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무능한 겁니다. 할 수 없어 못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은 배신이고 비겁한 변절입니다.”

지난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원 사무실에서 만난 김도형(54·사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가 속내를 격정적으로 쏟아 냈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이기도 하다. 김 공동대표는 “많은 이들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분노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2017년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열망은 2020년 총선에서 180석 슈퍼여당을 탄생시켰다. ‘촛불정부’가 ‘힘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힘을 실어 줬다. 그런데 입안이 쓰다.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것도,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것도 의석이 부족해서, 힘이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김 공동대표 말대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아주 무능하거나 비겁하게 변절한 것이다.

‘코로나’라서, 혹은 ‘코로나’ 때문에

- 지난해 총선이 끝난 직후 민변 회장으로 선출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시간을 보냈다. 사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민변만이 아니라 인권·시민단체 모든 NGO단체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과 만나고 부딪치며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 그럴 수가 없으니 제대로 사업을 하기 어려웠다. 일상이 멈췄다. 민변도 멈췄다. 그래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회장으로서 사실 코로나가 핑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도 한다. 못 한 것들이 많은데 ‘코로나19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 코로나19와 디지털 전환으로 우리 사회는 격변기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중요한 것은 인권이다. 차별과 혐오, 편견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 그러한 사회정의가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사회정의라는 가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어떤 사회를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를 담은 법이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공정’의 절대성에 갇힌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차별을 없애자는 정책이 일부 공공기관 노조 조합원의 ‘공정담론’과 충돌하면서 사회갈등이 됐다. 비정규직의 차별 해소와 공정이 부딪히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비정규직을 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까. 그게 바로 ‘정의’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먹고사는 문제가 늘 불안하다. 일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서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한다. 기업들은 비용을 줄이려고 비정규직을 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게 ‘정의’라면 자본주의의 경제에서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게 맞다. 그래야 기업들이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먹고사는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다. 이걸 지켜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삶이 파괴되고 사회공동체가 무너진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쓰면 안 된다. 공정이라는 가치는 중요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회의 공정이 절대화되고 있다. ‘공정’이 다른 가치보다 우선하면서, 최고의 사회정의를 대변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 ‘공정’으로 포장된 능력주의가 과연 제대로 된 공정인가? 우리는 지금 그런 공정의 절대성에 갇혀 버렸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공정의 가치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국가 폭력 사라졌지만, 사적 영역은 폭력 난무
차별금지법 제정 외면, 국가가 폭력을 방치하는 것

-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것은 14년 전이다. 200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얼마나 진보했나.
“지금은 위기다. 세계가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복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경제 논리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은 후발주자였다. 경제개발에 급급했고 세계가 변하던 90년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휘청거렸다. 사회공동체가 무너지고 정의라는 가치가 바뀌고 거꾸로 가고 있다. 공정으로 위장한, 능력주의라는 경제논리가 최고의 가치인 양 사람들을 현혹한다.”

- 인권은 얼마나 나아지고 있을까. 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가.
“물론 국가 폭력은 이전에 비해 사라졌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폭력이 난무한다. 최근 일어나는 성폭력, 교제살인, 아동학대 사건들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가. 강자가 약자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차별을, 혐오를 사회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 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여당은 뭘 하고 있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는데도 눈치만 보고 있다.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토론회를 열면서 성소수자를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진영에 마이크를 주고 있다. 과거에 국가가 직접 폭력을 행사했다면 지금은 폭력을 방기하고 있다.”

-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 만들어질 정도로 직장 폭력(갑질)도 심각하다. 직장 문 앞에서 민주주의는 멈춘다고도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일터에 미치는 효과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생활 단위가 바로 직장이다. 그래서 일자리에서 차별과 혐오, 편견이 없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돼도 종교계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가장 영향을 받는 쪽은 기업이다. 성별, 국적이나 인종, 성적지향, 나이, 장애, 병력, 임신출산을 이유로 고용을 비롯해 재화·용역의 공급·이용 등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 돈이 남느냐를 제일 먼저 따지는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의 자유’가 침해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경영의 자유는 인권보다 중요할 수 없기 때문에 양보해야 한다. 기업은 어쨌든 종교계가 반대하고 나서니 ‘땡큐’일 것이다.”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국민을 표로만 보는 정부와 여당에 실망과 분노”

-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로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힘에 부치는 상황이긴 하다. 지난달 8일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연내 제정이 불가피하게 무산된다 해도 반드시 이뤄 내야 할 법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국가인권위원회가 한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이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에 찬성한다. 어느 때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여론이 높은데 정작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지난해 4월 총선에서 국민들이 ‘민주개혁진보 세력’에 180석이라는 표를 몰아줬다. 희망이 보였다.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개혁입법 과제들을 해결할 기회라고 얼마나 기대했나.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먼저 발의하면서 7년 만에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이 등장하고 인권위가 국회에 법 제정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지지부진했다. 뒤늦게 발의는 했지만, 대선과 맞물리면서 결국 뒷전이 됐다. 많은 이들이 국민을 표로밖에 보지 않는 지금의 정부와 여당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 보수언론은 문재인 정부에 민변 출신이 다수 포진했다고 문제 삼는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민변 출신들이 많이 있는데.
“민변은 변호사 모임이다. 한때 회비를 내고 회원이었으니 출신인 것은 맞다. 지금 정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총선 이후에는 기대가 더 커졌다. 그런데 한 것이 별로 없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배신이고 비겁한 변절이다. 눈치만 보다가 5년이 지났다. 무능한 거다. 철학이 없는 사람들이 현 정부를 이끌어 온 것이 문제다.”

“달라진 노동형태에 맞는 새로운 노동법제 만들어야”

- 차기 정부가 추진해야 할 노동법제 개혁을 하나만 꼽는다면.
“플랫폼 노동자라고도 하는 특수고용직에 대한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 방법론적으로 갈린다. 기존 노동법으로 포섭하자는 입장이 있지만 우리는 ‘공장법’이다. 소속 사업장에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하는 체계에 기반한 법이다. 과거와 노동형태가 많이 달라졌다. 이전처럼 몇 시까지 어디로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 형태로 노동이 이뤄진다. 전향적 입법이 필요하다. 노동계는 기존 법으로 포섭하려고 하고, 사용자도 기존 법을 기준으로 노동자가 아니라고만 한다. 노동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200년 전 노동법을 만들었듯이 새로운 형태로 특수고용 노동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민변 노동위원회와 개인적 견해가 다를 수 있다.”

- 민변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인가.
“민변은 변호사만 회원자격이 있다. 변호사끼리만 모여 있는 것은 ‘한계’이기도 하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래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권변호사 단체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공동체와의 연대를 위해 인권을 옹호하는 법률전문가로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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