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윤희 기자

김복철씨는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한다. 의류수선업체 사장이지만 그가 고용한 직원과 똑같이 일한다.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지만 제도권 ‘노동’을 하는 이들이 누리는 권리는 없다. 노래하고, 연기하거나, 축구경기를 보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위탁이나 용역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계약관계를 맺는 ‘나 홀로 사장님들’이다. 그들처럼 다른 n명의 개인사업주가 사회적 보호벽 밖에 놓여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편집자>

17년차 뮤지션인 ‘안지’ 안지원씨(36·사진)에게 노동은 낯설다. 17년간 노래하고 기타를 쳤지만 “노동을 한다”는 인식은 없었다. “일을 한다”는 생각은 했다고 한다. 조금의 권태도 밀려왔다. 노동이 아니라서일까. 보상은 일의 ‘결과물’에서나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지은 노래와 노랫말, 혹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무대에 서는 일이다.

<매일노동뉴스>가 19일 오후 마포구 SBI레코딩스튜디오에서 만난 안씨에게 “노동자냐”고 물었다. 인터뷰 내내 씩씩했던 그는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입에 붙지 않는 단어를 곱씹는 그의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결국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음악·뮤지션 “필수 아니다”는 사회

그는 중학생 시절 유명한 록스타를 꿈꿨다. 스무 살에 상경해 활동하다 2011년 밴드를 꾸렸다. ‘웨이스티드 쟈니스’라는 록밴드다. 2013년 데뷔 앨범을 냈고 2015년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다. 싱글앨범과 미니앨범, 그리고 정규앨범 등 일곱 장의 앨범을 내고 30곡을 발표했다. <목소리(Voice)> <뜨거운 것이 좋아> 같은 타이틀곡은 꽤 인기를 얻었다. 안씨의 카리스마 있는 보컬과 퍼포먼스에 팬들이 모여들었다. 2015년 EBS 음악프로그램인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지금도 팬들은 밴드의 공연실황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지금은 없는 웨이스티드 쟈니스를 그리워한다.

기대를 모았던 밴드는 지난해 동행을 멈췄다. 2019년 앨범 작업을 위해 활동을 중단한 밴드는 코로나19를 극복하지 못했다. 안지원씨는 지금 2017년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데디오레디오’에서 보컬과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많은 뮤지션이 음악을 접었다. 행사는 끊기고 영업제한 조치로 라이브클럽은 문을 닫았다. 록밴드 크라잉넛의 멤버인 한경록씨의 생일을 맞아 홍대에서 열리는 이른바 ‘경록절’도 지난해에는 온라인으로 열렸다. 많은 밴드가 무너졌다고 한다. 안씨는 “이해는 하지만 아쉽다”며 “언젠가 돌아올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취업을 했고 누군가는 소식이 끊겼다.

뮤지션만 무너진 게 아니다. 라이브공연을 매개로 하는 공연산업이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안씨는 “악기대여점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고가의 악기를 공연장에 대여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악기대여점은 라이브공연의 맥이 끊기면 아예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사회가 보기에 음악과 뮤지션은 필수가 아니니까요.” 말하는 안씨 표정이 담담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리고 단호했다.

10년 넘게 한 일은 기타 치고 노래하기

그도 가까스로 버텼다. 본업을 했을 때는 주로 클럽 라이브 공연비, 저작권료, 음원수익으로 돈을 벌었다. 라이브 공연비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내내 기대할 수 없었다.

피처링도 한다. 밴드로 무대에 서기도 하고, 솔로로 서기도 한다. 불러주는 곳도 있다. 계약서는 쓸 때도 있고 안 쓸 때도 있다. 받기로 한 돈보다 몇 장 모자란 돈을 받기도 한다. 싸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불규칙적인 수입을 만회하기 위한 일도 했다. 그는 1년 전부터 성우로 더빙에 참여하고 있다. 더빙작업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부업은 일상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타를 가르쳤다. 8~9년을 꾸준히 했지만 지금은 관뒀다. 연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안씨는 “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타레슨을 병행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수입이 불규칙적이라 부업은 불가피했다.

가장 중요한 일과는 연습이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20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기타연습을 열심히 했어요. 새벽에 첫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게 다반사였어요. 기타든 노래든 다 그랬어요. 매주 합주도 했죠. 일(라이브)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밴드가 모여 공간을 빌리고 연습을 했어요. 10년 넘게 그랬죠.”

지금도 다르지 않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작업실을 구하고, 개인 연습실을 마련하면서, 합주실을 따로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전히 그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비정형 창작활동도 생계 위한 ‘밥벌이’

안씨에게 창작은 일이다. 누구도 지불하지 않지만 여느 월급쟁이처럼 출근이 지겨울 때도 있고 일상이 무료할 때도 있는 그런 일이라고 한다. 단지 사회가 노동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볼 때도 노동은 좀 더 정형화된 무엇이다. 시간을 측정해 과정이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규모의 월급을 받는 노동이라고 했다. 안씨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안씨는 “연습에 보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지난달까지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에서 대중음악 공연 분야 인력지원사업 지원을 받았다. 6개월간 매달 180만원을 받았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150만원 정도다. 안씨는 6개월간 출근도장도 찍고 업무보고서도 썼다. 일(연습)을 했다는 증빙을 위해 공연 포스터나 공연사진을 찍어 올렸다. 근무 내용·장소와 근무시간을 기록했다. “어떤 날은 조금 과장을 보태기도 했고, 어떤 날은 더 길게 연습하기도 했어요.” 노동의 언어로 말하면 단축근무를 하기도, 연장근로를 하기도 했다는 얘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게(연습) 이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 일인가 생각했어요. 고마웠죠. 받아 본 적 없는 월급을 받는 거잖아요. 덕분에 다른 부업을 줄이고 연습에 더 매진할 수 있었어요. 그런 안정감은 음악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이었습니다.”

6개월간의 경험은 그에게 일(창작활동)과 노동의 간극을 좁혔다. 안씨는 그렇지만 “노동이라는 말이 낯설다”고 했다. 여전히 다르다는 인식이 있다. 그는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계를 위한 밥벌이라는 내용은 같다. 창작을 위한 과정도 보상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을 더욱 강하게 인식했다. 안씨는 “뮤지션의 창작 과정을 지원하는 사업은 문화예술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투자하는 방식으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이재·남윤희 기자, 사진=남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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