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금 여기 있는 가난에 내일이 어디 있어요? 배고픈 사람에게 내일이 어딨어. (이들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정말 힘든 사람들은 저녁에 누울 때 내일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해요. 해 뜨는 게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내 삶을 서로 돌보고 나누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대변해 주는 것, 이것이 기초적인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현실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40년 넘는 세월을 가난한 이들의 곁에서 한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1979년 서울 상계동 판자촌 야학을 시작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빈곤과 실직의 덫을 빠져나오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운동과 연대를 조직하고 정책과 제도개선으로 나아가는 데 온 힘을 다한 종교인이자 빈민운동가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사무실에서 송경용(62·사진) 대한성공회 신부를 만났다. 성공회 ‘걷는 교회’ 주임사제인 그에겐 따라붙는 직책이 셀 수 없이 많다. 23년 전 무료급식 사업에서 시작한 ㈔나눔과 미래 대표, 위험사회를 넘어 생명존중 안전사회로 가기 위한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 지속가능 사회적금융 생태계 발전과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공익재단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을 맡고 있다.

어려운 현장에서도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KTX 승무원 투쟁, 반올림 농성,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받는 어려운 이웃의 곁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매일노동뉴스의 후원회장도 기꺼이 맡았다.

“다시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 연세대 1학년인 1979년 상계동에서 야학을 시작했다. 어떤 마음으로 선택했나.
“제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상황이 저를 불렀다.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비를 벌려고 밤새워 일하고 아침잠도 못 자고 학교에 갔다. 내가 밤에 일하는 세상과 학교의 풍경이 너무 달라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선배가 야학을 해 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날 날짜도 기억한다. 1979년 9월28일. 신촌에서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고 간 캄캄한 상계동에 있는 (야학을 하는) 적십자회관에 들어갔다. 여기가 내가 들어갈 곳이구나 (느꼈다). 80년, 81년 사건이 많았다. 험악하던 시절이다. 야학 탄압사건이 있었다. 81년 야학이 없어져 학생들을 다른 야학으로 보내려고 서울시내를 걸어다니며 연결해 줬다.”

하지만 그는 집회에서 단속에 걸려 바로 군대로 보내졌다. 군대에서도 보안대에 잡혀가 고초를 겪다가 제대한 뒤 다시 상계동으로 향했다.

“와서 보니 다 철거돼 있더군요. 상계동 173번지. 야학생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어요. 6~7평 집이지만, 거기서 먹고살고 노동을 하며 살았죠. 싹 다 철거돼 있었어요. 청 카바(자켓) 입은 용역깡패들이 야구방망이 들고, 경찰은 봐주고. 엄청 충격이었죠.”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종교가 없던 그는 기도했다.

“이미 다 철거된 그 자리에서 발이 얼어붙었어요.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다시는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죠. 그 기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때부터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여기에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까.”

상계동에서 야학하던 친구, 노동운동하던 친구, 마치꼬바(소공장)에서 일하는 친구, 봉제공장에 다니는 친구들.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집은 철거된 그들을 만나러 어떻게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때 같은 학교 선배네 골방에 숨어 한 달간 두문불출했는데요. 그분이 성공회에서 일했던 거죠. 선배가 교회에 간 동안 성경책을 읽고, 돌아오면 그거 갖고 이야기했어요. 나는 다시 상계동에 가야겠고, 다시 가는 길이 어떤 게 있을까 이야기했습니다. 선배가 신학을 하면 어떻겠냐, 교회에서 네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권했죠.”

1986년 성공회 신학교에 편입했다. 송 신부는 “신학교에 가서도 머릿속은 온통 상계동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마침내 1986년 9월 상계동에 ‘나눔의 집’을 설립했다. 그는 “방 두 개짜리 무허가 집을 얻어 ‘나눔의 집’ 간판을 걸었죠. 노동자들이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예전 야학 때 먹던 적십자 구호라면을 다시 같이 끓여 먹었죠.”

“물고기 잡는 법 알려 준다? 가난은 여유가 없다”

86년 상계동 ‘나눔의 집’에 이어 88년 삼양동(현 성북), 91년 봉천동에 나눔의 집을 열었다. 성공회 나눔의 집은 그 뒤로 다른 지역서도 더 지어져 현재 8곳으로 늘었다. 그는 봉천동 나눔의 집 사제로 14년간 일하며 청소년 쉼터, 노숙가정 쉼터, 자활후견기관, 푸드뱅크, 장애인센터 등을 설립했다.

- 나눔의 집을 만든 이유는.
“나눔의 집 모토는 모두 네 가지다. 먼저 가난한 사람이 주인 되는 곳이다. 가난한 사람이 복장이나 신분, 헌금 때문에 교회에서 배척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가난한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다음은 열린 교회다. 종파니 교파니 따지지 말고 다 와서 함께하자는 것이다. 그다음은 실질적인 민중복지를 실현하는 곳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은 당장 빵이 문제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그 말은 옳지만, 가난은 여유가 없다. 당장 여기서 먹는 문제, 닥친 문제다. 마지막은 주민들이 자주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마당이 되자는 것이었다.”

