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켜진 판교테크노밸리. <판교테크노밸리 홈페이지>

IT업계의 포괄임금제 폐지 바람이 계속되고 있다.

올해 초 한게임으로 알려진 NHN과 모바일 게임 ‘바람의 나라 : 연’ 개발사 슈퍼캣이 포괄임금제 폐지를 결정한 데 이어 카카오뱅크 노사도 최근 포괄임금제 폐지를 합의했다. 2017년 게임업계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원흉으로 포괄임금제가 지적된 뒤 생긴 변화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 정부가 포괄임금제 규제를 미루면서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경우 포괄임금제 폐지를 기업 선의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게임업 종사자 10명 중 8명은 여전히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다. 이 탓에 정부가 약속한 포괄임금제 지침을 마련하라는 노동·시민·사회단체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은 현 정부 임기 내에 포괄임금 규제지침 발표 의지를 밝혔지만 물 건너가는 모양새다.

유명 게임업계 잇단 폐지에도
10명 중 8명 ”포괄임금제 적용”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2021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게임 제작업 종사자 1천명 중 79.6%가 포괄임금제로 급여로 지급받는다고 답했다. 2017년 펄어비스를 시작으로 넥슨·넷마블·엔씨소프트·웹젠·위메이드·스마일게이트·게임빌·컴투스 등 많은 회사가 포괄임금제를 폐지했지만 게임업계 종사자 상당수는 여전히 포괄임금제를 적용받고 있는 것이다.

노조가 없는 곳의 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지 못하지만, 익명 커뮤니티에서 지속적으로 불만이 포착된다. 게임 ‘배틀 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에 재직 중인 직원인 A씨는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삶에 일 말고는 없게 돼 버림”이라며 주말 출근과 포괄임금제 문제를 지적했다. 직원 B씨는 “일이 많을 때는 자정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게 단점”이라며 “이럴 때 포괄임금제의 단점이 너무 부각된다”고 평가했다. 크래프톤은 지난해 6월 일부 직원이 상급자에게 야근을 강요받고 폭언을 들었다며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동부지청에 진정을 내 논란이 된 회사다. 이 회사는 같은해 노동시간을 조작해 주 52시간(연장 12시간 포함) 상한제 위반 의혹도 받았지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국정감사 증인 채택이 불발되면서 논란이 사그라들었다.

포괄임금제를 폐지하지 않은 게임회사 네오위즈도 “일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느낌”이라며 “포괄임금제가 의욕을 깎아 먹는다”는 노동자들의 익명 증언이 나온다.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 관계자는 “(노조와) 단체교섭 없이 폐지되는 사례는 많지 않고 노조 조직이 확대되면서 폐지되는 경우가 현재로서는 많다”며 “(IT업계) 전체적인 노동시간이 높은 데에는 포괄임금제 영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차상준 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장은 “일하는 시간이 길다고 생산성이 높은 것이 아닌데,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오래 앉아 일하라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여전히 한다”며 “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 5년째 “의견수렴·검토 중”

고용노동부는 포괄임금제 문제에 손을 놓은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2022년까지 연평균 노동시간을 1천800시간대로 만들겠다며 포괄임금제를 규제를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노동부가 2017년 10월 발표하려던 포괄임금제 사업장 지도지침은 문재인 정부 임기 종료를 3개월 앞둔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안경덕 노동부 장관은 최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포괄임금제 규제지침을 문재인 정부 임기 내 가능한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침이 현 정부 임기만료 전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동부 관계자는 “지침은 포괄임금제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와 판례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며 “판례 내용 중 애매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정리할지 지난해 말에 추가로 전문가 의견과 근로감독관들의 의견을 듣고 그 내용을 다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발표 시기를 포함해 향후 일정이라든지 지침 최종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조은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장은 “실태조사가 더 필요하다며 뭉개고 발표를 미룬 게 다섯 차례 정도 되니 이제는 지침이 나와도 실질적으로 포괄임금제를 규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올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포괄임금제가 규모가 큰 IT기업 위주로 폐지되고 있지만 더 큰 피해는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노동자가 입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포괄임금제로 노동시간 자체를 아예 규제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2020년 11월 포괄임금제를 규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노동부는 2017년 10월 ‘포괄임금제 사업장 지도지침’ 발표를 예고하고 초안을 마련했지만 현재까지 ‘검토 중’ ‘의견수렴 중’이라며 함흥차사가 된 지 오래”라며 “(노동부의 지침 연기가) 사용자들에게 하나의 시그널이 돼 노동자에게 불이익한 사례가 속속 발생하고, 노사분쟁을 심화시키는 발단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7년 공개된 포괄임금제 지침 초안에는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으면 명시적 합의가 있어도 무효”라는 원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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