵던 시기지만 지난해 조그만 노조사무실도 열었다. 간부들이 서로 보증을 서 대출을 받았다고 했다. 조그만 부엌과 연습공간도 딸려 있다. 월세는 연습공간을 대여해 충당한다. “공간이라도 있어야 모일 수 있을 것 같아 무리를 했다”고 귀띔했다. 노조 조합비는 정액 5천원이다. 그는 “이조차도 내기 힘든 공연예술인이 있다”고 했다.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예술인’과 ‘노동자’를 등치시키면 화를 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는 “노동자 하면 기름밥 먹고, 작업복 입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 것 같다”며 자신은 노동자고, 사용자는 국가라고 했다.

“공연예술뿐 아니라 기초예술 분야는 모든 예술의 기반을 다지는 그루터기 같은 것이라서 국가가 유지·계승·발전을 위해 지원하는 것이거든요. 기초예술 단체가 자생하기 힘든 구조니 국가 지원금에 목을 맬 수밖에 없고요. 국가가 사용자죠.”

흔히 사용자의 징표로 보는 작업 지휘·감독은 극단 대표나 연출가가 하기도 하는데 이들의 상황도 배우랑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씨는 “어느 날은 내가 고용인이 됐다가, 피고용인이 되기도 한다”며 “필요에 의해 지원금을 받기 위해 프로젝트 그룹 중 대표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30년 가까이 배우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그는 어느새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쉬운 때는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단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와서 기댈 수 있고, 필요하면 그늘을 만들어 주고, 바람막이도 돼 줄 수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글=강예슬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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