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 노동자와 종교·문화예술·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꿀잠을 지키는 사람들’이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청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존치를 위한 공람의견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비정규 노동자의 쉼터이자 연대 공간인 ‘꿀잠’이 존폐 기로에 놓였다. 꿀잠이 자리 잡은 서울 영등포구 신길2구역에서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철거 위기에 처했다. 차별받고 고통받는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꿀잠을 존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한 집, 내줄 수 없어”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과 꿀잠 대책위원회 ‘꿀잠을 지키는 사람들’은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꿀잠은 저임금과 불안한 고용형태로 고통받는 비정규 노동자가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부당한 해고에 맞서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집”이라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없이 최초로 만들어진 비정규 노동자들의 공간으로 공익성과 공공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꼭 존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꿀잠 대책위에 참여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는 “꿀잠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며 “없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해 온 집을 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2016년 꿀잠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 백기완 선생과 <두 어른> 전시회를 열고 붓글씨와 새김판을 판매했다.

꿀잠이 위치한 신길동 190번지 일원은 2009년 8월 재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2020년 3월 재개발조합이 설립되면서 재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꿀잠은 이날 영등포구청에 신길2주택재개발정비사업 정비계획변경(안)에 대한 단체 52곳의 의견서와 개인 5천663명의 연명의견서를 제출했다.

꿀잠은 “재개발주택정비조합이 제출한 정비계획변경(안)에는 35층 아파트를 짓겠다는 내용만 들어 있다”며 “꿀잠을 존치해야 한다고 수차례 의견을 개진했지만 꿀잠을 보존한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은 의견서에서 “꿀잠은 주거시설이 아니고 공익을 위한 공동이용시설이기 때문에 공동주택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주택재개발사업은 꿀잠의 존치와 운영을 위태롭게 한다”며 “조합의 편의를 위해 사업을 추진하면서 공공재인 꿀잠을 없애는 것은 공공성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꿀잠 지하실에 리모델링 과정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신훈 기자>
▲ 꿀잠 지하실에 리모델링 과정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신훈 기자>

지난 4년여간 연인원 1만5천명 이용
작은 단체에 활동 공간 내어주기도

2017년 8월19일 개소한 이후 연인원 1만5천여명이 꿀잠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8년째 복직투쟁 중인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장은 꿀잠의 단골손님이다. 지난 6일 밤에도 경북 구미에서 올라와 꿀잠에서 잠을 청했다. 차 지회장은 “예전에는 상경집회를 하면 금속노조 사무실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잠을 잤다”며 “꿀잠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따뜻한 방에서 묵고 뜨거운 물로 씻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꿀잠은 지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싸울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라며 “해고노동자에게 꿀잠은 단순한 4층짜리 건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에게 꿀잠은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안식처다. 김 이사장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싸우다 피폐해진 몸으로 상경해서 참담한 심정으로 아들 빈소에 있을 때 꿀잠이라는 곳을 소개받았다”며 “꿀잠에 가 봤더니 따뜻하고 포근하게 반겨 주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나라에 이런 공간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가장 힘없고 힘든 사람이 모이는 꿀잠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고 이한빛 피디 어머니 김혜영씨는 “꿀잠은 산재 피해 유가족과 비정규 노동자가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라며 “모든 이들의 희망인 꿀잠을 이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꿀잠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다. 발달장애인 권리옹호 단체인 피플퍼스트성북센터나 희망의 노래 꽃다지 같은 작은 시민·사회·문화단체가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교육센터 ‘들’도 입주해 있다.

▲ 꿀잠 지하실에 노동자들의 투쟁 일지가 빼곡히 적혀 있다. <신훈 기자>
▲ 꿀잠 지하실에 노동자들의 투쟁 일지가 빼곡히 적혀 있다. <신훈 기자>

3천명이 십시일반 모금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리모델링한 쉼터

사단법인 꿀잠은 2016년 6월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종교계·문화예술계·법조계 인사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노동자 등 3천여명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해 2017년 1월 쉼터를 마련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에 옥탑방이 딸린 낡은 건물을 3개월여간 연인원 1천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직접 단장했다. 당시 리모델링에 참여한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건축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사포질부터 페인트칠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일을 거들었다”고 말했다.

꿀잠이 신길동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다. 지방에서 상경하는 노동자들이 쉽고 편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서울 도심에 쉼터를 마련하려 했지만 높은 땅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치솟은 부동산 가격을 고려하면 재개발에 따른 보상을 받더라도 서울에서 새로운 쉼터를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더라도 주거용 건물을 쉼터에 맞게 정비하려면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운영 중단이 불가피하다.

김소연 꿀잠 운영위원장은 “거리에서 늘 어렵게 싸우는 분들이 이곳에 와서는 꿀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쉼터를 운영해 왔다”며 “차별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 꿀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꿀잠과 꿀잠 대책위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영등포구청 앞 릴레이 1인 시위를 계속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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