그는 97년 외환위기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봉천동에 있을 때 철거 싸움을 몇 년간 했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인 1997년 3월부터 산동네 일용직 노동자 일거리가 끊겼어요. 이상하다 했죠. TV에서는 우리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만 하고. 11월 IMF 사태가 터지면서 철거민들 몇몇이 노숙인이 됐어요. 그들을 찾으러 서울역으로 갔죠. 서울역에서 2박3일 신문지 덮고 자며 기다리다 그 참상을 보게 됐어요.”

송 신부는 전국실직노숙자대책종교시민단체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노숙인을 위한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등도 그때 활동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노숙인이란 말도 그때 처음 만들었죠. 그전엔 부랑인이라고 썼어요. ‘실직’이란 말을 붙인 건, 정부의 정책적 실패에 따른 사회적 산물이고,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죠. 정부는 그때까지도 부랑인이라고 했어요. 저는 설령 과거부터 (노숙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 서울역, 서소문에 있는 수천, 수만명은 IMF 사태 때문에 나온 것이죠. 당시 서울역 상담소에서 상담하다 보니, 예전에 길거리에 나온 사람과는 달랐어요. 갑작스런 부도와 실직을 맞거나, 영세 제조업이나 공사현장 다니던 사람들이 다 나왔어요. 다 망했으니까.”

외환위기, 가난한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다

봉천동 나눔의 집은 지금의 자활센터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1992년 9월 봉천동 나눔의 집에 불이 났어요. 동네 노동자, 주민, 청년들이 다 와서 같이 지었어요. 그전부터 일용직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빈곤과 실직의 덫을 벗어날까 고민했습니다. 이들은 만성적인 실업과 경제적 궁핍으로 금융사고도 많고, 가정폭력, 알코올문제 등과도 다 연결돼 있죠. 결국 모든 건 경제적으로 일자리가 안정돼야 하잖아요. 그때 제가 노동자 협동조합 운동을 소개했죠. 90년대 초부터 허병섭 목사와 어떻게 하면 산동네 일용직 노동자의 자주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존감을 가지면서 실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해외 사례를 공부하면서 시도하고자 했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건설노동자협동조합 나섬건설과 일꾼두레다. 나중에는 두 곳이 통합해 일용직 노동자 40명 규모의 나레건설 협동조합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나레건설 경험을 토대로 정부에 빈곤대책으로서 복지와 노동이 통합된 모델인 자활센터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당시 복지부에 깨어 있는 공무원이 있었는데요. 최선정 정책실장이었죠. 나중에는 노동부와 복지부 장관을 역임했어요. 최 실장이 당시 (공무원으로서) 최초로 봉천동 철탑까지 올라와 주민들과 이야기를 하고는 ‘합시다’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96년 관악자활센터를 개소하게 됐죠. 지금은 250개 시·군·구에 자활센터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송 신부는 가장 보람 있는 일로 2000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꼽았다. 98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추진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80년대는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란 시대였어요. 하지만 국가는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전환한다며 탄광·봉제 등 구조조정을 하면서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죠. 하지만 이들을 대변하는 조직은 없고, 사회복지 시스템도 없었죠. (IMF 사태 뒤) 시민·종교 등 전국의 단체들이 다 모여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추진연대회의를 만들었고, 2000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가 발효됐습니다. 당시 부족한 게 많았지만 주거복지를 관철했지요.”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자활센터에서 사회적 기업, 그리고 사회적 금융까지

-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적금융 도매기금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적금융 생태계 발전과 사회적경제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2019년 1월 출범한 공익재단이다. 그동안 활동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볼 수 있나.
“96년 자활센터를 만들고 2001년까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초대 협회장을 맡았죠. IMF 사태가 터졌을 때 사회적 일자리를 처음 제안했어요. 90년대 중반 일본에 22번 다녀오면서 노동자 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어떻게 하는지 봤어요. 중고령 노동자 협동조합 운동도 보게 됐죠. 은퇴한 사람들이 자립하도록 지역사회에서 공원·하천관리 일을 주고 그로 인해 노동과 사회 참여, 자기 공동체를 유지하는 건강한 모습을 봤습니다. 풀타임 일을 가질 수 없는 지역 여성들이 어려운 노인과 장애인에게 약 배달을 하거나 간병하는 모습도 봤어요. 그렇게 해서 자활센터에서 처음 만든 일이 무료 간병인 제도입니다. 그때 여성에게 주목했어요. 일용직 노동자 남편들이 실직상태에 빠지면서 여성은 더 힘들었죠.”

자활센터는 사회적기업의 토대가 됐다. 2003년 자활센터에서 ㈜컴윈이란 최초의 사회적기업이 탄생했다.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사회적기업법)이 제정됐다.

