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분이다. 그가 창시한 대종교 안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주축이 대종교인이었으며 임시정부 각료와 의정원 의원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민족의 시원과 뿌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새롭게 보게 했으며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민족의 말글살이와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때다.

출생과 성장

그는 1863년 2월2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나인영.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다. 어려서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중요한데 구례에 살던 왕석보 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됐다. 왕석보는 양명학에도 밝았으며 다산 정약용의 사상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학자로서 수구 보수적인 색채가 강했던 당시 유림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로 매천 황현 같은 이가 있는 것을 보면 어린 나철도 애국적이고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갖도록 하는 데 스승에게 받은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1891년 그는 과거 시험을 보고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게 됐다. 임금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하는 사관인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고 이후 33세 때인 1895년에는 오늘의 국세청장에 해당하는 징세국장에 임명되지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스스로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대일 외교와 을사 6적 암살 미수 사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주로 수도와 수행에 정진했다고 한다. 이때 산중에서 수도하는 인물들과 교유했으며 자신의 영성을 개발하고 종교적 체험을 했다. 후일 종교지도자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기세로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자신들의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나철이 산중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시국이 너무 엄중했다. 그는 나라와 사회 문제에 대응하기로 했다. 그와 절친한 이기·홍필주·이건 등과 논의해 일본인의 이민을 여권 없이 받아들이는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는 운동을 시작으로 정세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침략 당사자인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도일했다. 그는 모두 6차례나 일본에 갔는데 일본 요로의 인사들과 만나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일 간에 서로 주권을 존중하면서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도쿄의 궁성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으나 먹혀들 리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에 체결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격분을 참지 못한 나철은 을사 5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1906년 귀국했다. 나철은 이기·오기호·김동필·이홍내·박대하·서태운·이용채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이완용·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근택 등 을사 5적에 법부대신 이재극까지 포함해 을사 6적으로 규정하고 한날한시에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동지들이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자 동지들의 희생을 막고자 나철은 자수했고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1907년 12월7일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아 전남 신도군 지도로 갔다. 복역하던 중 고종황제의 특사로 5개월 만에 풀려났다. 황제의 특사권이 살아 있던 시기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대로 두면 나라가 망하는 게 눈에 번히 보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 담판을 하기로 했다. 일종의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이다. 이때가 1908년 11월의 일이었다. 도쿄의 한 여관에 머물고 있을 때 두일백이라는 노인이 찾아왔다.

대종교 중광

두일백 노인은 백두산에서 백봉신사에서 사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단군교포명서>를 주면서 이를 널리 홍보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떠났다. 나철은 1906년에도 서울 서대문역에서 백전 노인에게 백봉신사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책 두 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두 번에 걸친 신비로운 일로 해서 나철의 인생은 크게 전환됐다. 이러한 일을 할 때가 아니라 다른 길로 가라는 두 노인의 질타요, 권고였던 것이다.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우국지사 몇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을 하나로 묶어 세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는 사상가이자 종교인으로 거듭났다.

나철은 구국의 희망을 품고 도쿄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름도 나인영에서 외자인 나철로 바꾸었다. 밝을 철(喆)자를 써서 밝은 마음으로 조국의 광복을 밝히겠다는 일념이었다.

1909년 1월15일 밤에 서울 재동에서 이기·오기호 등 오랜 동지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천대례를 한 데 이어 <단군교 포명서>를 공표했다.

나철은 새로운 종교를 창교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종교를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중광(重光)이라고 했다. 그리고 1년 만인 1910년 8월5일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여기서 ‘대종(大倧)’의 ‘대(大)’ 자는 크다는 뜻이며, ‘종(倧)’ 자는 즉 상고신인(上古神人)이라는 뜻으로 단군을 의미한다. 즉 대종은 단군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단군교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꾼 것은 단군을 전면에 내세우면 일제의 탄압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작용했다고 한다. 어떻든 나철은 대종교로 중광하고 나서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즉 비록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나라의 도인 정신이 존재한다면 결코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심에서 교세를 확산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여기서도 즉 정신은 단군에 대한 의식인 것이다.

교세는 점차 확산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교인은 6천명으로 늘어났다. 대종교는 교리뿐만 아니라 역사에도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대종교의 교세 신장과 더불어 민족 사학에 대한 이론도 풍부해졌다. 이러한 논지를 펼친 인물들로 대종교 신자이거나 이에 영향을 받은 박은식·신채호·정인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교세 확장을 보고 가만 놔둘 일제가 아니었다. 감시와 탄압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기독교·불교 신도 등은 인정하지만 대종교는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단군을 신봉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행위였기 때문에 조선 통치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로 여겨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고 나철을 수괴로 봤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나철은 이를 예견하고 1910년에 조선 동포가 많이 사는 북간도로 진출하고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면 본사를 북간도로 옮기려고 계획하고 이후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에 본사를 뒀다. 북간도 일원에서 포교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져 교인들이 대대적으로 늘어나자 중광단을 조직해 각지에 교육기관을 세우고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순교와 순국

1916년 9월10일 나철은 시봉자 여섯 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 사당 앞 언덕에 올라가 북으로는 백두산을 향해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오후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마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행을 시작했다. 3일째 되는 날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서를 남기고 숨져 있었다. 전통 수련의 하나인 조식법으로 호흡을 멈추어 숨을 거둔 것이다. 그가 황해도 구월산을 선택한 것은 단군이 죽어 신이 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서를 남겼는데 유서의 내용은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와 한배님과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부분과 일본 총리와 조선총독에게 일제의 조선 침탈과 대종교 탄압에 항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자결은 순교이자 순국인 것이다. 길림성 화룡시에 그의 묘소가 있는데 2·3세 교주를 한 김교헌·서일과 함께 대종교 3종사의 묘소로 조성돼 있다.

이후 대종교는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운동 세력의 중추 역할을 하다가 1942년 임오교변, 즉 3세 교주 윤세복 외 20여명이 검거돼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는 일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나철의 장남과 차남인 정련과 정문도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고문을 당하고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했다.

정부는 1962년에 그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순국 100돌을 맞아 그의 출생지인 전남 보성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조성됐다.

나철 선생은 민족에 자존·자각·자부심을 일깨운 위대한 선각자이며 그가 일으켜 세운 대종교는 종교 이전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의 한줄기 큰 맥을 형성했던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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