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서일 선생(1881~1921)

백포(白圃) 서일(徐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 이전에 사상가였으며 종교인이었고 교육자였다. 일제하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독립운동 전선에 서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종교집단은 무엇일까? 바로 대종교(大倧敎)다. 대종교는 잘 알려진 대로 국조 단군을 신봉하는 종교다. 민족의 시원이자 뿌리인 단군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니 강렬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고 독립을 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원천이 됐다. 대종교가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는 국내뿐만 아니라 간도·연해주 일대에 살던 동포들, 그중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대종교 신자였던 데서 알 수 있다. 적어도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들어오기 전까지 간도 일대에서 가장 영향을 미쳤던 것은 대종교로 보인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21명이,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고 박은식·신채호·이상설·김두봉·신규식·김좌진·홍범도·이범식·안희제 등 대다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서일은 대종교의 1세 교주 나철, 2세 교주 김교헌과 더불어 3종사로 불리는 인물로서 대종교의 핵심인물이었으며 대종교를 기반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수행해 나갔다.

민족의식에 눈뜨다

서일은 1881년 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 당시 대부분이 그렇듯이 어려서는 유학을 공부했다. 스승 김노규는 함경도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는데 간도지방에서의 우리 민족의 여러 활동 사실과 간도 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를 밝힌 <북여요선>을 저술한 학자이기도 했다. 스승의 이러한 민족적인 인식은 어린 서일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후 서일은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함일학교의 전신인 유지의숙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함일학교는 지역 유지였던 이운협이 설립한 사립학교로서 서일 외에도 간도대한국민회 사령 안무,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함북의 명문학교였다. 경성은 함북의 대표적인 의병인 경성의병이 일어난 곳이다. 일제는 간도와 연해주로 진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임을 인식하고 1907년부터 경성 나남에 대규모 병영을 건설했다. 나남의 19사단 사령부는 서울 용산의 20사단 사령부와 더불어 일제 군사침략의 2대 거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지역 상황은 서일에게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 1902년 유지의숙을 졸업한 서일은 이후 10년간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아동교육에 매진했다. 서일의 생애에서 교육자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한 시기였다.

간도로 이주해 대종교에 입문하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서일은 이듬해인 1911년 간도로 이주했다. 단순한 이주가 아니고 민족해방을 위한 전략과 포부를 가지고 망명한 것이다. 초기에는 길림성 왕청현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열성을 쏟았다. 간도에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대종교 교주였던 홍암 나철을 만난 것이다. 1911년 7월께 길림성 화룡현에서 나철을 만나 대종교의 교리와 심오한 진리에 깨달음을 얻게 돼 대종교에 귀의했다.

대종교에 입문한 후 포교활동에 열심히 종사해 불과 3년 만에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함경북도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 초기 간도에 이주한 한인들 대다수는 함북 출신이어서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서 포교활동에 혁혁한 성과를 거두게 됐다. 대종교 내에서 서일의 활약은 두드러져 총본사의 중책을 맡게 되고 입교한 지 5년도 안 되어 대종교의 최고 교질인 사교로 되는 등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대종교 경전인 <삼일신고>와 <신리대전>을 지극한 마음으로 존중했는데 이 두 책에 대한 해석과 운용을 담은 자신의 저서를 저술했다. <회삼경> <삼일신고 강의> <삼일신고 도해> <구변도설> <진리도설> <종지강연> <삼문일답> 등을 저술해 대종교 교리의 체계화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서일은 이후 삶을 마칠 때까지 대종교인로서 투철한 신앙심을 유지했다.

중광단 조직과 무장투쟁의 길에 전념하다

1911년 서일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그 시작은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 창립이었다. 중광단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고유의 단군 신앙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백순·박찬익·계화 등 대부분 대종교인이 참여했다. 서일은 31세 나이에 단장으로 추대됐다. 중광단은 초기에는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에 치중하다가 점차 무장투쟁의 길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중광단과 관련해 동원당·자유공단의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자유공단의 단원이 1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3·1 운동 후인 1919년 5월 중광단은 변화·발전을 모색해 대한정의단을 조직했고 서일이 단장에 취임했다. 대한정의단은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이 무렵 대종교 2세 교주인 김교헌이 교통을 전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해야 할 때임을 인식하고 전수를 5년간 유보하기로 했다. 1919년 7월 일본 내각 총리대신인 하라 다카시에게 일종의 통첩성 편지를 보냈다. 당시 대한정의단은 결사대원을 모집해 1천37명의 결사대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대한정의단 내부에는 군사부문 전문가가 없어서 군사전문가들을 영입하거나 연합이 필요했다. 서일은 한말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좌진·조성환 등이 포진한 길림군정사와 연합을 추진했다. 길림군정사 역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으나 군사전문가는 있으되 대중적 기반은 없는 실정이었다. 서일의 연합제안을 받아들여 1919년 10월 두 단체가 연합해 군정부인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항일무장투쟁의 기지를 구축해 무장혈전을 준비해 나갔다.

청산리 대첩과 연해주로 이동

대한군정서 조직체계는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뉘어 있는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했고 사령부는 군사부문을 담당했다. 서일은 총재부 총재로, 김좌진이 사령부 사령관이 됐다.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 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해 1920년 9월9일 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교성대를 조직했는데 교성대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중심 부대가 됐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에 걸쳐 일어난 전투로 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청산리 승전 후 서일은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명이 일본군 1천300여명을 격살했다”고 보고했다.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이후 대종교도를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희생당한 교도들이 수만 명이 이르렀다.

서일은 동포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고자 대한군정서를 소만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했다. 밀산에는 대한독립군 외에 여러 부대들이 집결햇다. 병력은 3천500명에 달했다. 밀산에 집결한 10여개 단체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총재에 서일이 추대됐다. 밀산에서 우수리강을 건너 이만을 거쳐 소추풍령에 도착했다. 그해921년 3월14일 러시아령 소추풍령에 집결한 부대는 1천여명이었다. 밀산의 대한독립군단을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했다. 여기서도 서일은 총장으로 추대됐다. 대한독립군단의 일부 부대들은 1921년 5월 러시아령 자유시로 갔으나 군권 관련 다툼으로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됐다. 그러나 서일·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돌아왔다.

죽음과 그 후

밀산에서 재기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던 중 1921년 8월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해 방화를 하고 수많은 청년 병사들을 죽였다.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서일은 다음 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자살했다. 그의 나이 41세.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아까운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자살과 관련해서는 현재 자살이 정설로 돼 있지만 마적의 유탄에 맞아 피살됐다는 설도 있다. 8월27일에 자살했다고 하지만 외출한 지 12일째에 시신을 발견하는 등 여러 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무장독립운동 진영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그리고 대종교 교통을 이어받을 적임자로 내정돼 있는 등 대종교에서 갖고 있는 위상,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가 없으면 교단이나 독립군들이 크게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쉽게 자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언으로 알려진 대목은 다음과 같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서일의 유해는 흑룡강성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했다가 1927년 봄 화장한 후 화룡현 청호로 이장했다. 1924년 3월16일 3세 교주 윤세복은 서일을 종사로 추승했다. 그곳에는 나철·김교헌·서일 3대 종사 묘역이 조성돼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