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은행 용역업체의 보안·안전 관리자 불법파견이 법원에서 처음으로 인정됐다. 법원은 사실상 은행의 지휘·명령을 통해 보안 업무가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판결이 확정될 경우 간접고용이 만연한 은행업계의 유사 직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재판장 정현석 부장판사)는 한국씨티은행 용역업체 직원 A씨가 은행을 상대로 낸 근로에 관한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은행의 항소 여부는 미정이다.

수차례 계약갱신, ‘도급계약 연장’ 거절 뒤 해고

A씨는 2011년 6월 씨티은행의 용역업체에 입사해 은행 보안 담당부서의 시설물 보안·안전 관리자(BSSA)로 근무했다. 이후 용역업체가 B사로 바뀌며 A씨는 고용이 승계됐고, 2013년 5월 1년간 기존과 동일한 계약을 체결했다.

A씨는 2020년 4월까지 여러 차례 계약을 갱신하며 보안 부서에서 일했다. 주된 업무는 B사 소속 다른 직원 3명의 업무수행을 관리·감독하거나 은행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현장관리자’ 역할이었다. 직원들의 출입통제 시스템과 CCTV 관리업무를 감독했다.

그런데 은행이 출입통제 시스템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도급계약 연장을 거절하자 B사는 A씨에게 계약종료를 예고했다. A씨가 이를 거부해 B사는 다른 고객사로 출근을 지시했으나 A씨가 이마저 거절하자 2020년 5월 퇴직 처리했다.

A씨는 한국씨티은행과 근로자파견 관계라며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시설물 보안·안전 관리’ 업무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시행령이 정한 근로자파견대상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설령 근로자파견사업을 허가받았더라도 형식상 도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2년을 초과해 은행이 계속 사용했으므로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

법원 “근로자파견 대상 아냐, 직접고용 의무 발생”

법원은 근로자파견에 해당한다며 A씨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시설물 보안·안전 관리업무는 근로자파견 대상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은행이 직접고용할 의무가 발생했다고 판시했다. A씨의 근로관계 실질은 은행의 지휘·명령에 따라 업무에 종사한 것이라는 취지다.

구체적으로 은행이 업무수행 자체에 구속력 있는 지시를 했다고 봤다. ‘보안·안전 관리’는 은행 사업에 필수적인 업무로, 은행이 보안·화재 안전규정을 통일해 지시했다는 것이다. A씨가 업무수행 결과를 보고하고, 변경사항이 있으면 은행 보안 부서장 승인을 받아 업무를 처리했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실제 부서장은 A씨와 정규직을 구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업무를 지시했다. 재판부는 “수급업체측에서 업무수행 지시를 하는 등 A씨에게 지휘·감독했다고 볼 만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A씨가 정규직과 함께 작업해 은행 사업에 ‘실질적 편입’이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와 정규직이 담당한 시설물이 구분돼 있으나 그러한 사정만으로 업무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은행이 일괄적인 업무 지시를 했고, A씨와 정규직들이 휴가시 상대방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봤다. 업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취지다.

‘간접고용 만연’ 금융권 유사 소송 파장 주목

은행이 보안·안전 관리자 채용을 결정했다는 점도 불법파견 판단을 뒷받침했다. A씨는 은행의 2차 면접을 거쳐 B사에 채용됐다. 업무수행 교육은 주로 은행이 직접 담당했고, A씨는 은행에 휴가나 외근을 신청해 승인받았다. 재판부는 “업무수행 교육과 근태와 관련해서도 은행이 상당한 정도로 결정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아가 보안·관리 업무에 ‘전문성·기술성’도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보안업무 범위가 추상적이라 은행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구체적인 업무내용이 결정됐다고 판단했다. 보안·안전 관리자들이 전문기술이나 자격증 없이 업무를 수행한 부분이 법원 판단에 영향을 줬다. 또 은행이 핵심 시설과 장비를 모두 제공해 용역업체는 독립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이 경비·사무지원 업무 등 광범위한 영역의 줄소송으로 확대될지 관심이 쏠린다. 은행은 금융권 중 간접고용이 가장 활발한 업종으로 조사됐다. 올해 4월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은행과 생명·손해보험사, 증권사 115곳의 용역·파견 현황을 조사한 결과 21곳이 용역·파견업체 413곳과 계약을 맺고 2만4천752명을 고용했다. 씨티은행도 사무지원보조 업무를 7곳의 용역업체에 맡겼다.<본지 2022년 4월5일자 2면 “최대 수익 ‘돈잔치’ 금융회사, 거대한 파견·용역직 ‘집합소’” 참조>

노동계는 은행의 ‘중간착취’ 고리가 근절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경비원 등 보안 관리자의 간접고용과 불법파견 실태 파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의당 비정규직 상담창구와 은행경비연대는 2020년 1월 용역업체 현황 파악과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을 촉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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