송 신부는 2000년 9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건강이 안 좋아 영국에 가 있으면서도 영국의 사회적 기업을 많이 둘러봤다고 한다. 돌아와서 나눔의 집과 자활센터 일을 하다가 다시 병을 얻어 2003년 9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영국에 머무르다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다시는 이 계통에 발을 안 담글 거야’라고 공언했지만 영국에 있을 때도, 돌아와서도 노숙인 사업, 사회적기업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몇 달을 고사하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지요. ‘사회적경제라는 우산 아래 자활센터, 협동조합, 마을사업 등 다 들어와라,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노동현장으로 향하다

송 신부가 내건 다섯 가지 조건은 이렇다. 흩어져 있는 사회적경제운동 민간네트워크를 만들고, 정부·정치의 역할도 중요한 만큼 민관네트워크를 만들고, 각 원내정당에 사회적경제위원회를 만들고, 여러 대학에서 사회적경제를 교육으로 채택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마지막으로는 ‘사회적 금융’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일반 금융은 ‘사회’자가 들어가면 안 쳐줍니다. 예컨대 매일노동뉴스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신용등급 하고 똑같죠. 얼마나 버나가 중요하지 사회적 가치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안 쳐줘요. 이런 사회적 금융을 안 만들면 우리는 금융에 예속됩니다. 사회적 경제활동을 하면서 독자적 금융체계를 갖추자, 몬드라곤 협동조합 성공 등 관건은 교육과 금융에 있다, 이걸 만드는 게 내 과제다. 그래서 사회가치연대기금은 내 마지막 미션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지난 7월 파업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을 위한 희망버스를 제안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정말 고민이 많았다. 근본적으로 생명·안전에 대한 경시, 물신주의가 일으킨 참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경제·성장 위주와 인간을 도구화·상품화한 결과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생명이다. 지금도 산재로 매년 2천명씩 죽어 간다. 생명이 경제보다 위다. 담론을 만들고자 시민사회, 전문가, 유가족 등이 다 모였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그 전에 반올림, KTX 승무원, 고 문중원 기수 등 찾아가고 중재역할을 하고. 대우조선해양 희망버스도 내려가고. 내가 노동운동가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당장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사회적·구조적 이유로 피해를 당하고 있다면, 그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갖는 게 인간·시민·이웃·종교인으로서 의무이기도 하다.”

- 노란봉투법 입법에 대한 의견은.
“우리 사회가 잔인하다. 제가 재벌 대기업 경영자나 경제단체 사람들을 만나면 ‘여러분이 원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냐’ 그걸 가지고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대화하자고 한다. 그러면 (아무) 말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년간 여러분 부의 총량은 수백배 늘었지만, 노동자는 70·80년대도 아니고 지금도 1년에 1천명, 2천명 죽는 게 말이 되나. 기업가 정신도 있지만 한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좀 더 인간적 사회,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위한 것이다. 사랑이란 동정과 연민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한 이웃에 대한 존중, 동정, 연민, 그것이 기초다. 노란봉투법도 마찬가지다. 함께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또다시 다가오는 경제위기, 사회적 연대 준비돼 있나

-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대화가 중요해 보인다.
“여러 사건을 보면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다. 하지만 대화를 못한다. 대화하는 방법, 대화의 경험이 너무 적다. 언제부턴가, 대화하기도 전에 낙인찍고 규정하니까 안 된다.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합의’는 최종적 결과의 산물이다. 협의도 대화도 하지 않고 무슨 합의냐.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협의를 축적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기구가 아닌, 사회적 협의기구, 사회적 대화기구라고 했으면 한다.”

- 어떤 인연과 계기로 매일노동뉴스 후원회장을 맡게 됐나. 매일노동뉴스에 바라는 바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매일노동뉴스 초대 발행인인) 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노동계 뉴스를 많이 봐 왔다. 특히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칼럼을 본다. 그 칼럼 때문에 한 사무총장에게 보자고 해서 ‘노동공제조합 풀빵’을 만들게 됐다. 매일노동뉴스는, 노회찬 의원의 10년과 박승흡 회장의 20년이, 고맙고 기적 같은 일이다. 매일노동뉴스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고, 누군가는 약자를 대변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기울어진 운동장인가. 우리 교회 내부에서 만날 그쪽(사회적 약자) 편만 드냐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도 편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약자들 편이 없으니 나라도 서 있어야지, 생각한다. 매일노동뉴스를 보면서 기적 같고 더 성장했으면 한다. 오히려 같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고맙다.”

- IMF 사태 같은 경제위기가 몰려온다고 한다. 또다시 희생은 사회적 약자가 될 텐데.
“얼마 전 금융계 원로와 만났는데, 올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내년 중반 이후가 더 걱정된다고 하더라. 더 큰 문제는 대기업은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위기시스템을 갖췄지만 중소기업과 사회적 약자가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젊은이들 말이다. 어느 자리에서는 ‘대기업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 사다리 하나를 끊을 수밖에 없다, 목인지, 허리인지, 종아리에서 자를지는 상황을 두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딘가 잘라야 하고, 끊어지니 사다리 밑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외환위기 때 사회적 책임, 국가적 책임을 말했다. 이런 위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온다.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국가의 공적 능력이 있나? 시민·노동영역에서 대응할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이 위기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연대와 구체적 고민을 해 나갔으면 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보다 생명의 가치가 우선인 사회가 됐으면 한다. 이걸 위해서라면 나에게 요청되는 일에는 계속 참여하려고 한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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