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 기자

김복철씨는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한다. 의류수선업체 사장이지만 그가 고용한 직원과 똑같이 일한다.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지만 제도권 ‘노동’을 하는 이들이 누리는 권리는 없다. 노래하고, 연기하거나, 축구경기를 보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위탁이나 용역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계약관계를 맺는 ‘나 홀로 사장님들’이다. 그들처럼 다른 n명의 개인사업주가 사회적 보호벽 밖에 놓여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편집자>

축구경기가 킥오프(시작)하기 두 시간 전. 선수들은 몸을 풀기 위해 공 하나를 두고 가벼운 패싱 게임을 하거나 러닝을 한다. 선수가 찬 공이 골대를 멀리 벗어나 관중석에 떨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어떤 선수는 훈련모습을 지켜보러 온 팬에게 장갑이나 유니폼을 벗어 주기도 한다.

손규성(36·가명)씨는 이른바 ‘매의 눈’으로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축구공과 훈련용 고깔을 비롯한 훈련장비와 선수 유니폼 같은 비품을 관리하는 스포츠장비관리사다. 선수가 팬서비스를 한다며 던져 준 유니폼은 장부에서 빼야 한다. 선수용품은 선수의 것이 아니다. 구단 자산이다. 격렬한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에 상대편 선수와 교환하는 유니폼도 장부상에는 망실로 잡힌다. 손씨는 친분이 있는 선수에게는 “구단 자산이니 교환을 자제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선수들은 싫어한다. “상대팀 선수에게 주는 걸 분명히 봤는데 세탁용 수거함에 넣었다고 거짓말하는 선수도 있어요.” 지난 19일 저녁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그가 고충을 털어놨다.

장비차랑 주유소도 구단이 정해 줘

사실 이 정도는 고충도 아니다. 손씨에게 진짜 고충은 5년 넘게 일하고도 손씨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A구단이다. 2015년 2월부터 2020년 12월31일까지 5년11개월간 A구단에서 일한 손씨는 지금 일을 관두고 고용노동부에 퇴직금 진정을 제기해 A구단과 다투고 있다.

A구단은 손씨와 전문적인 스포츠장비관리 용역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2019년부터 손씨가 체결한 계약서는 용역계약서가 맞다. 2015년 2월 첫 입사 당시에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기억이 있는데 그게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용역계약이라면 퇴직금 지급 의무가 없지만 손씨 주장대로 계약의 실질이 근로계약이라면 퇴직금 지급 의무가 발생한다. A구단이 소재한 고용노동지청은 손씨의 1차 진정을 반려했다.

손씨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가 들려준 스포츠장비관리사의 업무는 사장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은 서울이지만 시즌기간에는 클럽하우스(선수단 합숙소)에서 묵어요. 숙식을 다 해결하죠. 아침에 일어나서 스포츠장비 관련 사무실로 옮겨 업무를 시작하는 거예요. 재고를 파악하고 감독과 코치진이 정한 훈련 스케줄에 따라 장비를 챙깁니다. 훈련 시간 50여분 전에 먼저 나가 훈련물품을 설치하고 점검하죠. 훈련을 마치면 널브러진 훈련장비를 모두 수습해 복귀해요. 그리고 훼손됐거나 잃어버렸거나 하는 물품의 수량을 모두 체크합니다.”

우리나라 프로축구리그인 K리그는 주말에 경기를 한다. 손씨는 당연히 주말에도 클럽하우스에 머물면서 경기를 준비한다. 아니, 원정경기가 있는 날이 아니면 거의 매일 클럽하우스에 머문다고 보는 게 맞다. 사업장과 휴게장소 혹은 사택이 전혀 분리되지 않은 구조다. 스포츠장비차량 운전도 하는데 주유는 A구단이 지정한 곳에서만 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재량’은 업무 어느 대목에서도 찾기 어렵다.

사무국과 용역계약 ‘지원스태프’ 사정은 대동소이

짚고 넘어갈 대목은 그가 정확하게는 선수단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A구단의 주장대로라면 손씨는 A구단 사무국과 용역계약을 체결한 개인사업자다. 그런데 업무는 사무국과 무관한 감독과 코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선수단 훈련 스케줄과 내용을 정하는 건 감독과 코치다.

사무국 지시를 안 받는 것도 아니다. 손씨는 “사무국 간부가 사석에서 내게 주로 일을 전달하던 직원을 지목하면서 ‘직원 얘기를 내 얘기로 여겨라’고 말했다”며 “사무국 외부행사에 동원될 때도 있고 A구단 직원초청 축구대회에 직원 대신 출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황당해하는 기자를 보며 ‘더한 일도 있다’는 표정을 짓곤 웃었다.

이런 일이 손씨에게만 국한한 것도 아니다. 프로축구구단은 크게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국과 실제 경기를 치르는 선수단으로 구분된다. 사무국은 사업체로, 정규직도 채용하고 구색을 갖추지만 선수단은 철저히 성과에 따라 계약하는 임시직이다. 선수를 훈련하고 경기에 관여하는 이들은 코칭스태프라고 부른다. 성적을 내지 못하면 경질되는 감독이 대표적이다. 손씨 같은 스포츠장비관리사와 통역사, 의무 트레이너, 전력분석관은 지원스태프로 부른다. 이들 역시 임시직인 것은 같지만 코칭스태프의 지시를 받는 쪽에 가깝다. 재량권도 없다.

“스포츠장비관리사라고 하지만 스포츠장비와 비품은 모두 구단 소유라 할 수 있는 영역이 없어요. 터진 공을 제대로 치우지 않았다고 혼나는 게 고작이죠. 시즌 시작 전 선수 유니폼을 담은 박스 수십개가 밀려드는데 선수에게 몇 장씩 나눠 주라는 것까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저는 배급만 할 뿐입니다.” 손씨의 설명이다.

▲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휴가도 마음대로 못가는데 “노동자 이름을 달라”

손씨 진정사건을 대리하는 공인노무사 ㅎ씨는 “K리그1·2 구단 26곳 중 단 한 곳도 스포츠장비관리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며 “사업자라면 스포츠장비 브랜드를 추천하고 그에 따른 성적 향상에 따른 성과보수를 받거나 하는 식으로 재량이 인정돼야 하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에 재량이 있느냐”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는 아직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 차례 반려됐던 약 2천만원의 퇴직금과 미지급 연차수당을 달라는 2차 진정을 낸 상태다. 소송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황당한 개인사업자라는 형식을 벗고 노동자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그는 “처음 계약할 때 4대 보험이 적용 안 되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개인사업자 사이에는 폭 넓은 강이 흘렀다.

휴가도 5년11개월간 제대로 쓴 적이 없다. 딱 두 번 썼는데 한 번은 예비군 교육 때문이었다. 또 다른 한 번은 그가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어서 휴가를 쓰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마침 팀 성적이 안 좋던 시기라 이기적이라고 하더군요. 성적 좋아지면 가라고. 성적이 다소 올라 다시 요청했더니 시즌 끝나고 가라더군요. 시즌이 다 끝난 12월에 또 얘기했더니 이번에는 감독 허락을 받아 오라고 했어요. 감독은 ‘난 괜찮은데 사무국 허락도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겨우 휴가를 받았죠.”

그를 대리하는 노무사가 또다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한 팀이라고 강조를 하면서 온갖 굳은 일을 시키고, 실제 본업에는 전혀 재량이 없는 가운데 쉬는 것도 통제하고 있어요. 종속적 관계가 명백한데도 도급이라고 하는 거죠. 월드컵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축구장 이면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재·어고은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